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2020년의 마지막 밤인 지난 12월 31일, 2500여명의 젊은이들이 프랑스 브르타뉴의 한 외딴 마을 창고에 모여 밤새 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의 레이브(rave) 파티를 벌였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창고 앞에는 이들이 타고 온 차량 수백 대가 주차해 있었다. 주최측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파티 시간과 장소를 보고 몰려든 젊은이들 중에는 영국이나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뒤늦게 경찰이 현장을 급습하자 일부는 순찰차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은 파티 주동자 7명을 구속하고 약 1200명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프랑스에서는 방역 규정을 위반하면 최소 135유로(약 18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젊은이들의 완강한 반항으로 경찰은 파티 시작 36시간만인 1월 2일 오전 10시에야 완전히 해산시켰다고 한다. 한 젊은 여성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우리는 스무 살이 넘었고, 우리 인생은 우리가 정한다. 지금 우리는 젊음을 빼앗겼다”라고 외쳤다. 코로나 시대 젊은이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이 느껴졌다.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반항하기 시작했다.

 

울리 분덜리히 '메멘토 모리의 세계(길, 2008)'의 표지 이미지(사진=박정자 교수 제공)
울리 분덜리히 '메멘토 모리의 세계(길, 2008)'의 표지 이미지(사진=박정자 교수 제공)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거리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가 이러했을 것이다. 수의를 걸쳤거나, 맨 뼈대의 해골이거나 또는 얼굴만 부패하여 이지러졌거나 여하튼 온갖 해골과 시체들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세 시대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절, 사람들은 교회 묘지에서 또는 베니스의 좁은 골목길에서 신들린 듯 춤을 추었다.

처음에 공포감으로 쥐죽은 듯 집안에 박혀 있던 중세 도시 시민들이 차츰 견디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페스트로 죽으나 우울증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마음껏 술 마시고 놀고 춤추다 죽겠다는 것이다. 죽을지언정 내게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해골 가면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그들은 지위와 신분의 특징들을 모두 집어 던진 채 광란의 축제를 즐겼다. 법은 중단되고, 금지는 해제되었으며, 육체들은 제멋대로 뒤섞였다.

모든 도덕과 규제가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현대 젊은이들의 광란의 파티를 ‘레이브’라고 말한다면, 페스트 시대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우던 난동의 축제는 통음난무(痛飮亂舞)라는 고풍스런 말을 써야 제격이겠다. 수 백 년 전 페스트의 도시를 가득 메우던 당스 마카브르(죽음의 무도)를 21세기의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두운 중세 시대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를 한 번 상상해 보자. 당국은 우선 도시를 바둑판처럼 분할하여 몇 개의 커다란 구(區)로 나누고, 구는 동(洞)으로, 동은 다시 가(街)와 로(路)로 나눈다. 격리 기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꼼짝 없이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진다. 출입문은 밖에서 닫아걸고, 열쇠는 40일간의 검역 기간이 끝날 때까지 구역 감독관이 보관한다.

포도주와 빵은 나무로 된 작은 파이프를 통해 배급되고, 고기, 생선, 야채는 도르래와 바구니를 이용한다. 꼭 외출해야 할 경우에는 한 사람씩 순번을 정해 나간다. 왕래가 허락되는 것은 각 행정단위의 장이나 호위병들 뿐이다. 그것도 감염된 집들과 시체들 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죽어도 상관없는 매장 인부들은 그대로 방치되는데, 그들은 병자를 운반하고, 시체를 매장하고, 청소를 하는 등의 비천한 일을 하는 하층민들이다.

도시의 성문이나 시청 그리고 모든 구역을 지키는 위병부대는 주민들의 원활한 복종과 행정관의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사찰 대상은 페스트라는 질병이지만 그들은 마치 절도나 강탈 등의 범죄를 다루듯 감시의 눈을 번득인다. 매일 담당지구를 순찰하는 고위 감독관들은 질병의 상황도 조사하지만, 동시에 혹시 중간 관리자들이 불평을 하고 있지 않는지도 조사한다.

