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하게 허용되던 체육계의 폭력...시대가 변했다, 이제는 끝내야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이재영(右), 이다영 자매. (사진=연합뉴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이재영(右), 이다영 자매. (사진=연합뉴스)

'나비효과'라는 이론이 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고 경미한 바람이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스타 여자 배구선수 흥국생명 이다영의 철없는 행동이 예상치 못하게 대한민국 체육계가 폭력에서 깨끗해질 수 있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쌍둥이 언니 이재영과 함께 대한민국 여자 배구 향후 10년을 이끌어갈 실력과 외모를 갖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다영은 최근 같은 팀 선배이자 '월드스타' 김연경과의 불화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다영은 인스타그램에 "나잇살 좀 쳐먹은 게 뭔 벼슬도 아니고 좀 어리다고 막대하면 돼? 안 돼" "곧 터지겠찌이잉. 곧 터질꼬야아얌. 내가 다아아아 터트릴꼬얌" 등의 글을 올렸고, 트위터에는 "괴롭히는 사람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죽고싶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다영은 지난 7일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져 한때 일부 네티즌들은 김연경을 향해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다영의 "곧 터지겠찌이잉"이라는 글이 자신의 과거 잘못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철없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지난 10일 이재영·이다영에게 학교 폭력(학폭)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폭로글을 올린 것이다. 피해자 A씨는 "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잊고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가해자가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 그때의 기억이 스치면서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내서 이렇게 글을 쓴다"고 했다. 또 "(이재영·이다영 자매가 A씨에게) 더럽다. 냄새난다며 옆에 오지 말라고 했으며 매일 본인들 마음에 안 들면 항상 욕하고 부모님을 '니네 X미, X비'라 칭하며 욕을 했다"며 "피해자만 탈의실 밖에 둔 채 들어오지 말라고 한 뒤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 스케치북에 피해자 욕과 가족 욕을 적어 당당하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이재영·이다영 자매는 A씨를 칼로 협박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영·이다영 자매는 곧바로 과거 학교 폭력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네티즌들의 분노와 함께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자매의 소속팀 흥국생명은 두 사람에게 무기한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고, 대한배구협회도 자매의 국가대표 자격을 무기한 박탈했다. 이후 남자 프로배구 OK금융그룹 소속 송명근·심경섭의 학폭 사실이 추가로 알려지며 프로야구 등 다른 종목에서까지 '학폭 미투'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소속 선수의 학폭을 폭로한 피해자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 가능성까지 암시한 상태다.

지난 2009년 이상열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에게 폭행당한 뒤 기자회견을 연 박철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2009년 이상열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에게 폭행당한 뒤 기자회견을 연 박철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학폭 뿐만이 아니다. 체육계에서 공공연하게 허용하고 있는 지도자들의 폭력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 남자 프로배구 KB손해보험의 이상열 감독이 자신이 12년 전 폭행했던 한국전력 박철우에게 사죄하고 잔여 경기 출장을 자진 포기하기로 했다. 이 감독은 지난 2009년 국가대표팀 코치로 재직할 때 대표팀이 주축이었던 박철우를 구타해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박철우는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구타로 상처 난 얼굴과 복부를 공개하고 뇌진탕과 이명 증상이 있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이 감독은 자격 정지 징계 처분을 받았지만, 2년 뒤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 운영위원으로 배구계에 복귀했고, 이후 대학 지도자와 해설위원을 거쳐 지난해 말 KB손해보험 사령탑에 올랐다.

이 감독은 지난 17일 배구계 학폭 논란에 대해 "난 (폭력) 경험자라 선수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어떤 일이든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감독의 말을 듣고 격분한 박철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글을 올렸다. 박철우는 18일 OK금융그룹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인터뷰를 자청해 "정말 반성하고 좋은 지도자가 되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도 다른 선수들에게 '박철우만 아니었으면 넌 맞았다'고 말한다는 얘기, 주먹으로 못 때리니 모자로 때린다는 얘기가 들렸다"고 이 감독을 비판했다. 박철우는 "아침에 (이상열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종일 손이 떨리더라. 그분이 감독이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너무 힘들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경기장에서 지나가다 마주칠 때마다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도 조용히 참고 지내고 싶었는데 기사를 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기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학교 문화 전반에 폭력이 짙게 깔려있었다. 힘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때리고 괴롭히는 일이 다반사였고, 선생님들 또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휘둘렀다. 당시에는 이같은 폭력들을 우리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일반 학생들조차 폭력에 쉽게 노출돼 있었는데, 운동 선수들은 얼마나 심했겠는가? 기자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농구부와 야구부가 있었다. 농구부, 야구부 감독은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수들의 뺨을 때리고, 야구배트로 엉덩이를 구타했다. 16~17년 전의 기억이지만 여전히 기자의 머릿 속에는 당시의 장면들이 선명히 남아있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힘센 자가 약한 자를 마음대로 때리고,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두들겨패는 시대는 끝났다. 이다영의 철없는 폭로로 뜻하지 않게 시작된 대한민국 체육계의 '학폭 미투'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폭력을 완전히 뿌리뽑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심민현 기자 smh418@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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