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대한민국은 같은 종족이지 같은 민족 아니다
북한은 국민국가도 근대국가도 아냐
남과 북의 대립은 유예상태...어떤 형태로건 결말 볼 수밖에
전체 한반도가 어떤 체제로 통일될 것인가가 문제인데 대한민국 좌파는?
북한으로부터의 도전 극복하고 근대화의 완성으로 나아갈 과제 남았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미국 흑백영화 초창기의 명작으로 <Birth of Nation>이라는 작품이 있다. 남북전쟁과 이후 연방 재건 시대에 미국 북부와 남부의 두 명문가 사람들이 겪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작품이다.

노예해방과 링컨 대통령의 암살 등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면서 백인의 관점에서 흑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등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갖는 의미는 결코 만만치 않다. 영화의 배경이자 테마인 남북전쟁이 미국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어마어마한 유혈을 동반한 비극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그 국민이 만들어진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의 그런 역사적 의미가 ‘Birth of Nation’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저 제목을 ‘국민의 탄생’ 또는 ‘국가의 탄생’으로 번역하는 경우는 있어도, ‘민족의 탄생’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네이션(nation)을 ‘민족’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분위기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서구세계에서 원래 형성된 네이션의 개념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민족’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다. 좀 과장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네이션 원래의 함의와 완전히 정반대의 맥락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전체 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고 가장 많이 오해되고 가장 많이 악용된 단어를 딱 하나만 꼽는다면 그건 아마 ‘민족’이 될 것이다. 이런 오해와 악용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민족 아니 네이션은 근대와 진보라는,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 쟁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됐다. 프랑스가 현재와 같은 영토를 갖추게 된 것은 백년전쟁의 결과였고, 그 이전에는 심지어 남부와 북부의 언어가 달라 상호 의사소통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프랑스 민중들 역시 하나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프랑스가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프랑스 혁명이었다. 즉 △국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통일된 헌정질서 △헌정질서가 배타적 주권으로 관철되는 고정된 영토와 국경선 △국민의 동질감을 형성해주는 언어의 통일성 등이 이 시기에 형성됐던 것이다. 이런 특징을 가진 국가를 국민국가라고 부르며, 근대화는 이런 국민국가의 질서 위에서 가능해진다.

nation이 ‘전국’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단일한 헌정질서가 고정된 영토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배타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근대국가의 특성이고 그런 점에서 네이션은 근대국가의 국민이자 동시에 그 작동 범위를 나타내는 지리적 영역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 혁명의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립된 근대 국민국가에 대해 프랑스 민중들의 소속감과 충성심 즉 애국심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은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법 앞의 평등, 사유재산 등의 가치를 내세워 근·현대 시민법의 시작을 알리고 대륙법의 기초가 됐던 나폴레옹 법전은 이런 국민적 에너지를 동원하고 조직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이 나중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유럽 각국의 자결권을 무시하면서 빛이 바랬지만, 나폴레옹이 한때 유럽 민중에게 자유와 인권 등 근대화 혁명의 기수로 열렬하게 환영받았던 것도 프랑스 혁명이 지닌 이런 진보적 성격 때문이었다. 민족과 근대국가의 성립 그리고 진보는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적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네이션은 혈연이나 전통, 문화 등 선험적인 요소보다는 민중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참여하는 계약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네이션의 본질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고 규정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민중들은 계약 공동체를 통해서만 신분제의 폐지, 사유재산의 보호, 법치주의, 삼권분립, 시장경제와 기업활동의 자유, 인권, 공화정 등의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계약 공동체의 본질은 사회계약 즉 다양한 계급이 공화주의 질서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근대화와 진보라는 가치의 핵심 내용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네이션의 번역어로 통용되는 ‘민족’이라는 단어는 겨레, 동포 등 인종 그룹(ethnic group)의 함의가 강하다. 인종 그룹은 개인들의 선택이나 계약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구성원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의 소유물로 삼는다. 일종의 강제이며, 구성원들은 그걸 거부할 권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원래의 의미와 정반대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계약의 공동체인 네이션이 번역을 거치면서 엉뚱하게 계약의 정신을 거부하는 ‘민족’이라는 어휘로 탈바꿈하는 아이러니다.

