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가 ‘루저들의 집합소’? 좌파의 프레임일 뿐
일베 특유의 혐오 코드, 한국 우파의 치명적인 한계
우파는 1987년 체제의 정치적 패배자...우파의 호남 발언, 오직 일베를 통해서만
정치투쟁 패배도 문제지만 진영 내부의 지적·도덕적 저열화가 가장 큰 문제
호남에 대한 혐오와 비판부터 분리할 수 있어야...정정당당하게 진정성 갖고 호남 비판해라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2000년대 초반쯤 인터넷에서 충격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에서 호남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내용만 찾아서 정리해놓은 문서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문서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전문성이었다. 한글로 번역됐다 해도 조선왕조실록은 일반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만한 텍스트는 아니다. 특히 그 방대한 분량 중에서 호남 혐오와 비하에 관련된 내용만 족집게처럼 찾아내 정리한다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즉,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상당한 수준의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단한 열정 또는 분노를 갖고 그런 작업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식인 양성은 사회적 투자의 성격이 강하다. 교육비를 부모나 자신의 노력을 통해 조달한다고 해도 그 자원은 사회 전체의 것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인문분야의 지식인은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효용보다 담론 형성 등 비가시적 기여를 통해 존재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사람의 생각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사회적 확장성과 파급력도 크다. 이공계 지식인보다 자신의 지적 작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더 강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사회적 자산이 투입됐다는 점이다. 그런 지식인이 특정 지역에 대한 원천적인 증오와 소외를 목표로 그렇게 꼼꼼하게, 그토록 정성껏 자료를 만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을 지식인으로 양육한 사회의 해체를 위해서 전문성을 악용하는 지식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는 그런 지식인들의 성배(聖杯)라고 할 수 있다. 호남,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일베의 혐오가 사회문제화하면서 좌파들은 일베에 ‘루저들의 집합소’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몇 년 전 필자가 서울대에서 강연회를 가졌을 때 서울대 총학생회 관계자들에게 듣기로는 “서울대 재학생 가운데 15% 정도가 일베”라는 것이었다.

일베 초기의 핵심 콘텐츠들은 상당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고급 지식인들이 콘텐츠를 올리면 거기에 동의하는 네티즌들이 포털이나 기타 토론 사이트 등에 퍼나르는 메시지 유통 생태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일베의 콘텐츠와 메시지는 광범위한 네티즌들의 공감을 얻었다. 회원이 최대 200만 명에 이르렀으며, 동시접속자 2만5천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것도 모바일 접속은 제외한 수치였다고 한다. 메이저 언론사 뺨치는 수준이다. 일베의 메시지는 일베를 넘어 여러 포털과 커뮤니티 사이트로 확산됐다.

요즘은 위상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일베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과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일베라는 일개 사이트의 위상을 넘어 일베의 코드를 적극 공유하는 정치적 사회적 집단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일베가 이렇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그런 메시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혐오’가 일베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핵심 코드라고 말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다. 혐오라는 표면의 심층에 자리잡은 일베의 진짜 메시지는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라고 말할 수 있다.

일베가 특히 호남에 대해 극렬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도 호남이 무임승차의 가장 대표적인 수혜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그런 무임승차의 전면적 확산에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인 우파들이 보기에 호남은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고 오히려 폐해를 끼치면서도 각종 보조금과 할당제 등으로 자격이 없는 특혜를 누리는 존재이다.

호남에 대한 일베의 이런 분노가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지는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이후 ‘대한민국의 호남화’라고 할만한 현상이 전면화되고, 여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지는 것만 봐도 일베의 분노가 완전히 근거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일베의 메시지가 대중성과 지적 정합성 그리고 어쩌면 정치 경제 사회적 정당성마저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결과가 패배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유통되면서도 담론의 가치와 위상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일베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일베 특유의 혐오 코드 때문이었다. 가령 일베가 만들어내는 핵심 메시지가 A급이었다고 한다면, 그 표현 방식은 B나 C 심지어 D나 F급 수준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A급 메시지가 D급 이하의 외피를 뒤집어써야 했을까? 여기에 일베라는 사이트의 본질 그리고 호남 혐오 메시지가 갖는 비밀이 숨어 있다. 나아가 우리나라 우파의 치명적인 한계를 유추해낼 수 있다.

호남 문제를 천착하다 보면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나 오피니언리더 가운데 호남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발언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학문적 차원의 노력도 빈약하긴 하지만 정치 사회적 차원의 발언은 아예 전멸 수준이다. 이런 문제는 좌우 모두에 해당하지만 우파 진영에서 특히 심각하다.

우파 지식인이나 오피니언리더들은 호남 문제에 대해 전혀 의견이 없었던 것일까? 또는 호남 문제가 아예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일베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우파의 호남 발언은 오직 일베를 통해서만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 사회적 권위를 갖는 담론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호남 혐오가 우파 발언의 대표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파와 호남 모두의 비극이었다.

