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으로 오늘의 정치 현실을 명확하게 설명못한다. 분열의 정치 지형을 달리 설명할 용어를 찾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지 않았기에 과거의 용례가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파와 좌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용어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형성된 인식의 틀 안에 있기에 다른 상황에서는 의미가 달라지고 경험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이제 보수와 진보란 용어는 민주화 이후 정치 상황에서 적대적 공존관계를 유지하려는 대립 관계 이상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용어의 문제 처럼 현실도 그러하다. 노무현과 박근혜의 몰락 이후 조국 사태에 이르러서 확인되는 것은 오래된 제6공화국 체제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미래의 대안 제시를 못하는 낡은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사회를 반영하는 미디어 시스템을 보아도 그러하다. 아직도 TV시대를 이끄는 지상파 공영방송 체제는 2000년 통합방송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KBS와 MBC를 보면 1980년 제5공화국 출범시의 언론통폐합에 의해서 탄생된 구조의 연장이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과거의 시스템이 현실을 다스린다. 1997년과 2008년 두 번의 금융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사회 현실을 바꾸었지만 정치의 기본 틀은 바뀌지 않았다. 제6공화국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새로운 요청이 등장하였다,

현 집권 정치 세력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자처하지만 그들은 민주화 이전의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서 현실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는 늦게 도착한 기득권층에 불과한 것은 조국 사태 이후 드러난 그들의 민낯이 확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든 문제가 검찰 개혁이 안되서 그렇다고 한다든지, 언제나 사람이 먼저 또는 높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자기 편 사람을 뜻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이 오만하고 파렴치 하기까지 할 때에 모두가 불행해 진다. 정치가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자신을 개혁하지 못하면서 미래로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낡은 체제를 보존 유지하고 있다.

변화를 막는 수단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인데,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구나에게 익숙한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하여 과거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며 대응하게 하는 것이다. 대개 구원(舊怨)의 해결이라는 방식이 선호되는 것은 분노라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분노는 노무현 또는 박근혜를 위한 복수에서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또는 과거의 복수 거리를 찾는데서 드러난다.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하거나 피해자를 대신한다는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복수의 과업을 자신의 인생의 과제로 설정하는데서 실천의 동력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건국 이전까지 역사를 소급하여 친일 잔제 청산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부르짖고 있는 21세기 이곳에서 오직 피해자만이 있으면서 복수를 꿈꾸는 조선풍의 복수극이 전개된다.

복수의 실천이 정치의 최우선의 과제가 되었다, 노무현의 몰락 이후 그리고 박근혜의 몰락 이후 각 진보와 보수는 각각 복수(復讐)의 진영으로 재편되었다. 서로 치열하게 대치하는 복수의 진영만이 소리를 높이면서, 상대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서로 싸워가는데, 우군과 적군을 구분하기와 누가 배신자인지를 가리는 다툼으로 밤낮을 지세운다. 이런 다툼이 시들어질 때면 복수의 진영은 복수극에 가담하지 않는 이들을 중도(中道)라고 비난하면서 시비를 건다. 유일한 과제인 복수를 위한 세상에서 복수를 위한 사건이 필요하고 피해자만이 존재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피해자가 고안되고 복수를 위한 가해자와 사건 만들기가 이루어진다. 불타는 용광로와 같은 분노가 모든 정치를 집어삼킨다. 오직 복수만이 과제가 될 때에 이것만을 수행하기 위한 자원을 모으고 수단을 강구한다. 복수만이 정치적 동력이다. 가치나 이념은 상관이 없으며 현실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지 않고 하물며 미래가 어떻게 되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승리를 위해서, 수단이 있고 인기도 있는 전문가는 양쪽 진영을 오가며 용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수단이든 그것이 이기기 위한 방법이라면 진영에 관계없이 사용된다. 오직 승리만이 추구되는데 승리의 결과는 상대방을 축출하고 자기편만이 살아가는 과거의 회복이므로 반대편에게는 비극이다. 복수의 진영은 어느쪽이나 기존의 자리를 회복하려는 수구세력이다.

복수의 진영이 추구하는 것은 현상 유지이고 과거 체제의 보존이며 이를 위해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막는 일이다. 21세기 조선의 복수극은 피해자라는 투구를 쓰고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서 보복의 분노라는 방패로 막아내며 끊임없이 가해자를 찾아다니면서 과거 수호라는 창으로 공격한다. 복수의 진영간의 분노의 전쟁은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 같지만 자원은 소진되고 사람들은 지치기 마련이다, 전쟁터가 된 대지는 생산을 멈추고 젊은이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자원의 고갈과 젊은이의 눈물은 복수를 멈출 시기임을 알려준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의 분노로 우리의 터전을 허무는 어리석은 상황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무너진 성터를 다시 세우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에, 우선은 마음의 집부터 다시 세워야한다. 분노의 용광로의 불을 끄자.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냉정을 요구하면서 자기를 정돈할 수 있을 때에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정돈에서 주위의 정돈으로 나아가서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정보의 창구를 닫자. 유튜브든 TV이든, 인터넷이든 신문이든,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제공하는 모임이든, 나를 분노하게 만들고 완벽한 보복의 방법을 제시하며 최종적인 복수의 결말을 약속하면서 승리의 희망을 선사하는 것을 비즈니스로 하는 모든 연결을 끊자. 세상으로 돌아가서 현실속의 사람들을 만나고 실제 세계를 바라보자.

아무도 예상못한 크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서 모든 사태를 일거에 해결한다는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법이다. 단순한 해결책은 미디어에 의해서 과장되고 널리 유포되어서 정치적 환상을 만든다. 인간은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계를 지닌 인간은 이상적인 정치를 추구하지만 유토피아를 창조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시도 자체가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웠다. 상대편이 득세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을 배울 수 있다. 상대편이 득세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간을 알게 된다. 중독에 가까운 정치에 대한 지나친 몰입을 피하며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다. 분노하게 하고 근거없는 환상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날 때에 현실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을 인정하고 직접 현실에 마주칠 때에 세상을 볼 수 있다.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 진영의 지향점이 무너진 상황에서, 혼란의 전쟁의 와중에서도, 복수의 진영에서 벗어나 현실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출발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미래로 나아감은 복수를 위함이 아니고 그래서 가해자 찾기가 아니며 스스로 피해자됨에 안주함이 아니고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몫을 찾고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 자신의 길에서 자신만의 과제를 찾게될 때에 비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지향이 모여질 때에 비로서 복수의 진영이 지향하는 보복을 대신해서 이 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가치가 탄생할 것이다. 그때에 그 지향하는 바를 우리의 가야할 길이고 가는 길이며 그렇게 걷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추어진 생산이 다시 재개되고 미래의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야 하겠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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