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 PenN 정치사회부 기자
이슬기 PenN 기자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고교생이던 2006년 뭣도 모르고 전교생이 함께 떠났던 북한 수학여행 얘기다. 분단의 휴전선을 넘자 공기마저 확 달라졌던 당시 기억은 생생하다. 금강산의 깍아지른 절벽 위에 새빨간 글씨로 새겨진 김정일 찬양 문구를 보면서는 섬뜩했고, 김정일 기념비에 발을 댔다 호통을 치는 북한 안내원의 눈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마치 동물처럼 ‘조련’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던 북한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면서는 왠지 모르게 슬펐다.

김정일‧김일성의 이름을 절대 입에 올리지 말 것. 허가받지 않은 장소에서 절대 사진을 찍지 말 것. 무서운 표정의 북한 안내원은 우리에게 경고했다. 수학여행이라는 사실에 들떠 천방지축이었을법한 나와 내 친구들은 안내원의 말을 최선을 다해 따랐다. 경고를 어길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들이 협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과연 진심이었음을, 지난해 사망한 미국인 학생 ‘오토 웜비어’를 보며 뒤늦게 확인했다.

웜비어는 2016년 1월부터 17개월간 북한에 억류돼 있다 고국의 품에 돌아온지 엿새만에 허무하게 죽었다. 지난해 6월의 일이다. 북한이 ‘목숨값’을 치르게 한 웜비어의 죄목은 호텔에 붙여진 체제 선전물을 절도한 죄다. 폭압 정권의 재판장에 선 웜비어는 겁에 질려 울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웜비어는 결국 혼수 상태가 되어서야 그 끔찍한 곳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웜비어의 부모님은 이후 방송에 나와 “누구도 북한에 가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웜비어의 부모님은 북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아들을 고문하고 의도적으로 다치게 한 북한은 테러국이다. 비행기 안에서 오토는 들것에 묶인 채 격렬하게 움직이며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은 괴성을 크게 내고 있었다. 눈동자는 빠르게 돌고, 눈과 귀가 먼 식물인간이었다. 오토의 양손과 두 다리는 완전히 기형적이고 오른발에는 큰 흉터가 있었으며 심지어 치열(齒列)이 재배열된 듯한 흔적도 있었다.” 북한은 그런 곳이다. 20대의 건강한 남성이 이유도 없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숨을 거두게 만들 수 있는 무서운 곳. 미국은 웜비어 사망 사건 이후 작년 9월부터 미국인들의 북한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아직 생생한 웜비어 사망 혹은 살해 사건을 자세히 얘기하는 건, 학생들의 교육과 안전을 책임지는 한 교육감님의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나 싶어서다. 광주(光州)광역시교육청은 지난달 23일 수학여행단 방북 허용을 정부에 공식 제안했다. 이달 11일에는 북한 수학여행 허용 청원 참여를 독려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학교와 기관에 보낸 사실이 PenN 취재 결과 밝혀졌다.

장휘국 광주시 교육감은 1년도 지나지 않은 웜비어 사건을 모두 잊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내 자식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체 누가 내 자식을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북한으로 보내고 싶어한다는 걸까. 이른바 '남북청소년 평화통일 수학여행 광주시민추진위원회'가 주장하는대로, 아이들의 북한 수학여행이 평화와 통일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식의 목숨을 인질로 평화와 통일을 염원할 부모는 아무도 없다.

‘평등 교육’을 외치며 특목고 폐지를 외치는 좌파 교육감들 상당수가 자녀를 외고나 자사고에 진학시켰다는 지적은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서울교육감 재선에 나선 조희연 서울교육감의 두 자녀는 모두 외고를 졸업했고,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의 딸은 외고에 입학했다가 일반고로 전학했다. ‘평화와 통일의 길’을 위해 우리 학생들을 북한으로 보내자는 장휘국 광주교육감의 아들은 광주과학고를 졸업해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외고·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내 자식은 특목고에 보낼 수 있는 ‘교육감 나으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육청이 내린 결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고교생이었던 기자가 스스로 북한 수학여행을 선택하지 않았듯 말이다. 장 교육감은 이번에도 그런 것인가. 자칭 ‘진보’라는 장 교육감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으로의 수학여행도 ‘내 자식만 빼고’ 보내자는 건가.

미국 국무부는 북한 방문 특별 승인 조건에 ‘유언장 초안 작성’을 추가했다. 미국인이 북한에 가려면 유언장을 작성하고 가야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 조건을 우리나라에도 적용한다면 어떨까. 북한 수학여행을 가려면 유언장을 작성하고 가라고 말이다. 아마 단 한명의 학부모도 결코 북한 수학여행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장 교육감은 국제사회의 이런 경고에도 ‘남의 자식’을 북한에 보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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