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로 집권한 좌익정권이 공익 앞세워 사유재산에 손대면 국가적 재앙 닥쳐
​​​​​​​월남 패망은 토지개혁 방기한 탓. 베트콩들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주민 선동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필자는 현역 언론인 시절 칠레를 몇 차례 취재한 바 있는데, 그때 칠레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칠레는 혁명이나 쿠데타 방식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공산화를 경험한 특이한 나라다.

프레이 대통령과 인터뷰를 위해 ‘모네다궁’이라 불리는 대통령궁을 방문했을 때 한쪽 벽면에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피노체트 장군이 1973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했는데, 그 때 남겨진 상흔이었다.

프레이 대통령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칠레 대통령을 역임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Eduardo Frei Montalva)의 장남이다. 프레이 몬탈바는 그는 1970년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후보에게 패해 정권을 넘겨주었다.

1970년 9월 칠레 대선에서 중도파와 우파 진영은 분열하여 단일화에 실패한 반면, 좌파는 단일화에 성공했다. 그 결과 사회당·공산당·급진당과 기독교민주당 등 좌파정당들이 선거를 위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의 통일 후보로 나선 아옌데는 불과 36.6%를 득표, 차점자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어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했다.
 

●선거로 사회주의 정권 들어선 칠레
 

소아과 의사 출신 정치인 아옌데는 청년 시절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아옌데는 민주주의와 국민의 기본권, 법의 합당한 절차를 존중하는 한도 내에서 사회주의 노선에 따른 사회개편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막상 실시된 아옌데의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은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이었다.

우선 모든 어린이들에게 분유와 우유를 무상 공급했다(한국의 무상급식을 상기하라). 외국계 자본이 다수 투자되어 있던 구리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했다. 또 1,300여 명의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공산혁명 식 토지개혁을 단행했다(추미애의 토지 공개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옌데 정부가 미국의 광산 회사 아나콘다가 소유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을 무상몰수하자 미국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외국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옌데 정부는 주요한 개인소유 광산과 제조업체, 외국인이 투자한 기업, 농업협동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대단위 농지를 몰수했다.

소득재분배를 외치며 임금을 대폭 인상했고, 물가를 동결시켰으며, 정부가 기간산업을 사들이는 데 따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찍어냈다. 외국 투자기업들이 몰수되자 국제적인 경제 제재가 시작됐다. 글로벌 기업들과 서방 국가들이 칠레에 대한 투자를 끊자 1972년 칠레 화폐(에스쿠도화) 가치가 폭락했다.

아옌데가 집권했던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실질 GDP가 매년 5.6%씩 줄어들었고, 정부 예산 적자는 급증했으며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났다. 아옌데 집권 3년 간 물가는 500%가 급등했고, 칠레 경제는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생산은 정체됐고, 수출은 큰 폭으로 줄었으며, 재정이 고갈됐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뛰자 정부가 가격 통제를 강제했다.

덕분에 상점에서 생필품이 사라졌고, 쌀·콩·설탕·밀가루 등 생필품은 지하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암거래됐다. 산티아고 시민들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가게를 갈 때 자그마한 용기를 가지고 가야 했다고 증언한다. 생필품이 귀해지자 치약은 한 개를 통째로 파는 것이 아니라 3~5cm씩 짜서 팔았고, 비누는 2~3cm씩 칼로 잘라서 판매했기 때문이다. 극심한 인플레로 인해 화폐가 휴지나 다름없게 되면서 집안에 있던 샹들리에, 가전제품을 들고 나가 빵이나 생필품과 바꾸는 바람에 상점마다 샹들리에, 가전제품이 산처럼 쌓였다.

아옌데는 국제 채권자와 외국 정부에 채무 디폴트를 선언했다. 경제 제재로 인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떠밀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기아선상에 처한 가정주부들이 참다못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냄비와 밥솥, 프라이팬을 두들기며 “빵을 달라”고 시위에 나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세롤라소(cacerolazo), 즉 냄비 시위다.