한편 하급 관리들은 매일 거리를 순시하며, 각 집 앞에 잠시 머물러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집안 식구들에게는 각기 자신의 얼굴을 보여야 할 창문이 지정되었고, 감독 관리가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그 창문 앞에 나서야 한다. 그가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침대에 있다는 얘기고, 침대에 있다는 얘기는 아프다는 얘기니 그건 곧 위험한 인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 순간 당국의 개입이 시작된다. 

이러한 감시는 지속적인 기록에 의해 더욱 효율적으로 강화되고 유지된다. 방역 초기에 그 도시에 거주하는 전 주민의 성명, 연령, 성별이 기입된 명부가 작성된다. 순찰 중에 관찰되는 모든 일, 즉 누가 죽고, 누가 병들었으며, 누가 항의를 했든지, 또는 누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는지의 일들이 모두 꼼꼼하게 기록되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마지막에는 최고 권력자에게 전달된다. 가히 권력의 피라미드다.

개인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권력, 이것이 소위 푸코가 말하는 규율권력이다. 개인에 대한 전지전능의 편재적(遍在的) 감시와, 이를 촘촘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자료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세밀한 부분에까지 규칙을 침투시키는 통제 기술이다. 근대 이후의 권력은 이처럼 페스트의 상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물샐틈없는 권력 피라미드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지만 권력자들에게는 달콤한 분할 지배 방식이다.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곧 권력이라면 모든 국민을 옴짝달싹 못하게 막아 놓고 마음대로 이런저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방역 모델이야말로 권력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시대인 요즘 우리의 권력 피라미드는 휴대폰, 크레딧 카드, 교통 카드, QR 코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자 도구들을 통해 오늘날 권력은 더욱 쉽고 더욱 완벽하게 온 국민을 감시한다. 편하다고 좋아 하면서 온 국민이 거의 100% 사용하게 된 교통 카드와 크레딧 카드가 사람들의 동선을 다 기록하고, 식당이건 병원이건 가는 곳마다 강제되는 QR 코드는 온 국민의 행동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감시한다. 기지국에 연결된 휴대폰은 누가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보수 집회에 참가했는지 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방역을 구실로 펼쳐지는 봉쇄가 권력의 자의적 농간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대 역병은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문제이고, 무엇이 과학적으로 옳은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력의 횡포에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해 8월 우파 광화문 집회를 겨냥해 문 대통령이 “체포, 구속영장 청구 등 엄정한 법집행을 보여주기 바란다. 공권력이 살아있다는 걸 국민들에게 꼭 보여주기 바란다”라고 서슬 퍼렇게 말했을 때도, 그리고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이 한술 더 떠 방역활동을 저해하는 행위자는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때도 사람들은 끽 소리 못하고 집안에 들어가 웅크리고만 있었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보수 집회 참가자들은 살인자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뒤 정부 산하 기관인 동부구치소에서 수용자 2419명 중 거의 절반(43%)인 총 1,177명이 코로나에 감염(1월 8일 현재)되었고, 사망자가 3명이나 나왔는데도 대통령은 꿀 먹은 벙어리 상태이고, 해당 장관은 변변한 사과도 없었다. 약자를 존중한다는 좌파 정부치고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그들은 부끄러워 할 줄조차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우울과 분노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이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악한 권력은 아무런 고민이 없다. 김어준의 교통 방송에서 연예인들은 릴레이로 ‘나도 1해요!’라고 웃으며 은밀한 선거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삼성가의 상속세 11조원으로 두둑하게 채워진 곳간을 열어 전 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뿌리면 또 한 번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는 희망에 그들은 희희낙락하고 있을 뿐이다. 규율권력을 탄생시킨 페스트의 모델이 21세기 한국에서 현실로 재현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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