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 징용공은 없었습니다"...'애한파'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와의 전격 대담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 징용공은 없었습니다"...'애한파'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와의 전격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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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한국의 용기 있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위안부나 전시 노동자 문제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보수파로서 그런 분들과 교류를 깊이 하고 싶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레이타쿠대학 객원 교수.(사진=펜앤드마이크DB)
니시오카 쓰토무 레이타쿠대학 객원 교수.(사진=펜앤드마이크DB)

지난 2018년 대법원이 소위 일제 시대 ‘징용공’ 피해자 원고들에게 일본의 관계 기업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있었다. 2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의 사법부는 해당 소송의 원고들에게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자산을 강제 매각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는 역사적·법리적으로 심각한 하자가 있음을 지적하고 나선 일본 전문가의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날조된 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徴用工問題)의 저자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일본 레이타쿠대학 객원 교수를 펜앤드마이크가 만나봤다. 이하 일문일답.

—스스로를 ‘친한파’가 아니라 ‘애한파’(愛韓派)라고 부르시는데, ‘애한파’라는 용어에 어떤 의미 부여가 있는지요?

‘애정’이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익이나 상대의 매력 등과 관계 없이 상대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국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자 의지(意志)입니다. 내게 있어서 한국은 10대 후반 다감(多感)한 시절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 온 제2의 고향, 제2의 조국이고, 한국인은 가족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애한파’를 자칭하고 있습니다.

—최근 《날조된 징용공 문제》의 한국어판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책은 이른바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데요, 책 내용을 기초로 판결 비판의 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판결은 한일 양국 간 우호의 기초인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인 한일청구권협약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한일 양국의 수많은 선인(先人)들이 쌓아올린 양국 간 우호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에서 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협력해 이 판결을 무력화해야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해당 판결의 원고들 가운데에서는 단 한 명의 ‘징용공’이 없었다는 비판이 있는데요,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 대부분이 실은 ‘자발적 이주 노동자’였고, ‘모집’이라든지 ‘관알선’과 같은 ‘전시동원’조차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제연행’을 부정하시는 이유를 한국의 독자들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간단히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실행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전시동원’의 본질은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찾아 내지(일본 본토)로 건너와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려 쏟아져 들어온 이들의 유입을 통제하고 비교적 인기가 없지만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탄광, 금속 광산 등에 노동력을 동원하려고 했던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내지로 도항한 조선인들 가운데 일부를 통제한 데에 그쳐 실패했습니다.

1945년 8월 종전 당시 사할린과 남양군도 등을 제외한 일본 본토 내 재일 조선인 현황을 보면 그 인구는 약 200만명이었습니다. 전시동원 대상은 그 가운데 노동자 32만명과 군인 및 군속 11만명 등 43만명이었습니다. 즉, 전시동원으로 일본으로 온 이들은 재일 조선인 인구 전체의 약 20%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머지 80%는 자발적으로 일본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이들과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조선에서 내지로의 인구 유입을 봅시다. ‘조선인 이송 계획’은 1938년 성립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1939년 9월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종전까지 약 60만명이 조선에서 내지로 전시 노무자로서 동원됐습니다. 같은 시기 약 180만명의 자발적 도항자가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도항자 합계는 240만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시동원은 25%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선에서 내지로의 도항자는 불과 25%밖에 통제되지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인 이우연 박사 등의 연구를 통해 일제시대 당시 탄광 등에서 민족 간 임금 차별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수치로써 증명한 바 있습니다. 조선인 노예노동설이 사실이 아님을 책 내용에 기반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노예라는 것은 인격을 완전히 부정당하고 주인이 소유권을 행사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을 받을 수 없고, 주인이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자를 노예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시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모집’이나 ‘관알선’뿐만 아니라 강제력이있었던 ‘징용’의 형식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도 원칙적으로는 2년 계약으로 민간 기업에서 임금 노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약 40%는 계약 종료 전에 도망해 보다 대우가 좋은 직장으로 이직했습니다.

