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 Kissinger 회복된 세계 (A World Restored) (中) [유태선 시민기자]
Henry Kissinger 회복된 세계 (A World Restored) (中) [유태선 시민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영국, 러시아 등 몇 나라를 제외한 전 유럽을 지배하던 프랑스의 패권이 흔들리는 시점에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가 어떻게 오스트리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에서 반프랑스 동맹의 중심으로 전환시켰는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도 1]

[지도 1 - 1812년 유럽]
[지도 1 - 1812년 유럽]

1810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장녀 마리 루이즈의 결혼 이후 두 나라는 명목상 동맹국이었고 오스트리아도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었으나 나폴레옹의 열세를 간파한 메테르니히는 몇 단계에 걸친 외교 술책을 통하여 오스트리아를 반프랑스 동맹의 핵심으로 돌려 놓는다.

우선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장인 프란츠 1세를 겁이 많은 비겁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점을 이용하여 "프랑스 파리로 진격하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프라하 부근에 10만명의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며 오스트리아군의 재무장에 대한 프랑스의 승인을 받는다.

여기에 더하여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군이 러시아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점을 지적하면서 나폴레옹의 의사와 무관하게 오스트리아 황제는 사위를 위하여 유럽의 평화를 위한 중재에 나설 것이라고 통보한다.

러시아군이 패주하는 나폴레옹을 추격하면서 폴란드에 진입하자 프랑스군의 보급을 도우면서 러시아 원정에 참여했던 프로이센은 겁에 질려 오스트리아에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의 국내 여론이 프랑스에 맞서 싸우자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프로이센 측에 러시아군에 맞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나폴레옹의 승인을 받아 군대를 재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에게 중부 유럽의 오스트리아만이 유럽 대륙의 강대국인 프랑스와 러시아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국들 사이를 중재하여 유럽의 평화를 확보하겠다고 설득한다.

다음 단계로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에 사절을 파견하여 오스트리아의 중재에 대하여 동의를 받고자 하는데 프로이센이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하여 반프랑스 동맹을 체결한 이후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조정한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 사절이 프랑스와의 협상을 위한 제안을 받으러 왔다고 이야기하자 오스트리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중재를 맡긴다.

한편, 영국의 외상 캐슬레이는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요청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영국의 거부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당시 캐슬레이는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과 대륙을 지배하는 러시아가 협력하여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거쳐 프로이센으로 진군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자국 영토 내에 진입하지 못 하게 하는데 주력한다.

나폴레옹이 장인이 보유한 오스트리아군 20만명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외상 자격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중재에 나서는데 외견상 프랑스에게 관대하지만 나폴레옹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자연스럽게 프랑스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간의 상호불신을 증폭시킨다.

면밀한 관찰 끝에 프랑스의 패배를 확신하게 된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을 방문하여 자신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럽의 평화를 위하여 오스트리아도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하자 프랑스 황제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 하고 모자를 집어 던지는 등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1813년 8월 12일 메테르니히가 예고한 대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반프랑스 동맹에 합류하고 같은 해 10월 반프랑스 동맹군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격파한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의 세력 팽창을 우려하면서 다시 한번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의 담판을 시도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열세를 인정하면서 평화 조약을 맺는다면 프랑스 국내에서 끊임 없는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강화 조약을 거부한다.

만약 이 단계에서 양측간의 화의가 성립되었더라면 프랑스에서 루이 16세가 폐위되고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기 이전이었던 1795년 - 폴란드가 멸망한 연도 - 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유럽 열강들이 강화 조약을 맺으면서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트 왕조가 프랑스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지도 2]

[지도 2 - 1795년 유럽]
[지도 2 - 1795년 유럽]

1814년 영국의 외상 캐슬레이는 반프랑스 동맹국 사령부가 설치된 프랑스의 랑그르에서 알렉산드르 1세와 메테르니히를 직접 만나게 되는데 "유럽의 평화를 위하여 영국은 대외 팽창을 추구하는 러시아가 아니라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오스트리아와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하자 1814년 4월 4일 나폴레옹은 스스로 퇴위한 후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보호 하에 보나파르트 가문의 프랑스 지배를 유지해 나가려 한다.

하지만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4대 승전국은 1795년의 국경선으로 복귀하되 나폴레옹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을 새로운 프랑스 국왕 루이 18세로 즉위시키면서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킨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기분을 맞추어 줄 목적으로 프로이센을 설득하여 연합군의 파리 입성을 러시아군 단독으로 행하도록 하여 프랑스인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전 외상 탈레이랑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향후 러시아와의 대립에 대비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

나폴레옹을 이탈리아의 엘바섬으로 유배보낸 상태에서 전후 유럽을 논의하기 위하여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오스트리아 빈에 모였으나 영토 문제로 극심한 대립을 보이면서 회의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의 캐슬레이는 유럽의 세력 균형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의 폴란드 영토를 둘러싼 분쟁 해결에 달려있다는 점을 깨달았고 폴란드 문제를 둘러싼 분쟁을 지켜보면서 러시아의 끊임없는 팽창 야욕을 알아차렸기에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협력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지만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영국의 웰링턴 공작과 프로이센의 폰 블뤼허 원수의 군대에게 패배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영국령인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폐되어 그 곳에서 사망한다.

이제 빈 회의 참가국들은 1795년이 아닌 1789년의 유럽 지도를 기준으로 하되 폴란드는 소멸시키기로 하면서 승전국들의 영토 획득을 위한 세부적 협의를 마무리한다. [지도 3]

[지도 3 - 1789년 유럽]

전세계의 바다를 장악한 영국은 전쟁 기간 중 점령했던 몰타, 남아프리카, 스리랑카를 그대로 보유하기로 한다.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는 과거 폴란드 분할 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로 한다. 스웨덴의 영토였던 핀란드도 러시아에게 양도되는데 스웨덴은 그 대가로 나폴레옹의 동맹국, 덴마크의 영토였던 노르웨이를 받는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에 병합된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 플랑드르를 네덜란드에 합병시키고 프랑스에 인접한 라인강 유역과 작센 공국의 일부를 프로이센에게 양도하기로 한다. 이는 영국에게 해외 식민지의 상당 부분을 할양했던 네덜란드 및 러시아에게 폴란드를 양보해야 했던 프로이센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플랑드르를 네덜란드에 양도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등을 양도받고 토스카나와 모데나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구성원을 국왕으로 즉위시킨다.

결국, 유럽의 국경선은 1789년의 유럽 지도를 주요 승전국의 이해관계에 맞게 개편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독일 및 이탈리아 진출을 강대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우선적으로 저지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그려진다. [지도 4]

[지도 4 - 1815년 유럽]

이후 메테르니히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의 분열을 우려하여 유럽의 국경을 현상유지하는데 그의 모든 외교역량을 기울인다. 캐슬레이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여론에 맞서 암묵적으로 메테르니히를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유럽 대륙으로의 진출을 저지하려 한다.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캐슬레이와 가능한 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가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연대 가능성을 우려하는 점을 이용하여 차르에 대항할 수 있었으나 캐슬레이의 사망 이후 영국이 유럽 대륙의 문제에는 가능한 한 개입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전환하자 오스트리아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국의 사회적 불안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간의 신성동맹 하에서 메테르니히는 러시아 차르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여전히 유럽의 외교가를 자신의 주도 하에 이끌어 나간다.

결국 1848년 3월 혁명에 의하여 빈 체제가 붕괴되면서 메테르니히는 실각하지만 그의 주도 하에 1815년 빈 회의에서 형성된 유럽 5대 강대국에 의한 세력 균형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00년간 그 틀을 유지한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