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개혁의 대상에게 맡겨서야 무슨 성과 있겠나
-최저임금 인상에 민간일자리 창출 고갈
-노사협상 통한 최저임금 인상의 폐해
-노조는 근본적으로 개혁의 대상...노동개혁 절실

이병태 객원 칼럼니스트

정부가 커튼 뒤에서 권력을 동원한 최저임금 위원회의 최저임금 16.4%의 급진적 인상은 민간 시장의 일자리가 자취를 감추게 만들고 있다. 금년 2월의 취업자수는 지난 해 동기 비해 10만 4천명 증가했으나 위장 실업일 가능성이 큰 농림어업의 4만1천명과 공공부문의 5만 9천명을 제외하면 민간부분의 증가는 단 4천명 증가로 지난해의 민간부문 증가 35만명에서 99%로 감소해서 민간의 일자리 창출이 완전 고갈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경제의 급격한 확장 국면이라 수출이 크게 증대되는 경제여건을 감안하면 가히 충격적인 결과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최저임금위원회를 통한 최저임금 결정이 얼마나 상궤를 벗어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1년 최저임금을 도입한 이래 매년 평균 8% 이상 한해도 빼놓지 않고 인상해 오고 있다가 급기야는 지난해 16.4%를 인상했다. 반면 1938년에 최저임금을 도입하여 80년의 긴 역사의 미국은 그간 12번의 인상만을 했으며 연방정부 수준에서는 물가 순준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보다 낮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의 최저임금을 결정을 정부가 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노사 대표에 매년 노조 파업하듯 강성노조 대표들과 사업자 이해를 제대로 대변 하지도 못하는 경제단체의 사측 대표들의 합의를 정부가 그 결정을 의무적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오는 폐단이다. 특히 지난 해의 최저임금 결정은 영세업자들이 수용할 수 없는 과격한 인상을 합의하여 사측대표들이 심각한 대리인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어낸 경우이다. 노사 협상의 결과로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나라는 벨기에를 제외하고는 한국, 그리스, 멕시코 등 OECD에서 비교적 가난한 나라들과 베네쥬엘라, 방글라데시, 콜롬비아 등 최빈국들이다. 반면에 영국, 일본, 프랑스는 사회적 의견을 청취하고 정부가 결정하는 방식이고, 미국, 네덜란드, 뉴질랜드, 미국 등은 정부 또는 국회의 법으로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책임 정치의 사회적 자본이 낮은 나라들이 노사협상에 위임하는 경향이 있다. 

노사대 타협이라는 방식이 우리경제에 심각한 멍을 들게 하는 것은 최저임금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청년실업률은 IMF 외환위기 이후 2013년까지 6%대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었다. 그런데 2013년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던 박근혜 정부의 노사정 대타협에 의해 정년 60세가 법제화하면서 당시까지 55세, 58세로 되어 있던 산업계의 정년 나이를 한 순간에 적어도 3년에서 5년 연장을 하고 그 보완책으로 합의되었던 임금피크제는 국회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이후 급격하게 청년실업률이 치솟는 원인이 되고 있다. 당연히 3-5년동안 청년의 고용 절벽이 예상됨에도 노사합의는 미래의 노동자가 아니라 현재의 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무모한 결정을 해서 문재인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년실업의 '재난적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국가경제 전체를 고려해야 할 정부가 마땅히 할 의사결정을 소수의 이해 집단에게 위임해서 초래된 도덕적 해이가 불러온 참사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노사의 대화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의 예를 보듯 노사 대타협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특히 북구 유럽의 선진국의 공동체의 신뢰에 기반한 노사타협의 역사와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 노사 타협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미국의 경제학자들마저 미국의 노사관계가 유럽에 비해 대결적이기 때문에 북구 유럽의 사회적 합의 도출 방식은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물며 미국이나 영국 등에 비해 극단적인 투쟁만 주장하는 한국적 노사관계에서 국민 전체를 생각하는 건설적인 타협안이 나오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노조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국제기구들은 일관되게 우리의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과잉 규제를 지적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도입하라는 권고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발표된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 자유도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세계평균에도 못 미치는 분야가 노동시장의 자유도이다. 노동시장의 자유화의 최대 걸림돌은 민노총으로 대변되는 대기업 강성 노조다. 그런 개혁 대상들에게 노동시장의 개혁을 전권 위임하는 것은 당연히 개혁을 포기하는 것으로 지난 박근혜 정부의 실패가 이 구조하에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경제개혁의 영향은 온 국민에게 파급되지만 노측 대표와 사측 대표는 전국민은 커녕 그들이 대표하는 집단 중에서도 극히 일부를 대변하고 그것마저 협상에 나서는 당사자들과 직접적 이해가 없는 대리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합의는 국민 전체 경제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사적 대타협이라는 말은 우리와 같은 소수의 노조와 사측 대리인간의 타협이 아니라 정부가 국가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한 개혁안을 노측과 사측이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성공적인 노동개혁의 사례로 손꼽히는 독일의 하르츠 개혁만 해도 슈레더 총리의 부탁을 받은 폭스바겐의 인사담당 최고경영자인 피터 하르츠라는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의 경영자 주도로 성안이 된 것을 슈러더 총리의 정치적 자살에 준하는 결단과 리더십으로 사회적 결단을 이끌어낸 경우를 보더라도 노사의 사회적 대타협이 노사 간의 협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시행된 경제사회 개혁의 특성을 분석한 OECD보고서에 의하며 첫째 성공 요건은 선거에 의한 분명한 개혁의 권한과 국민적 명령이다. 국민의 뜻이 담긴 개혁의 지지와 강력한 권한 없이 기습적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통치자들이 개혁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구해야 하고 가능하면 선거에 의해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정부처럼 노동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 아무런 청사진과 방향성없이 노사의 대타협만 강조한다는 것은 국가를 책임지지 않는 소수의 위원회에 국가의 미래 운명을 맡기는 것이 된다. 