저는 제가 쓴 책에서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도쿄 교외의 토목 공사 현장에는 조선인 노무 감독자가 운영하는 함바(飯場, 노동자들의 합숙소)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소고기를 먹는 등의 내용으로 된 ‘도망 징용공’의 수기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반미 관련 이론의 대부분은 사실 노엄 촘스키 등 미국 현지의 반미 좌파 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저술하신 책 내용을 보니, 징용공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 한국 내 반일 관련 이론들도 사실은 일본인 반일 좌파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본인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자국의 과거사를 공격하는 것일까요?

크게 나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미국 점령기 전기에 이뤄진 일본 약체화 정책의 결과, 공산주의자들이 학계와 교육계, 노동계, 정계 등에 광범위하게 침투했다는 점입니다. 연합국에 패배한 일본은 미국 군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1945년부터 1949년경까지의 미 군정기 정책은 일본을 약체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쿄재판도 군비를 금지한 현재의 이른바 ‘평화 헌법’이 제정된 것도 그같은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미 점령군 사령부(GHQ) 내에도 실은 소련에 충성을 맹세한 공산주의자와 그 협력자들이 다수 있었으며, 그들이 일본의 공산주의를 보호하고 육성했습니다. 그 결과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 역사를 모두 부정하는 ‘반일 자학사관’이 깊이 뿌리내리게 됐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990년을 전후해 소련과 공산권이 붕괴함에 따라 일본 국내의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동조자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과정에서 아사히신문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좌익이 자신들의 이념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 전 일본이 행한 악을 폭로함으로써 자신들은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위로를 받고자 한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사히신문이 권력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이 있었다는 가짜 캠페인을 펼치며 한일 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것은 1991년으로, 바로 소련이 붕괴한 그 해였습니다. 또 일본의 좌익 변호사들과 운동가들이 한국으로 찾아와 옛 위안부들과 옛 전시 노동자들을 찾아내 이들을 일본의 법정에서 원고로 세워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도록 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는 아베 정권이나 스가 정권과 같은 특정 정권의 문제로 치부할 뿐 일본의 일반 국민들 간에도 확고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여론의 냉엄한 현실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 드립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전시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문재인 정권 아래에서 과거의 조약이나 협정 합의를 차례차례 깨버리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데 대해서 공산당과 극소수의 반일 좌파를 제외하고는 일본 사회 전체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인식입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나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한국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보인 것은 일본 사회의 전반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1991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처음으로 폭로했다는 김학순 씨.(사진=연합뉴스)
1991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처음으로 폭로했다는 김학순 씨.(사진=연합뉴스)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에서는 반일 좌파인 아사히신문도 사설에서 “한일 관계의 역사적 진전”이라며 “두 나라 정부가 응어리를 넘어서 마이너스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현명한 한 걸음을 새긴 것을 환영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문재인 정권의 태도를 지원하는 세력은 일본 내에서도 매우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2018년 10월의 전시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아사히신문을 포함해 모든 언론 매체, 그리고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수용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정부와 정부가 체결한 조약이나 협정, 또 합의를, 이전 정권이 했다고 지키지 않아도 좋다며 반복해 깨뜨려 온 한국의 자세에, 좌파를 포함한 일본 사회 대부분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는 자국 경제가 휘청일 정도로 돈을 내놓았고 또 한국에 대한 여러 청구권 역시 일본은 포기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약 체결과 관련해 불만은 없는지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는 격렬한 반대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논리는 공산주의 진영의 지지를 받는 입장에서 한국하고만 국교를 터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북한과의 국교 역시 동시에 맺어야 한다는 주장인것이지요.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미일 동맹에 대해서도 반대였습니다.

두 번째는 국제법상 아무리 승전국이라고 하더라도 무상 몰수가 금지된 재한(在韓) 민간 자산에 대한 청구권이나 동해상 이승만 라인 안쪽에서 조업하다가 한국 측에 나포돼 죽거나 부상을 입은 일본인 어민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상을 일본 정부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당시 당사자나 야당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의 간부가 국회에서 재한 재산 포기를 비판한 것이 의사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에 대해 당시 자유민주당(자민당) 정권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육성하는 것은 일본의 국익이라며 청구권 포기를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한편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보상하고 또한 반공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한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유·무상 도합 5억 달러라는 거액의 경제 협력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외화준비고는 17억 달러 정도였기 때문에, 대한 경제 협력금은 일시급으로 지급한 것은 아니고 10년 간 나눠서 지급했습니다.

