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방학은 읽고 싶었던 책을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채점을 마치고 시내 서점에서 메모해 두었던 책 몇 권 사고 몇 권은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전쟁의 고고학’ 같은 아직도 어린 시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고학 관련 책들도 있고 전공 서적도 있다.

하지만 연휴 기간 가장 먼저 본 책은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눈에 띤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의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이었다. 1998년에 발표된 책이니 아마 대학으로 직장을 옮길 때쯤 구입했었던 것 같다.

모리스 버먼은 날카로운 시각으로 미국 문명을 비판한 여러 권의 책을 발표했고 또 저술상도 수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20년 전 미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고 설명하는 것 같아 감탄사가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 문명의 몰락 현상을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사회보장제도의 붕괴’ ‘비판적 사고와 지적 능력의 상실’ ‘소비주의 문화와 정신적 죽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300년 로마제국 멸망 때까지 나타났던 현상과 같다고 지적한다. 제국이 몰락하는 징후군이라는 주장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전혀 낯설거나 먼 옛날 이야기 같지 않다. 빈부격차는 이미 치유가 쉽지 않은 고질병이 되었고, 한국 사회를 견고하게 지탱해왔던 연금제도나 의료보험제도가 지금처럼 포퓰리즘 도구로 악용된다면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비판적 사고와 지적 능력’의 상실이었다. 그는 서구 사회를 이끌어왔던 이성과 합리적 사고 즉, 계몽주의 몰락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우민화도 문제지만 엘리트들조차 비판적 사고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1830년 토크빌(Alexis Toqueville)이 말했던 ‘우수성에 대한 평등주의적 배척’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가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민화라는 토양 위에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가 창궐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민주주의 가면을 쓴 독재’인 것이다. 현 정권은 ‘문빠’ 혹은 ‘대깨문’이라는 철저하게 우민화된 맹목적 지지집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성이나 합리적 판단은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냥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정권이 뭘 해도 좋다는 식이다. 한 때 ‘무뇌아’라고도 불리웠던 그런 집단이다. 종교도 이 정도면 광신도만 있는 세기말적 종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버먼의 네 번째 현상 ‘정신적 죽음’을 볼 수 있다. 맹목적 우민 군중들에게 경제적·사회적 생산이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는 소비하면서 즐기는 것이다. 경제적 소비가 인간적 삶과 즐거움을 의미하고, 문화도 즐거움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객체일 뿐이다.

김어준 같은 나꼼수 멤버들의 황당한 궤변도, 아무 생각 없이 재밌자고 만든 유튜브 콘텐츠들도 그냥 재미있는 놀잇감일 뿐이다. 그들에게 경제적 생산활동이나 진중한 문화를 창조하는 전문가나 엘리트는 나와 무관한 일이고 다른 세상 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정치와 미래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바라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이다.

정치도 그들에게는 즐기기 위한 소비 객체일 뿐이다. 맹목적 추종도 그 즐거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내가 조국이다’ 이런 비상식적 구호들은 즐거움을 위해 정치를 희화시키는 현상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적 엘리트이어야 할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까지도 덩달아 우민화시키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런 우민화된 정치엘리트와 이들이 모인 정치집단에게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고, 능력 있고 사려깊은 인물을 배치하고, 정책적 합리성을 고민하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민화된 지지자들과 그 수준에 맞는 정치인과 정치만 필요할 뿐이다.

버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럼 대안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제안한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수도사(修道士)적 해법은 거시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답은 아닌 것 같다. 진화나 진보는 아주 더디고 수많은 견제와 시행착오를 거쳐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퇴보나 몰락은 마치 무궤도 열차처럼 갈수록 가속도가 붙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사회는 날개가 없는 법이다. 지금은 일단 제동을 걸어야 하는 시점임에 틀림없다.

 

황근 객원 칼럼니스트(선문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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