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산책] 6·25 발발하자 온 태국군이 20년 더 한국에 남은 이유는?
[주말산책] 6·25 발발하자 온 태국군이 20년 더 한국에 남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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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는 1950년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이 되는 해다.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국제연합, UN의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6월 27일(미국시각)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한다’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이 통과되자 많은 우방국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유엔군을 파견했다.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해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고, 5개국은 의료지원부대를 보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6·25전쟁이 끝나자 방위협정을 체결한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한국으로부터 병력을 철수했다. 하지만 휴전이 된 뒤 20년을 더 한국땅을 지킨 외국 군대가 있다. 바로 태국군이다.

6·25 발발하자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달려온 태국군

태국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전투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 태국은 1951년 6월 공군 병력을 파병한 것을 시작으로, 지상군·해군을 포함하여 6,326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다. 1000명 이상의 육군 병력과 군함 3척, 수송기 1개 편대 규모였다.

전투 병력 파견 전에는 유엔의 한국지원 결의에 응답, 전쟁 발발 5일 후인 6월 30일, 태국쌀 4만 톤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에 파병된 태국군 장병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 [사진=전쟁기념관]
한국전쟁에 파병된 태국군 장병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 [사진=전쟁기념관]

전쟁 초반에는 태국 공군이 빛나는 활약을 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들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송했고 그리스, 캐나다 공군 등과 함께 물자 수송 임무도 수행했다. 태국군의 용감성은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증명됐다.

‘리틀 타이거’ 별명얻은 태국군의 용맹함 보여준 ‘포크찹 고지 전투’

1952년 10월, 판문점에서의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전쟁은 고지전의 양상을 보였다. 당시 태국군은 미 제2사단장으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포크찹 고지(지금의 연천군 일대, 당시 234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고, 포크찹 고지 근처에 전초기지를 구축했다.

11월 1일 첫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점점 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태국군은 중공군의 1,2차 공격을 저지하며 고지를 지켜냈다. 중공군은 포기하지 않고 11월 10일~11일 밤 집중포격을 앞세워 3차 공격을 감행했다.

1개 대대 병력에 불과했던 태국군에 맞서 중공군은 1개 연대를 동원, 인해전술로 끊임없는 파상공세를 벌였다. 이에맞서 태국군은 백병전까지 벌이면서 끈질기게 저항했고 결국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이 입은 피해는 사망자만 300여 명에 달했으나, 태국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25명, 부상 76명에 불과했다. 태국군은 이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인해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게됐다. 동시에 중공군과 북한군에게는 두려움을, 유엔군과 한국군에게는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다.

낯선땅에서 자유수호 고귀한 희생...1296명 전사

태국군은 포크찹 고지 전투 외에도 평양 개성 문산 수원 평택지구 전투(1951) 연천 율동전투(1951), 문경 상주지구 공비토벌 전투(1951), 고랑포 나부리전투(1953), 김화의 사동전투(1953)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용맹을 떨쳤다.

당시 한국에 파병된 태국군은 21연대 병력이었는데, 현재 태국에서 21연대는 ‘왕실근위연대’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 최정예부대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태국군은 6·25전쟁에 1만 1,786명이 참전, 136명이 전사하고 부상 1139명, 실종 5명의 피해를 입었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는 태국군 참전 기념비가 건립돼 그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도 198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한 추모비가 있다.

6·25 끝나고도 20년 더 한국에 남아 UN군 방어작전 수행

3년에 걸친 6·25 전쟁이 끝났지만 태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태국군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햇수로 20년, 1972년 6월 11일까지 경기도 포천시 운천면,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UN군의 일원으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미국군을 제외한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지만 태국군이 20년을 더 남았던 이유는 우선 UN군의 요청 때문으로 전해진다. 당시 UN군 사령부의 위상 때문에 미국 외의 연합군 병력이 필요했는데, 6·25 전쟁동안 ‘리틀 타이거’로 불리며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태국군에게 중부전선의 경계임무를 요청한 것이다.

이와함께 당시 태국은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의 양대 선진국으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했던 만큼 장기간 한국파병으로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군사훈련 차원에서 한국주둔의 필요성도 작용했다고 한다.

6·25 당시 태국군을 지휘했던 '끄리앙끄라이 아따난' 중령은 2016년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22년 동안 초대 보리분 쯜라찌맅 대령부터 마지막 암노에 쏘마나스 중령까지 모두 6명의 지휘관이 부대를 지휘했다.

“열대 나라에서 온 군인들이 한겨울 고생하던 모습 눈에 선해”

태국군이 주둔했던 경기도 포천시는 2018년 1월 방콕시 방켄구와 우호협력 합의서를 체결하고 행정, 교육, 경제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 나가고 있다.

당시 태국군이 주둔했던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 지역 주민들은 열대 지방에서 온 이들 태국 군인들이 한겨울에 고생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있는 태국군 참전기념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있는 태국군 참전기념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주민 양재홍 씨(69)는 “태국군 주둔지가 강원도 철원 바로 옆 이어서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는데 한국말로 ‘추워 추워’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양 씨는 또 “그때 태국군이 우리 또래 어린 아이들에게 처음보는 과자를 나눠주곤 했는데 요즘 태국에서 온 노동자들을 보면 그때 왔던 태국군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이상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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