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6일 對北특사단 귀국 직후 靑 "회담 요구사항 없었다" 전해
김정은, 韓美에 "평화실현 위한 단계적 조치 취하면 문제해결"
'선대 비핵화 유훈' 타전은 靑·中매체뿐…北매체들 일체 침묵
임진왜란중 明·日간 '국서조작' 국제사기 벌이던 심유경 처형돼

지난 25일부터 28일까지 3박4일간 중국을 방문한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왼쪽)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한 채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지난 25일부터 28일까지 3박4일간 중국을 방문한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왼쪽)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한 채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비공식 방중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비핵화가 '선대(先代)의 유훈'이라고 언급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한·미에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를 요구했다는 현지 매체 보도가 28일 나왔다.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둔 이른바 '평화협정' 또는 그 전(前)단계인 6·25 '종전(終戰)선언'을 노린 요구라는 관측이 나온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즉각적인 핵폐기 조치를 요구할 것으로 점져지는 미국과의 회담을 통한 협상 타결 가능성을 한층 낮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난 6일 대북 특사단이 북한에서 귀국한 뒤,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북측이) 우리나 또는 다른 국가에 요구한 것은 특정한 것은 없고 '대화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의사밖에 없다"고 전한 것과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중국중앙(CCT)TV와 관영 신화통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25일부터 이날까지 3박4일 간의 일정으로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사실을 공동 발표하면서 김정은의 어록을 전했다. 김정은과 시진핑 주석은 지난 26일 회담한 뒤 인민대회당에서 만찬 연회를, 이튿날 양원재에서 오찬을 가졌다.

보도를 종합하면 김정은은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주력하는 것은 우리의 시종 일관된 입장"이라며 "우리는 자발적으로 긴장 완화 조치를 했고 평화 대화를 제안했다"고 전제했다.

김정은은 또 남북, 미북 정상회담 약속 사실을 언급한 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선의를 갖고 우리의 노력에 응해 평화 안정 분위기를 조성하고 평화 실현을 위해 '단계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론을 꺼냈다.

중국에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과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 대화와 협상 추세를 유지하며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함께 수호하려 한다"고 당부했다.

시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지지한다"면서 "우리는 각국이 한반도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지지하고 대화를 위해 절실한 노력을 하길 호소한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하고 북한을 포함한 각국과 함께 노력해 한반도 정세 완화를 추진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다만 실제로 김정은이 비핵화를 입에 올렸는지는 중국 매체 외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 관영매체들은 '비핵화' 내지 '단계적'이라는 용어를 일체 거론하지 않았고, 김정은이 시 주석과 나눈 회담 내용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26일 연회에서 시 주석-김정은 순으로 했던 연설도 28일 현재 전문(全文) 공개돼 있지만, 이 안에서 '단계적 비핵화'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김정은이 시 주석이 방북 제의를 수락한 것에 감사를 표하는 등,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공유하는 북중간 혈맹 관계를 재차 다지는 우호 발언 위주로 오갔다.

이날 타전된 어록은, 앞서 지난 6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필두로 한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과 합의한 내용이라며 공개한 언론발표문 및 브리핑 내용보다 큰 진전이 없기도 하다.

당시 언론발표문에는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문장이 담겼다. 정의용 안보실장은 브리핑에서 "남북 정상이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관계 발전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이때 청와대 기자단에서 '김정은이 미북대화에 복귀하겠다고 한 구체적인 언급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이 나왔지만, 정 실장은 "김정은의 언급 내용을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특히 저희가 주목할 만한 것은 '비핵화 목표라는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관심을 유도했다.

추가 설명에 나선 권혁기 춘추관장은 '김정은이 요구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북한에서 특별히 대화에 나오기 위해서 우리나 또는 다른 국가에 요구한 것은 특정한 것은 없고, 대화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의사밖에 없다"고 답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 용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는 물음에는 "제가 잘 이해를 못 하겠다. 그(언론발표문) 이상 추가로 말씀드릴 게 없을 것"이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김정은을 직접 접견했다는 대북 특사단의 보고는 이날 중국으로부터 타전된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 등 북측의 전제조건 생략한 채 발표했거나, 조건을 알지 못한 채 단편적인 내용만 전한 격이 됐다.
 
지난 11일 '월간조선'은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의 '심유경의 末路를 달려가는 문재인의 對北 특사 외교'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공모해 명·조선·일본 3국을 속여 거짓 평화협상 중재자를 자처하다가 실체가 탄로나 처형된 명나라 사람 심유경에 특사단을 비유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특사단 방미 후 김정은과 5월 정상회담을 갖겠다고 전격 수락했지만, 이후 백악관이 회담의 '전제조건'을 거론하며 북측에 대한 압박 의지와 불신을 표명한 것이 계기였다.

칼럼에서 이동복 대표는 정 실장이 백악관 기자단에게 북측 입장을 설명한 내용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며 "설명에서 거론한 '김정은의 약속'들에는 예외 없이 북한판 '전제조건'이 제시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체 무시하는 쪽으로 사실상 김정은의 말을 왜곡, 변조해 전달한 결과가 돼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6세기 말 임진왜란 기간 중 명과 왜 사이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공모해 명의 신종과 왜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國書)를 각기 위·변조하는 '사기(詐欺) 강화(講和)' 교섭을 벌이다가 사실이 발각된 끝에 목숨을 잃어버린 명인 심유경의 전철을 정 실장의 소위 특사단 일행이 답습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쳐 내기 어렵게 만든다"고 비유했다. 

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대활약으로 일본군 보급 상태가 악화된데다 겨울이 닥치면서, 심유경과 고니시는 화평 협상에 노력했지만 ▲도요토미는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할양하라는 한반도 분할과 명나라 황녀를 후궁으로 보내줄 것을 ▲명은 일본 측의 무조건적 철수와 사죄를 서로 요구하고 있어 녹록지 않았다.

그러자 심유경은 명 황제에게 "도요토미는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겠다"는 내용으로 일본 측 국서 내용을 조작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협상을 허락받고 '일본 국왕 책봉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심유경은 '천민 출신' 히데요시를 까막눈으로 믿고 기만하려 했으나 나고야 연회장에서 국서 조작이 탄로나 처형됐다. 히데요시는 국서조작에 격분해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런 과거의 '실패한 국제 사기'는 이날 중국 매체나 국내 친(親)정부 언론들이 보도하는대로 '김정은이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만 바라볼 수 없게 한다는 해석이다. 미국(핵폐기)과 북한(미 핵우산 등 군사력 철수)이 각각 주장하는 비핵화의 본질이 상이하다는 점도 여태 해결되지 않았는데, 북·중은 물론 그들에게 우호적인 청와대와 특사단의 '말'만 믿고 비핵화 진전을 거론하기는 이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기호 기자 rlghdlfqj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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