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 임신 중에 남편 좌익 폭도들에게 끌려가
과거 좌파 정권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에서 납북자 문제 언급 안돼
아버지 북한군에 끌려가며 구타 당해...살점과 옷이 붙어
이전 정부 조사에서 납북자 10만명 내외로 추정
미군 조사서 서울·개성 공무원 2000명 납치·학살 정황 드러나

2018년 3월 28일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남북 정상회담 6·25전쟁 납북피해 문제 공식 의제화 촉구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펜앤드마이크]
2018년 3월 28일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남북 정상회담 6·25전쟁 납북피해 문제 공식 의제화 촉구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펜앤드마이크]

“너무 억울해요. 너무 억울해. 너무 억울해요. 너무 억울해요” 납북자 가족 김항태 씨(90)가 흐느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천해성 차관이 참석하기로 예정된 가운데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가 남북회담에서 6·25전쟁 납북피해 문제 공식 의제 채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28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납북자 가족 3세대가 함께해 정부에 68년전 북한에 의해 납치된 남편·아버지·할아버지의 생사 확인과 조속한 송환을 촉구했다.

대한청년단 회원으로 납북된 김재봉씨의 아내 김항태씨는 “그때만 해도 공무원이 별로 없었고 동네가 시골이었기 때문에 우리집 그이가 (대한청년단에) 뽑혔다”며 “그 죄로 (북한에) 끌려갔는데 이게 어떻게 그 사람 죄고 내 죄입니까?”라며 하소연했다.

남편이 북한군과 좌익 폭도들에 의해 끌려갈 당시 김씨는 임신 중이었다.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딸은 이제 67세의 노인이 되었다.

발언하는 납북 피해가족 김항태 씨 [펜앤드마이크]
발언하는 납북 피해가족 김항태 씨 [펜앤드마이크]

김씨는 “기가 막히고 속이 타서 말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찾아 주실겁니까? 찾으러 간다고 말이나 해주시겠습니까?”라며 “매일 허탈함 뿐이고 기분 좋은 말은 한 마디도 못 듣고 간다”며 눈물을 흘렸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제껏 좌파 정권인 김대중(2000)·노무현(2007) 정부 당시 각각 한 차례 개최됐다. 매 회담 때 마다 가족협의회는 전쟁납북자 문제를 공식 의제화 할 것을 정부에 요청해왔다. 하지만 단 한번도 정부 차원에서 공식 언급이 이뤄지지 않았다.

김씨는 “(결혼해서) 1년 밖에 함께 못 산 사람을 이렇게 못 잊는 이유는 그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라며 힘들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납북자 가족 홍능자 씨(77·여)도 6·25전쟁 당시 끌려간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했다.

홍씨는 “우리 아버지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저 동네 위해서 옛날 구장(區長)도 보시고, 아주 훌륭한 아버지였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6·25 당시 5살 이었던 홍씨와 가족들은 경기도 평택군 삼계리 옹포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 홍남식 씨는 사업을 위해 경북 안동에 내려가 있었지만 전쟁 소식을 듣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옹포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미 북한군에게 붙잡혀서 창고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홍씨 아버지는 자신을 잡으러 다니는 동네 좌익들을 피해 친구 집에 숨었으나 가족을 죽이겠다는 소문이 돌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홍씨는 “우리집이 당시 대대로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면장도 하고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오셨는데 동네 빨갱이들이 인민군(북한군)한테 일러서 잡으러 왔어요”라며 “우리 가족도 창고로 몰아 넣고 날마다 인민군 노래 가르치고 교육 시켰어요”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홍씨는 “매일 양복만 입으셨는데 그날따라 중의적삼을 입으셨어요. 남자 군인 셋하고 여자 군인 둘이 총을 들고 아버지를 끌고 다는데 저 멀리서 우리집을 이렇게 돌아서 보시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소식은 그 이후에도 전해졌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주민들이 북한군에 의해 구타 당한 아버지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발언하는 납북 피해가족 홍능자 씨 [펜앤드마이크]
발언하는 납북 피해가족 홍능자 씨 [펜앤드마이크]

“(전해 듣기로는) 얼마나 때렸는지 살점이 다 터져서 중의적삼하고 살하고 붙었대요. 기가 막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겁도 많고 착하셔서 벌벌벌 떨면서 가셨는데, 동네 면장한거 가지고. 유지한거 가지고. 그거 가지고 때렸는데. 얼마나 아팠겠어”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버지 옷이라도 갈아 입히려고 평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후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소식은 지금까지 묘연하다.

북한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 수많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납북을 자행했다. 정부 차원의 전시(戰時) 납북사건 진상 조사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3월 ‘6·25 납북자법’ 제정 이후 본격화됐다. 정부는 이후 6년 간 약 5500여 건의 납북피해 신고를 접수 받았다.

정부 조사결과 집계된 납북자는 약 9만5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당시 미군 후방기지사령부가 작성한 '한국전쟁범회(KWC) 사건번호 141 문건' 영문본과 번역본을 공개하는 가족협의회 [펜앤드마이크]
6·25전쟁 당시 미군 후방기지사령부가 작성한 '한국전쟁범회(KWC) 사건번호 141 문건' 영문본과 번역본을 공개하는 가족협의회 [펜앤드마이크]

가족협의회는 이날 6·25 당시 미군 후방기지사령부(Korean Communications Zone)이 작성한 ‘한국전쟁범죄(KWC) 사건번호 141’ 문서도 공개했다.

이 문서는 북한군이 1950년 10월 8일에서 10일 사이 서울과 개성의 대한민국 공무원 약 1800~2000명을 납북해 학살한 정황을 담고 있다.

이들 납북 민간인들은 평양까지 도보로 이동되는 동안 식사를 제공받지 못했다. 행렬에서 뒤쳐지면 북한군에 의한 구타가 가해졌다. 이 과정에서 총살 당한 사람만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평양 도착 후 이틀간 조선인민군 군사학교에 감금되었다. 이후 10월 8일 자정부터 9일 새벽 4시까지 평양 인근에서 1차로 약 1000명의 포로가 처형됐다. 9일 자정부터 10일 새벽 4시까지 나머지 포로들도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과 분명한 범죄기록이 존재함에도 민간인 납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한반도 평화와 종전을 말하려면 납북피해자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기필코 납북자 문제를 의제화해 북한에 시인과 사과, 그리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함으로 참된 평화의 길을 열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전했다.

조준경 기자 calebca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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