상점, 주유소, 병원이 파업했고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광산 노동자들마저 파업을 일으켜 아옌데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급진 좌파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유재산에 손대는 순간…
 

혼란이 극에 달하자 피노체트 장군이 1973년 9월 11일 새벽,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3군 참모총장과 경찰국이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고 선언하고 “아옌데 대통령은 24시간 이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옌데가 하야하지 않고 저항하자 쿠데타군은 전폭기를 동원하여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하고 있던 모네다 궁을 폭격했고, 쿠데타군과 저항세력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아옌데 대통령은 모네다 궁이 쿠데타군에 함락되기 직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으로 자살했다.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은 이처럼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칠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공산주의 정권이 집권하여 공익 혹은 사회적 정의를 앞세워 사유재산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토지 문제 잘못 건드렸다가 망한 나라 중의 하나가 월남이다. 밴 플리트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전을 지휘했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후에 주월남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베트남에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면 월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국의 유명 인사가 왜 이승만을 높이 평가한 것일까?

월남의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집권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토지개혁을 약속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지주층이었던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결집하기 위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결과 대승불교 국가로서 전 국민의 80%가 불교 신자인 나라에서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권력과 부(富)의 기반인 토지를 장악함으로써 종교적 갈등과 계급모순이 심화되었다.

고 딘 디엠은 베트콩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불교 마을과 사찰들을 폭파하고 철거했다. 또 많은 불교도들과 승려들을 베트콩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처형했다. 1963년 5월, 고 딘 디엠은 자신의 형을 쿠양빈 지역의 가톨릭 대주교로 임명했는데, 그가 석가탄신일에 봉축행사를 금지시키면서 큰 반발이 일어났다. 천주교 신자인 고 딘 디엠은 불교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불교를 신봉하는 광범위한 국민을 반정부 세력으로 몰아넣었다.

1963년 6월 11일 사이공 시내에서 자행된 틱쾅둑 승려의 분신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 및 게릴라 투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여러 승려들이 연이어 분신했고, 대학생과 시민들은 격렬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 11월 1일, 두옹반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대통령궁을 점령하여 고 딘 디엠 대통령과 동생 고 딘 누(呉廷柔)를 체포하여 장갑 차량 안에서 살해했다. 고 딘 디엠의 실각 이후 월남에서는 1년 동안 6차례나 쿠데타가 반복되어 혼란이 극에 달했다. 결국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일으켜 전면적인 군사 개입을 하면서 월남전이 확전됐다.
 

●베트콩의 “무상몰수-무상분배” 감언이설
 

미군은 어마어마한 예산과 각종 최신 무기, 엘리트 지휘관과 전투병들을 투입했다. 미군은 매일매일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듭했으나 전쟁에서는 패했다. 결정적인 패인은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자기 소유의 토지를 원했던 월남 사람들의 민심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베트콩들은 동네마다 나타나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약속하면서 민심은 월남 정부가 아니라 베트콩으로 기울었다.

이승만은 1948년 건국 직후부터 농지개혁 관련법안을 만들어 지주계급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1950년 4월 중순,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 이승만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하면서 농민에게 유리한 분배조건을 내걸었다. 그 결과 자기 땅이 없어 온갖 설움을 다 당하고, 뼈 빠지게 농사 지어 수확량의 50~60%를 소작료로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던 농민들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당대에 신분상승이 가능한 사회, 부자와 빈자, 양반과 상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 갈등이 하루아침에 소멸됨으로써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할 수 있는 뿌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월남은 가톨릭 지주세력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 딘 디엠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방기했다. 그 결과 민족의식을 보유한 수많은 사람들이 반정부 인사로, 베트콩으로 돌변하여 패망의 길로 질주했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사회 불평등 해소”를 앞세워 토지 공개념을 선동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개헌안에 의하면 개인의 토지 소유권은 인정하되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용과 처분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유재산인 토지의 이용과 처분을 제한하면 사유재산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세계적인 성공사례로 평가되는 이 나라 토지제도와 사유재산제도의 근간을 뒤엎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 어쩌자고 이러는 것일까?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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