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노예와 가난의 길’로 기어이 들어서겠다는 개헌안 경제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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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4.01 15:57:53
  • 최종수정 2018.04.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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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장관도 아닌 정무수석에게 개헌안을 3회에 나눠 설명하게 하는 이상한 나라
국가개입주의 길을 열어놓은 모순된 문재인정부 경제철학
자유시장경제 원칙 무너뜨리는 개헌안 경제조항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토지공개념과 경제민주화
동일가치 동일임금?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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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무장관도 아닌 정무수석에게 개헌안을 3회에 나눠 설명하게 하는 이상한 나라

헌법은 국가운영의 기본질서를 규정한 최고의 규범이다. 국가의 최고 규범인 헌법을 바꾸는 데 있어 내용은 차치하고 그 절차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고 있다. 개헌 발의는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또는 대통령이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에 개헌 발의 조건으로서의 국회 과반수 동의는 일종의 자명논리(自明論理)이다. 하지만 대통령 발의는 헌법 제 89조 3항에 따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국무회의 심의를 받으라는 것은 “선출직인 국회의원들로부터 인사 청문 절차를 밟은 국무위원과 논의하라”는 것으로, 숨은 취지는 대통령이 발의하는 경우 국민 대표의 ‘간접적 심의’를 받으라는 것이다.

대통령 헌법 개헌안이 3월 26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식 발의됐다. 청와대가 발의 날짜를 26일로 못 박은 상태에서 ‘같은 날’ 국무회의에 상정한 것은 헌법이 정한 ‘심의 절차’를 건너뛴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심의에 소요된 시간은 채 50분이 안됐으며 반대토론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노골적인 '국무회의 패싱'이다.

대통령 발의는 정부부처가 주축이 되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각부 장관은 철두철미하게 배제됐다. 개헌안을 공개할 때도 법무부장관이 아닌 업무 분장과 무관한 ‘정무수석’이 개헌안을 설명했다. 사전에 마련된 개헌안을 3회에 쪼개 공개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개헌안에 대해 청문회 한번 열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헌법 개정안을 ‘개헌특별자문위원회’에서 마련한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부의 공식 기구도 아닌 ‘개헌자문위’에 자문형식을 빌어 개정헌법의 골격을 제시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았지, 대통령이 지명한 위원을 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 대의기구가 아닌 ‘임의위원회’에 헌법 개정 초안을 만들게 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임의 위원회는 해산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프랑스 헌법 제 3조 1항은 “국가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가주권을 행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2항은 “국민의 일부나 특정 개인이 주권의 행사를 특수하게 부여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 기준에 따르면, 개헌특별자문위윈회는 그 자체가 위헌이다. 국민은 국가공식기구가 아닌 임시 기구인 ‘자문위’에 헌법개정안을 짜라고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개헌 절차와 준비 주체에 대해 위헌 소송이 제기되면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위헌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 국가개입주의 길을 열어놓은 모순된 문재인정부 경제철학

모든 정책의 출발점은 경제철학이다. 개헌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철학은 “경제적 기회는 사전적으로 ‘균등’해야 하며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결과는 ‘정의’로 와야 한다”로 요약된다. 이는 치타 허리에 코끼리 다리를 붙여놓은 격으로 작동가능하지 않다. 경제적 기회가 사전적으로 균등하게 주어지고 과정이 공정하다면 결과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소득이 물리적으로 같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순환과정에서 ‘균등, 공정, 정의’는 공존할 수 없다. 공존한다면 시스템적으로 ‘과다식별’(over identification)된 것이다. 예컨대 2개의 미지수(변수)가 3개의 독립된 방정식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정의는 ‘결과적 평등’이다. 결과적 평등을 위해서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개입주의는 ‘국가는 선하고 전지하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를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국가가 박애주의의 실천자가 된다면 모두들 입법을 통해 특혜를 받으려 할 것이다. 일찍이 바스티아가 설파했듯이 여론과 정치의 도움으로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려는 ‘합법적 약탈’이 자행될 수 있다.

국가개입주의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선(善)을 지향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존하는 인간 밖에 초월적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도 이런저런 이해관계의 이끌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의 이익은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수반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이 남용돼서는 안 된다. ‘정의’(justice)가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의’가 “우리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사회적 정의’는 “어떤 사람은 추가 부담을 져야하고 다른 사람은 사회적 특혜를 누려야 한다”는 변용(變容)된 주장이다. 결과적 평등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기업인, 납세자, 시민을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투표’는 종종 사회적 합의의 수단이 된다. 상업세계에서 이윤기회는 경쟁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정치세계에서 정치적 약탈로부터의 이윤기회는 상존한다. 수혜자들로부터 얻는 정치적지지(support)가 더 크면 정치인은 입법 등을 통해 ‘정치소득’을 추구하게 된다. 재분배 정책을 통해 특정계층으로 자원을 이동시킬 대안을 지지할 과반수 연합을 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 환경에서는 경제적 효율이 아니라 정치적 지지가 성공을 가름하는 기준이다. 포퓰리즘은 ‘사회적 합의’라는 외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하이에크가 설파했듯이 인간은 ‘구조적으로 무지’(inevitable ignorance)하다. 전지(全知)하지 않은 국가가 세상을 휘저으면 그 사회는 필히 ‘가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길은 ‘노예의 길’이기도 하다.

▲ 자유시장경제 원칙 무너뜨리는 개헌안 경제조항

개헌에는 내재적 금선(禁線)이 존재한다. 개헌은 할 수 있지만 국가체제의 본질적인 부분은 고칠 수 없다. 개헌세력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뺐다가 착오라면서 원상회복한 적이 있다. 실수로 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빼고 반응을 살펴본 것이 아닌 가 짐작된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듯이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개헌을 할 수 없다.

