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코로나로 우울한데 심각한 영화 보기 싫어 고른 영화가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이라는 영화였다. 줄거리부터 찾아봤다. 내용을 미리 알면 무슨 재미냐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 보는 내내 딴 생각을 자주하느라 스토리를 놓치는 나는 그게 편하다. 검색해보니 이렇게 나온다.

‘입사 8년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들이 영어 토익반에 모인다.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가 될 수 있고 대리가 되면 커피 타기나 가짜 영수증 메꾸기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말단 여성 회사원들의 고군분투기라, 오! 마음에 들어. 대충 짐작으로 미국 영화 ‘히든 피겨스’ 와 비슷한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든 피겨스’는 능력은 출중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세 명의 여성이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는 신나고 통쾌한 영화다. 영화는 예상대로였다.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에서 배제된 또릿또릿한 세 명의 여성이 회사 내 차별의 벽을 뚫기 위해 영어 공부에 도전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영화 시작하고 딱 14분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내리 반反대기업 정서와 공장 폐수 무단 방류에 대한 내부 고발이 이어지더니 마지막에는 미국인 전문 경영자에게 “양키 고 홈”을 외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짜증, 불쾌, 허탈이 동시에 밀려왔다. 반미反美가 불쾌한 게 아니다. 야구 보러갔다니 핸드볼 게임 본 느낌이랄까 제목과 내용이 따로 놀고 어기에 반미를 억지로 짜 맞추는 치졸함에 짜증이 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무려 150만 명이 관람했다. 코로나로 극장이 흉가로 변한 2020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관객 수가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공이다. 감상문도 호평 일색이다. “너무 재밌다. 기대이상.”, “근래 본 영화 중 최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는 영화.”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되면 면 영화를 짜증으로 결산한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다들 예스를 외칠 때, 혼자 노!라고 말하는 건 광고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모두가 엄지를 세울 때 나 혼자만 가운데 손가락을 빼들었다면 내가 비정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증거다. 나만 쓰레기가 될 수 없어 관람객 리뷰를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 낸 동지 한 사람. “영화 제목이 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인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미국인은 나쁜 놈으로 묘사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감사합니다, 같이 삐딱해 주셔서. 소돔과 고모라도 의인 열 명이 없어 망하지 않았던가. 가까스로 정신승리는 했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흔히 우리나라 문화계가 좌파 일색에다 그 중 제일 심각한 게 영화계라고 한다. 반만 맞는 얘기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좌파여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좌편향 영화를 만드는 거다. 아직도 기업을 범죄 집단으로 보고 미국을 적대적 외세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삼진그룹 영화 토익반’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에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물론 문화의 본질은 ‘갈아엎는’ 것이며 특히 영화는 약한 것이 강한 것과 맞서 싸우는 게 이야기의 기본 틀이다. 가령 학도병 이야기 ‘포화 속으로’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우익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약자인 학도병이 강자인 인민군 정규 부대와 싸우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국제시장’도 마찬가지다. 덕수라는 평범한 인물이 무지막지한 시대 상황과 맞서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지 우파적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를 다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디테일에 어떤 것을 넣을지는 영화 제작자와 관객의 몫이다. 여기서도 순위를 정하라면 당연히 관객이다. 영화 제작자는 관객이 좋아하는 내용을 다음 번 영화에 반영하고 기피하는 이야기나 스타일을 다음 영화에서 삭제한다. 관객이 있고 영화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자본에는 이념이 없고 오로지 이익뿐이기 때문이다. 해서 문화계 좌파 편향을 탓하기 전에 그걸 소비하는 국민 성향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평소 하던 대로 영화를 보면서 딴 생각을 많이 했다. 혹시 제목을 ‘삼진그룹 중국어 능력 시험반’으로 하고 회사를 불법 매각하려는 전문 경영자를 중국인으로 그렸어도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도 먹히는 순서는 압도적으로 반일이 1등이고 반미가 2등이라는 사실이다. 반중 정서도 제법 확산된 것 같기는 한데 중국 눈치를 봐야하는 동북아 한류는 아직 그럴 용기를 못 내는 것 같다. 영화 제목이 내용과 아주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영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미국인 전문 경영자에게 여직원들이 당신은 졌고 우리가 이겼다라고 또박또박 초등발음 영어로 말한다. 그 장면은 눈물겹도록 짜증난다. 오래 전에 봤던 북한 영상이 떠올랐다. 북한 초등학생들이 영어 스피치 대회를 하는 내용이었는데 선생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미를 제대로 하려면 미국을 잘 알아야 하고 미국을 잘 알려면 먼저 영어를 잘 알아야 해요.” 설마 이런 애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지?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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