국민의 명령과 합의를 이끌기 위해서는 분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개혁이란 그 결과에 따라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이 상존한다. 이번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이나 최저임금인상은 부정적 결과에 대한 솔직한 의사소통을 정부가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성공적 개혁의 전제조건으로 다시 거론되는 것은 철저한 사전적 연구와 분석이다. 대통령 공약사항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급격한 노동시장의 변경과 개입을 아무런 사전 연구와 분석없이 자행한 결과가 빚어내는 참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고 정연 60세 연장의 결과도 다르지 않다.  

또 한가지 성공적인 개혁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급한 개혁 시도가 가져오는 것은 혼란이지 의도했던 개혁이 아니다. 따라서 타협과 합의의 전통이 없는 지금과 같은 분열되고 대결적 정치구조에서 단임 정부가 시도하는 개혁은 안착이 될 가능성이 낮다. 필요한 시간의 확보와 개혁의 수행을 위해서는 정부, 정치권의 응집력과 화합이 필수적이다. 박근헤 정부의 노동개혁의 실패는 바로 정부의 개혁방향에 대해 여당을 포함한 국회가 동의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따라서 최소한에 그친 노사 합의도 국회에 의해 대부분 무력화되고 인기영합적인 정년연장만을 통과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그 어느 과거의 정부에 비해 의석수에서 소수정권이다. 그리고 이전 정부에 비해 정치권의 협치를 성공하고 있다고 볼 아무런 근거도 없다. 

OECD보고서가 밝히고 있는 다른 성공 조건은 강력한 리더십과 일관된 지속성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통합을 유도하고 국가경제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낼 리더십과 그 문제를 해결하는 지속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과도하게 분배에 집착하고 강성 노조 편향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개혁을 추진할 리더십과 경제 개혁의 주요한 주체인 사측의 신뢰를 철저하게 잃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을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성공적인 경제개혁은 노사 협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대 정권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추진해야할 개혁을 개혁의 대상들에게 미루어 오고 있어서 우리 경제사정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지대 추구 세력의 이익 보호는 구조는 강화되어 왔다.  국민적 명령으로 인식될만큼의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끌어갈 정치적 리더십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설픈 노사의 사회적 대타협은 책임정치의 방임이자 경제를 더 빠르게 나락으로 몰고가는 짓이다. 노사정 대타협의 미몽을 버리고 역사에 책임지는 정권이 나와야 한다. 방향 없는 어설픈 노사 타협 촉구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건네 주는 일이다.  

이병태 객원 칼럼니스트 (KAIST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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