헌법개정안은 경제조항에 정리해고를 막는 파업권을 보장하겠단다. 현행 헌법 33조 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목적으로만 인정한다. 현행 헌법대로 하면 임금 인상을 위한 단체행동권은 합법이지만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단체행동은 불법이다.

현행 헌법에 의거 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 노조의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불법으로 판결했다. 따라서 사용자의 해고 조치를 뒤집으려면 개별 민사소송을 통해 해결해야 했다. 그만큼 근로자 복직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해고는 ‘근로조건’이전에 근로자의 ‘권익’에 속하는 만큼 단체행동권 행사 범위에 ‘권익 보호’ 차원에서 정리해고 반대 파업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가 가라앉기 전에 배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정리해고’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다’는 기본원칙 하에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엄격히 규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해고회피 노력”을 조건으로 걸어 고용을 최대한 보호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할 진대, 그것도 모자라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조 파업을 헌법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은 “노동계에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하는” 조치이다.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헌법에서 인정하면 어떤 구조조정도 불가능해진다. 이는 ‘적기 구조조정에 의한 경영정상화’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실적 개선 또는 기사회생(turn around)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해고파업이 인정되면 주주의 이익은 말살된다. 그러면 누구도 기업을 설립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창업의 자유가 질식되고 직업선택의 자유가 유린된다.

▲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토지공개념과 경제민주화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2개의 기둥은 ‘사유재산제도와 계약의 자유’이다. 만약 토지공개념과 경제민주화가 깊숙이 들어오면 시장경제질서는 붕괴된다. 경제민주화를 현행 헌법 119조 2항애서 규정한 것 그 이상으로 강화하게 되면 “대한민국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헌법 119조 1항과 충돌한다. 현행 119조 2항으로도 충분한 필요한 규율과 규제를 가할 수 있다.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장한 청와대 설명은 이렇다. “한정된 자원인 토지 투기로 말미암은 사회적 불평등 심화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도록, 토지 공개념을 헌법에 분명히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한정되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선택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희소성은 경제활동의 전제인 것이다. 토지가 희소하기 때문에 당국에 의해 규제돼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렇다면 모든 경제선택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토지공개념이 시공을 초월하는 지향해야 할 가치라면 많은 나라들이 명시적으로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지공개념이 헌법에 들어간 사례는 사회주의 국가를 빼고 전 세계적으로 한 군데도 없다. 과거 6공화국 시절에 헌법재판소는 토지공개념에 기반 한 '택지 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과 '토지 초과 이득세법' 등에 대해 각각 위헌과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린 바 있다.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아 부동산 투기가 일어났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부동산가격 상승은 토지공개념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중국에 이는 ‘부동산 광풍’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 가. ‘중국식 사회주의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토지공개념의 헌법 명시는 오해만 살 뿐이다. 현행 헌법에서도 토지 공개념을 유추할 수 있는 조항이 얼마든지 있다. 헌법 122조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 23조 2항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조세정책 등으로 부동산 시장을 규율할 수 있다.

▲ 동일가치 동일임금

개헌안에 따르면, “국가가 동일가치 노동에 동일수준 임금을 지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담겠다는 것이다. 현재 ‘동일가치 노동의 동일 임금’은 남녀고용평등법(제8조 1항)에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동일가치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가치 동일임금” 원칙은 동일가치 노동으로 판명되었을 때 동일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조건 절이 붙은 명제’이다. 시장테스트를 통해서만 동질성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오리지널 가수(조용필)와 모창가수(주용필)의 출연료를 차등하는 것도 시장이다. 임금은 사적자치로서의 근로계약의 결과이다. 시장 이외 누구도 임금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국가가 개입해 조용필과 주용필을 같이 취급하라 말라 말할 권리는 없다. 개별 법률도 아닌 헌법에 ‘동일가치 동일임금조항’을 삽입하겠다는 것은 모든 창의적, 선제적 행위의 유인을 말살하겠다는 것이다.

▲ 에필로그

87체제 헌법이라 낡았다는 것이 개헌 명분 중의 하나다. 87체제가 ‘1870년을 의미하는 것’이라도 되는 가. 1987년이라면 이제 경우 30년이 경과한 것이다. 미국헌법은 건국당시 국부(founding fathers)들이 기초한 제헌 헌법으로 지금도 유효하다. 필요에 따라 ’수정형식‘을 빌어 조문을 추가한 것이 전부다. 영국은 불문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겠단다. 노동하면 채찍이 떠오른다. 따라서 노예와 노동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근로계약은 노예노동이 아니다. 그리고 왜 ‘사람’을 고집하는 가. 모든 것은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이란 용어를 쓰면 사람이 아니면 동물이 된다.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는 사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사람대접을 받아 그렇게 기아로 내 몰렸는가에 답을 내 놓아야 한다. 국민과 시민은 공동체의식의 첫 출발이다. 국민이 아니면 외국인이다. 한국 국적이 귀한 이유는 “내가 국민이기 때문”이다.

헌법은 법률집이 아니다. 더욱이 ‘매뉴얼’일 수 없다. 헌법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체제를 허물 수도 있는 사회주의 냄새가 풀풀나는 잡동사니들로 헌법이 채워져서야 되겠는 가. 세계는 바야흐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법치를 존중하는 우파적 개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개헌으로 기어이 ‘가난의 길’로 들어서야 하겠는가.

그리고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018년 3월에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격상시키는 지방분권형 개헌”을 논의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국가의 행태가 아니다. 개헌이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여러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라도 된다는 말인가.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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