이런 특징은 한반도에 성립된 다른 체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에서 극대화된다. 북한 체제에서 계약 즉 민중의 선택권은 전면적으로 거부되고, 수령의 의지가 민중의 선택권을 대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국민국가가 아니며, 근대국가도 아니다. 전근대적 전제왕조가 외형만 바꾸어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북한 체제의 현실은 과거 전제왕정보다 더 끔찍하다.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제왕정을 유지하던 시대보다 현재의 전제왕정 체제가 전세계 질서에서 드러내는 상대적 낙후성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은 같은 종족 또는 겨레나 동포일 수는 있어도 같은 네이션은 아니다. 서로 완전히 상반된 헌정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어휘는 이런 개념의 혼란을 덮어주고 위장해주는 데 악용되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프로파간다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북한정권의 정치적 요구에 기여하는 현상이다. 남과 북 두 체제의 적대적 본질을 희석하고, 북한 체제의 본질을 바라보는 남한 내부의 냉철한 시각을 혼란시키며, 결국은 전체 한반도 민중들의 정치적 선택의 정당성이 북한 정권에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근대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수용 여부 그리고 구체적인 적용 방안을 둘러싼 각축전이었다. 구한말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근대화의 수용 여부를 놓고 대립한 경우이다. 개화파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지만 정치적·역사적으로는 승자가 됐다. 20세기 들어 조선왕조로 돌아가자는 복벽 움직임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 그 승리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하지만, 어떤 근대화이어야 하는가 즉 근대화의 방향과 성격을 둘러싼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갈등이 전면화한 것이 바로 남과 북의 분단이었다. 남쪽에서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서구 해양문명형 근대화라는 방향으로 집결했고 그 결과가 대한민국 체제의 성립이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계획경제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한 대륙형 근대화라는 노선이 관철됐다. 한반도 내부의 이런 갈등 요인에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대립구도가 결합하면서 열전(hot war)으로 폭발한 것이 6.25이다.

6.25는 막 걸음마를 뗀 대한민국 체제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건국전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전쟁 직전에 시행된 농지개혁의 성과를 통해 전근대적 소작농들이 대거 근대적 자영농으로 전환하고 대지주 계급이 사실상 소멸되는,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국의 건국과정에서 노예해방이라는 과제가 유예되었다가 거의 1세기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남북전쟁을 통해 흑인들도 미국 국민으로 거듭나는 국민의 탄생(Birth of Nation)이 이루어진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근대화는 특권계급 지배의 대상에 불과했던 민중이 계약의 정신 위에서 당당한 법적 권리를 갖춘 국민 즉 네이션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점을 미국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현재 남과 북의 대립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이다. 유예된 대립은 어떤 형태로건 결말을 볼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이 각각 추진한 근대화 가운데 어느 방향이 옳았는가를 최종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즉 체제경쟁이다. 이는 근대화의 성과 즉 남과 북이 거둔 진보의 열매를 비교하는 경쟁이기도 하다.

경제와 외교, 인권 등 객관적인 지표로 봤을 때 대한민국 체제가 북한의 그것을 압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투쟁의 영역으로 가면 판단이 쉽지 않다. 특히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고, 문재인 정권이 총체적인 국정 파탄과 함께 노골적으로 대북 무장해제로 치닫는 실정에서는 대한민국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체제 경쟁의 최종 귀결은 결국 남과 북 즉 전체 한반도가 어떤 체제로 통일될 것인가의 문제로 현실화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왜 굳이 통일을 해야 하느냐? 그냥 지금처럼 소 닭 보듯이 따로 사는 게 낫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의 일면만 보는 오류이다.

물론 공통의 언어와 문화,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는 인종그룹이 꼭 하나의 국민국가를 형성할 필요는 없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 언어와 인종적, 문화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국가로 독립했으며, 이런 질서가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우가 다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각각 별도의 국민국가로 현상 유지가 가능하지만, 한반도는 그게 불가능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국민주권 중심의 헌정질서, 시장경제 등의 체제 질서를 공유하기 때문에 각각의 체제에 위협이 아니다. 서로 협력도 가능하다. 두 나라의 분리 상태에 개입하고 악용하는 외세의 작용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북한은 상호 용인 불가능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북한 체제의 유지가 불가능하다. 중공은 분단에 개입, 북한 체제의 이런 본질을 강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북의 본질은 남한에게도 북한의 적대적 해소라는 선택을 강요한다. 남과 북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지 않으면 해결 불가능한 갈등 구조인 것이다. 즉, 남과 북은 소가 닭 보듯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갈등은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를 중심으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반일감정에도 내재하고 있다. ‘반일 정신병’이라 부르는 게 적실할 정도로 비이성적인 반일 행태의 가장 근저에는 ‘한반도 민중의 정치적 선택의 정당성은 북한 정권에 있다’는 메시지가 자리잡고 있다.

북한은 네이션이 주인 되는 국민국가가 아닌, 종족주의적 민족 개념을 내세워 수령이 지배하는 전제왕조이다. 이 체제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일본을 통해 한반도에 도입된 근대화의 핵심 가치들을 부인해야 한다. 반일을 징검다리로 하여 반미를 지향하며 궁극적으로 서양문명의 성과인 근대화를 무너뜨리는 게 이들의 최종 목표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이런 도전을 극복하고, 근대화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제를 안고 있다. 통일은 그 최종 목표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이다. 이런 점에서 종족주의적 함의를 본질로 하는 민족국가의 개념 왜곡을 바로잡고, 진정한 계약 공동체 즉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국민국가는 20세기형 계약 공동체이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그 탄탄한 기초 위에서 21세기형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근대화의 완성과 함께 그 극복과 미래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민족과 근대화, 진보의 문제를 다시 한번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동식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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