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하에서 국적에 관계없이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귀족들이 지배하던 18세기와 외관상 크게 달라진 것이 없던 시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시작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은 유럽인들 사이에 국가안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견 대립을 가져왔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군사적 위협뿐 아니라 사회적 소요에도 각국이 공동으로 대응하여 유럽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영국의 캐슬레이는 자국의 안보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경우에 한하여 유럽 대륙의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어떤 위협에도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린 시절 스위스인 가정교사로부터 받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과 전제군주국 러시아 차르의 역할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814년 9월 1일부터 1815년 6월 9일까지 개최된 빈 회의에서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의 의사를 다른 국가 대표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빈 회의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빈 회의에서 보여 준 메테르니히의 수완은 1813년에 오스트리아를 나폴레옹과 혼인으로 맺어진 프랑스의 동맹국에서 반프랑스 동맹국의 지도국으로 돌려 놓았던 것에 못지 않게 절묘했다.

[지도2 - 1795년 유럽]
[지도3 - 1789년 유럽]
[지도3 - 1789년 유럽]

빈 회의에서 채택된 정통성의 원칙에 의하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유럽은 [지도 3 - 1789년 유럽]으로 복귀해야 하지만 폴란드는 나폴레옹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었기에 지도상에서 소멸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폴란드 전역이 러시아군에 의하여 점령된 상태였기에 [지도 2 - 1795년 유럽]의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된 상태로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이탈리아 등 다른 지역에서 폴란드에서 잃은 영토만큼 보상받기를 원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혈연 관계로 맺어진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들에 오스트리아 황제의 친척들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쉽게 해결 가능했으나 프로이센의 경우 폴란드 대신 나폴레옹의 동맹국이었던 작센 공국 (지도 SAXONY)를 차지하려 하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나폴레옹의 동맹국이었던 (과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로 이루어진) 바르샤바 공국을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폴란드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입헌 폴란드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외상 캐슬레이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독립된 폴란드를 환영하겠지만 결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면서 유럽의 정세가 혼란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로이센의 재상 하르덴베르크가 폴란드의 대부분을 러시아에게 양보하는 대신 작센 공국을 합병하려 하자 프랑스 대표 탈레이랑은 프로이센에 의하여 독일이 통일될 가능성을 우려함과 동시에 자신이 빈 회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 본국에 알려질 가능성 때문에 착잡한 심정이었다.

영국의 캐슬레이는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을 위하여 프로이센의 하르덴베르크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에게 양국이 러시아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의사 타진을 해 왔다. 그는 과거 폴란드 영토에 대한 몇 가지 구상을 내놓으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1795년에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던 상태로의 복귀를 선택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하여 군사적 열세에 놓인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가 1795년에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의 회복에 협조하는 대신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의 작센 합병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하여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수복 노력이 성공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작센 병합에 동의한다"라고 답하면서 협력을 약속한다. 폴란드 분할 시 오스트리아는 과거 폴란드가 오스만 투르크의 빈 공격을 막아주었던 적이 있었기에 다소 소극적이었고 합병했던 영토의 면적도 크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이 작센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과거의 프로이센령 폴란드를 러시아에게 양도받는 것이 오스트리아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탈레이랑과 캐슬레이를 이용하여 어떤 경우에도 프로이센의 작센 병합을 막아낼 수 있도록 설계한다.

만약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과거 분할 점령했던 폴란드 지역을 다시 수복한다면 자신의 존재감을 새로운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에게 보여주어야 할 입장인 탈레이랑이 프로이센의 작센 병합 반대의 선봉에 나설 것이고 이에 독일 내의 여러 국가들이 가세할 것이며 러시아의 차르는 이를 즐거워 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러시아의 군사력에 압도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지역을 수복하지 못 할 경우 영국의 캐슬레이가 '오스트리아는 작센 문제를 양보하는 등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는데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끝없이 영토 문제로 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면서 개입할 것이 분명했다. 이 경우 탈레이랑은 캐슬레이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상대적 약체인 프로이센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프랑스 본국에 드러내려 할 것이었다.

폴란드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드디어 메테르니히가 전면에 등장하여 프로이센이 과거 프로이센령 폴란드의 일부와 작센 공국의 북쪽 저개발 지역을 획득할 수 있도록 중재한다. 여기에 더하여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프랑스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영국 본토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의 캐슬레이를 움직여 프랑스에 접하고 있는 라인강 유역을 프로이센이 병합하도록 한다.

프로이센은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국 영토가 재편되는 것에 반발하였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이미 사이가 멀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메테르니히의 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프로이센의 영토 (지도 K of Prussia)는 메테르니히의 견해에 따라 [지도 4 - 1815년 유럽]과 같이 결정되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결과였다.

[지도4 - 1815년 유럽]

이처럼 메테르니히는 유럽 대륙을 자신의 구상에 따라 재편하면서 향후 100년 동안 지속될 세력 균형에 입각한 평화 체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캐슬레이는 유럽 대륙의 패자가 나올 수 없도록 메테르니히의 구상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영국이 전세계의 바다를 독점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시기를 대표하는 보수주의 정치가들 중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1729년 - 1797년)는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는 반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무슨 이유로 평생에 걸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의 타도 대상으로 여겨졌고 후대에는 19세기 유럽 반혁명 세력의 대표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키신저의 견해에 의하면 버크로 대표되는 역사적 보수주의는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계약을 경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메테르니히로 대표되는 합리적 보수주의는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사회적 생활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칙인 이성에 어긋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혁신주의자들은 역사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느끼는 반면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여기면서 강력히 반발하게 된다.

실제로 메테르니히는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우주의 속성인 조화와 균형에 의한 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은 어리석은 자들이 잘 걸리는 정신병에 불과하고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입각한 진리이며 자신은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유럽의 의사일 뿐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급진 세력에 유화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역사적 보수주의자를 강성 보수 또는 극우 세력으로 부르는 것은 해외 학술용어를 정반대 의미로 해석한 수많은 사례들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시대를 지배했던 메테르니히가 19세기 수구반동 세력의 대표자로 맹비난을 받고 있는 반면 그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키신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로 칭송되고 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가 수립한 유럽의 세력 균형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반면 키신저가 입안한 세계질서는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인하여 불과 20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못 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즉 <회복된 세계>의 저자 키신저가 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의 업적을 연구하면서 습득한 외교술을 활용하여 수립했던 세력 균형의 원리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는 19세기의 영국보다 훨씬 강력했던 20세기의 미국이 소련 등 경쟁국가들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불과 20년 만에 역사책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