당시 이런 거액의 자금 제공에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에서는 “박정희에게 줄 셈이라면 나에게 다오”(朴にやるなら僕にくれ)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전시동원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이제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자세입니다. 한국도 한국 국민이 전통적으로 가져 온 반일 여론에 힘입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판결이 나와 난감한 상황입니다. 양측 모두 정권의 존립 위기라는 측면에서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식인데,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한국을 해양국가·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이탈시켜 대륙국가·전체주의 진영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문재인정권이 이를 성공시킨다면 한일 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접어들겠지요. 하지만 그런 노선에 반대하고 있는 한국의 자유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인의 전통적 반일 감정이 ‘거짓의 역사관’ 위에 성립됐다는,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직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저서 목록을 보면 납북자 및 북한 인권 문제와 한일 근현대사와 관련한 책들을 많이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 근현대사 문제는 원래 선생님의 전공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한일 근현대사 문제와 관련한 연구를 하게 되셨나요? 두 문제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 건가요?

지적하신 대로, 제가 전공한 분야는 역사학이 아니라 한국·북한의 현재의 모습을 연구하는 지역 연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볼때 공산주의의 악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북한 인권 문제, 특히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관련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번역된 책에서 다뤄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의 역사 문제 처리, 일본의 반일 세력에 의한 거짓말 캠페인, 한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의 역사,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 분석 등 제 전공 분야에 속합니다만, 전시노동의 실태와 관련된 부분은 원래 저같은 지역연구자가 아니라 역사학자가 써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의 한국사 연구가들은 매우 편항돼 있어서, 사실에 기반한 실증 연구를 하지 않고 있고, 또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을 폭로한다는 식의, 결론을 미리 정해 놓은 연구밖에 할 줄 모르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자가 아닌 저는 통계 자료나 노동자 수기 등을 사용해 왜곡 없이 사실에 접근하려 노력했습니다.

역사 문제도 조사해 보면 북한의 정치 공작이 깊게 개입됐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의 좌익 활동가들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문제나 전시 노동자 문제를 연구할 때에도 항상 북한 독재 정권의 공작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자유·보수 우파 세력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실을 전하려는 노력이, 미국이나 유럽 지역의 시민들에게 하는 노력에 비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진실을 깨우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서준다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될 텐데, 어찌 보시는지요?

올바른 지적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 한일 양국의 좌익 세력이 거짓말에 기반한 반일 감정을 확산시키기 위해 강한 연대를 해 왔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일본과 한국의 보수 세력은 진실을 전하기 위한 연대나 노력이 매우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수파는 애국자들이라 역사 문제라든지 영토 문제에서는 어찌 됐든 대립하기 쉽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의 보수파에 대해 북한의 세습 독재 정권이라는 공통의 적과 싸우는 것을 우선하고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불일치하고 있음을 상호 인식한다’(agree to disagree)는 선에서 합의하자고 말해 왔습니다.

서울 용산역 앞에 불법 설치된 징용공 동상의 철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 중인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사진=박순종 기자)
서울 용산역 앞에 불법 설치된 징용공 동상의 철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 중인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사진=박순종 기자)

한국의 보수파는 일본 통치시대를 아는 세대를 중심으로 위안부나 전시노동의 실체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 세대에 속하는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적 보수파는 연장자가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일본 좌익의 반일 선전에 편승했습니다. 그들은 좌익으로부터 ‘친일파’ 소리를 듣는 데에 매우 강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1980년대부터북한의 공작으로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반(反)대한민국 사관에 패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반대한민국 사관이란 ‘한국이라는 나라는 건국 이래 일본 통치에 협력해 사익을 추구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반공·친미 등으로 모습을 바꿔 주류 지배 세력이 된 더러운 나라’라는 식의 역사관을 말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용기 있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위안부나 전시 노동자 문제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보수파로서 그런 분들과 교류를 깊이 하고 싶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 정리=박순종 기자 franci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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