1987년 체제가 문제의 출발이었다. 과거에도 호남 혐오 현상은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는 어려운 주제였다. 1979년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소설가 오영수의 <특질고>처럼 예상치 못한 사고를 계기로 표면화될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 정보화 시대의 개막과 함께 PC통신 등 온라인 대화가 활성화됐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넷 시대의 개막. 잠재해있던 호남 혐오의 에너지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을 틈타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그 에너지의 대부분은 분노의 형태로 우파 진영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1987년 체제의 성립과 겹친다. 호남 혐오의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던 우파는 1987년 체제의 정치적 패배자였다. 정치적 패배자는 필연적으로 담론 생태계에서도 비주류의 위치에 처하게 된다.

분노의 에너지는 거대한데,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은 빈약하다. 마이너가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거대한 에너지와 빈약한 명분의 괴리. 이런 모순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풍자이다. 그 풍자가 극단으로 치달아 표면화된 것이 일베의 혐오 코드였다.

일베의 호남 혐오는 정치적 패배자로서의 우파가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우파 입장에서는 불가피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명분을 댄다고 해도 혐오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치의 중요한 존재 이유인 국민 통합의 관점에서 봤을 때 호남 혐오는 패배로 가는 경로일 수밖에 없었다.

일베의 호남 혐오 메시지는 출구 없는 선택이었다. ‘조부모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홍어(호남)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것들은 모조리 한 줄로 세워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야 한다’는 식의 메시지가 대표적이다. 일베에서는 비슷한 맥락의 메시지가 어마어마하게 생성되고 또 지지를 받곤 했다.

이런 메시지가 실현 가능한가? 최소한 공식적인 어젠다로 내세울 수라도 있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파의 정치투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셈이다. 정치투쟁의 어젠다로 내세울 수도 없는 주장을 거대한 우파 대중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하고 희희낙락 소비하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거대한 희극이자 처절한 비극이다.

우파는 정치적 패배 때문에 호남에 대한 분노를 키웠지만, 동시에 그 분노의 잘못된 표출로 인해 정치적 마이너의 위치가 더 악화됐다. 악순환의 심화이다.

호남 혐오는 우파 내부에 정치투쟁의 패배보다 더 심각한 고질병을 불러왔다. 진영 내부의 지적·도덕적 저열화가 그것이다. 대한민국 특정 지역의 배제와 혐오를 중심 코드로 하는 정치세력 내부에 건강한 정치 담론을 중심으로 한 정치 리더십이 형성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애초에 진영 내부 구성원들이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조차 가질 수 없다. 진영 내부에서 정치 메시지의 유통이 아닌 정치 이권의 거래가 일상화되며, 적극적인 대중들은 거물급 정치인의 가신이 되어 선출직 공직에 출마할 기회를 노리는 선거 자영업자로 전락한다.

우파 대중과 우파 정당이 좌파만큼 정치적 활력을 갖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의 결여이다. 공천 등 우파 정당의 의사결정 시스템 붕괴와 함께 호남 문제에 대한 정치적 대안 부재가 정당성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요소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혐오와 비판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호남은 반기업 반시장 반미반일 친북종중 정서가 강하다. 우파의 호남 혐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런 분위기에 원인이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결코 혐오로 해결될 수 없다. 혐오는 오히려 호남 특유의 피해의식만 자극해 내부 응집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호남의 앞선 정치의식이란 것도 이런 자기방어 기제의 외적 표현이다.

혐오하는 자는 결코 비판할 수 없고, 비판하는 자는 혐오할 수 없다. 정정당당하게 진정성을 갖고 호남의 문제를 비판해야 한다. 혐오와 비판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파 대중 정치학습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애초부터 호남 혐오 자체를 목적으로 우파 진영에 가담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본질은 인종주의자이다. 호남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또는 호남 출신 조상을 둔 것 등 호남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혐오의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이들은 호남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호남이 계속 좌파의 핵심으로 남아 혐오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개인적인 원한 해소 차원에서 호남 혐오를 부추기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우파 내부의 분리 대상이다. 우파 진영 내부에서 호남 혐오가 아닌 비판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자라날 때 비로소 이들의 분리가 가능해진다.

호남을 실컷 혐오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으니까 5.18묘역에 가서 무릎을 꿇고 호남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상처는 치유해야 하지만, 비판도 해야 한다. 지금 우파 정당이 호남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정권이 바뀌면 지금 호남에 와서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이 안면 바꿔 호남 공격에 앞장서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랜 세월 처절한 정치적 경험 속에서 단련된 호남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에 민감하다. 제대로 된 비판을 통해서만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우파의 상당수가 과거 일베에 호남 혐오성 글을 올리거나 퍼날랐을 것이다. 그들이 외적 상황의 변화에 맞춰 침묵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일베의 문제를 다시 되돌아보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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