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이뤄진 언어파괴와 언어오염을 바로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부박해진 세태의 흐름과는 별도로 한국에서는 쇄국적 언어정책에 따른 인위적 파괴도 자행돼 온 터라 회복이 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으면 이 나라는 망국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교육일선뿐 아니라 사회의 전 분야, 전 세대에 걸친 의식과 노력이 절실하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최근 교육방송(EBS)이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당신의 문해력〉에서 드러난 중·고등학생의 문해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고등학생들이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교사가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현실이 아주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고등학교 수업에서조차 학생들이 가제(假題), 평론(評論), 기득권(旣得權), 양분(養分), 차등(差等), 직인(職印), 위화감(違和感)과 같은 단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어를 모르니 영어 수업에서 'Babysitter'가 '보모'(保姆)라고 설명해 줘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변호사’(辯護士)란 단어는 들어봤지만 정작 ‘변호’(辯護)라는 말을 모른다고 한다. 모든 학교가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방송에 비친 현실은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사'(義士)와 병원의 '의사'(醫師)를 혼동한다는 내용의 우스꽝스러운 연출도 접한 적이 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사흘을 '4흘'로 혼동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학생들의 처참한 어휘 수준은 대학에 진학한다고 한들 나아질 게 있을까 싶다. 글을 다루는 기자들도 요즘은 국어 수준이 떨어져 매우 형편없는 실정이다. 전반적으로 언어 오염이 매우 심하다. 언제부터인가 손글씨, 손전화, 손피켓같은 단어도 심심치 않게 지면에 등장한다. 한글 순화도 좋지만 좀 괴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손글씨'라는 표현만 하더라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성해 인쇄한 것이 아닌, 필기구로 작성한 편지라는 의미겠지만, 굳이 이런 표현을 써야하는지 의문이다. '쓰다'라는 동사로 수식하면 될 일이다. '손피켓을 든다'는 표현도 이중(二重) 수식이다. 발로 드는 피켓도 있는가 생각하면 '손'이란 수식어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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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방송(EBS)이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당신의 문해력〉의 한 장면.(영상=EBS)

문제는 '한글 쇄국정책'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한자가 사라졌다. 한글 전용(專用)이 '국어 사랑'이란 것은 착각이다. '한자(漢字)는 중국 글자'라는 잘못된 인식에 바탕해 한자를 배척하는 풍조 탓에 한자어로 된 한국어 단어를 새로운 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데, 한국인의 사고체계가 급격히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청소년기에는 신문에 한자가 많이 사용됐다. 신문을 읽기 위해 억지로나마 한자를 익힌, 거의 마지막 세대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특정 용어나 표현을 강제로 고쳐 출력하는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한글과컴퓨터가 개발한 문서 편집프로그램 '한글'의 경우 사용자가 '일제시대'라는 표현을 입력하면 프로그램이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으로 자동 교정한다. 언어에서 일제 잔재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기존에 사용해 온 단어를 강제로 뜯어고치는 것이다. '국민학교'라는 단어도 지워졌다. 사용자가 '국민학교'를 입력하면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라는 표현으로 강제 교정된다. 어째서 유년시절에 멀쩡하게 사용한 단어를 억지로 지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개개인의 추억이나 취향마저 인위적으로 말살하려 드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한국어 어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자어들은 서구문화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수용해 내재화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화제한어(和制漢語)가 대부분이다. 일제 잔재를 없애자는 논리라면 당장 자동차(自動車).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민족(民族) 등, 거의 모든 단어의 대체어를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는 아예 불가능하다. 미국과 서구사회에서 최근에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른바 '캔슬컬처'(Cancel Culture)가 이 땅에서도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K-캔슬컬처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영국 일선 학교에서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조차도 지우려 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여성혐오'와 '인종주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한글은 맞춤법도 수시로 바뀐다. 물론 한글 학자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겠지만, 유년시절 배운 맞춤법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했읍니다' 표기법이 '했습니다'로 바뀐 경우가 그 대표 사례다. 외국어 표기법도 마찬가지다. 국립국어원이 한때 영화배우 'Leonardo DiCaprio'의 표기법을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로 정한 적도 있었다. 필자가 언론사 부장으로 근무할 때 기사를 출고하면 소위 '팩트체크팀'이란 부서에서 표기법을 고치라는 비슷한 권고를 여러차례 받은 바 있다, 국립국어원이 지정했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짜장면'이 왜 '자장면'이냐는 논쟁도 있었다. 원어민도 '짜장'이라고 발음하고 우리도 오랫동안 '짜장'이라고 불러온 것을, 어쩨서 국어학자들이 '자장'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도 아리송하다. 특히 중국어 표기법은 다 엉터리다. 예를 들어 쟝저민(江澤民)은 영어권에서도 'Jiang Zemin'이니 '쟝저민'이라는 표기가 합리적인데, 한글 표기는 일괄적으로 '장쩌민'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글로도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쟝저민'이라고 표기할 수 있음에도 복모음을 없앤 것은 음성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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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의 사망을 전한 1994년 7월10일자 신문지면. 조선일보(왼쪽)은 한자를 병용해 작성한 기사를 싣고 있으나, 한글 전용을 주창한 한겨레(오른쪽)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한국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들 역시 엉터리다. 예를 들면 홍콩의 국가안전법(國家安全法)의 경우 한국에서는 모든 매체들이 '국가보안법'으로 표기한다. 이는 매체뿐 아니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번역도 아닌 왜곡이다. 의도적인지 부지불식중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쯤 되면 집단지성도 아닌 집단무지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문해력 나아가 언어를 오염시키고 있는 요소로는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것을 저해하는 온갖 매체들의 저급한 언어 남발도 있다. 광고카피 수준도 아닌 말초신경에 호소해 틱장애를 일으킬 것만 같은 유튜버들의 썸네일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부들부들', '난리났다'. '큰일났다'. '발칵', '충격 단독', '꿀잼', '핵공감',' 허걱', 'ㅎㄷㄷ', 'X됐다' 같은 것들이 그 대표 사례라 하겠다.

오랜 세월 이뤄진 언어파괴와 언어오염을 바로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부박해진 세태의 흐름과는 별도로 한국에서는 쇄국적 언어정책에 따른 인위적 파괴도 자행돼 온 터라 회복이 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으면 이 나라는 망국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교육일선뿐 아니라 사회의 전 분야, 전 세대에 걸친 의식과 노력이 절실하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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