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대선에서 정치적 양극화로 정파간의 극단적 대결로 치닫는 민주정의 위기를 확인하였다, 정치적 반대파를 적폐로 몰아 척결을 시도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도 동일하다. 1990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권의 몰락에 따른 자유민주정의 승리로 역사의 종말을 말했지만, 30년이 지난 오늘날 자유민주정은 혼란에 빠져 있다. 극단으로 갈려서 대립하는 정치적 양극화라는 현실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설명된다.

민주정의 진전에 따라 성별, 종족, 종교, 문화 정체성등의 정체성 그룹이 탄생하고 사회의 다원화는 정체성 그룹의 지위 상승으로 이어져 국가는 정체성 그룹으로 분할되어 점유된다. 정체성 인정 욕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추구는 포퓰리즘에 의해서 부추겨져서 과잉 정치의 상황을 만들고 공화국이라는 단일한 그릇은 모든 요구를 담아내기가 어려워진다. 정치는 한계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정치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끈질긴 요구는 정치 없는 정치 시대, 전쟁과 정치의 혼재 상황을 만든다.

종족주의, 페미니즘, 종교라는 담론적 기반이 없어도 동질성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있으면 정체성 그룹이 형성된다. 작은 계기가 강한 결합을 만든다. 공동구매라는 경제적 이유, 오락을 함께하는 취향의 공유는 실제적이기에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오늘의 정체성 그룹은 거창한 이념이나 합리적인 이유에 기초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내세우며 현실적인 목적이 분명하기에 강하게 결속하며 그래서 지속 가능하다. 정체성 그룹을 통해서 정체성 정치의 여러 가지 양상이 전개된다. 폐쇄적인 집단의 형성, 함께 즐기는 오락(娛樂), 정치를 오락으로 만들기이다.

집단 특유의 사고방식, 행동 양태의 특성등을 공유하는 정체성 그룹은 정서 공동체다. 그룹에 소속된 구성원은 안정감을 찾고 그룹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미디어 시대는 정체성 그룹을 더욱 단일하게 유지하게 하고 더욱 폐쇄적으로 만든다.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된 정보에만 노출되고 선택된 취향으로만 인도된다. 같은 채널에 의존하고 그 채널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정체성 그룹은 동일한 맥락의 정보에 의존하는 정보 공동체다. 하나의 창을 통해서만 제한된 세상을 바라보는데 그 창은 그들만의 게토의 입구이면서 바깥 세계와 차단시키는 굳게 단힌 문이다.

정체성 그룹이 동일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공통의 오락을 통해서다. 정체성의 체험은 다양한 형태의 작은 무대위의 여러 방식의 공연으로 나타난다. 정체성 공동체의 대화나 만남등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모든 행동은 공연과 같이 연출된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는 선과 악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에 반하여 역사의 배후에 있는 천사와 악마가 등장하기에 누가 악한지를 알 수 있고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희생양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인 선의 승리를 분명히 보장한다. 정체성 그룹은 세상을 단순 명확하게 설명하는 짧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야기 공동체다. 빨갱이와 토착왜구 만이 있는 세상은 명쾌하다. 정체성 그룹은 공연을 통해서 동일성을 현실적으로 마음껏 체험하게 하기에 공화국의 국민 정체성을 넘어서는 정체성을 제공한다.

공연이 주는 감동을 통해서 관객은 팬이 되고 팬은 무대에 선 셀럽과 함께 한다. 셀럽은 팬을 대신하는 아바타로서 무대를 통한 팬의 자기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무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으며, 심지어 이야기를 바꿀 권능이 있는 전능한 팬은 셀럽의 주인이다. 주인과 종의 지위의 역전이 팬덤 현상을 애완견 기르기로 표현하게 한다. 셀럽은 투자되고 자기와 동일시되는 자기 만족의 대상물이다. 정체성 그룹의 무대가 정치가 될 때에 정치적 팬덤 현상이 전개된다. 지지하는 정치인을 셀럽으로 추앙하고 정치인에게 자기를 투사하면서 그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구현하려고 한다. 정체성 그룹은 추종관계의 정치 공동체다. 정치인은 셀럽이지만 팬에 의해서 길러지는 애완견과 같다. 애완 정치의 시대에 정치는 더 이상 권위와 질서의 문제가 아니며 취향의 성취라는 오락의 문제가 된다.

정치가 오락이 되면 정치는 더 이상 권력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타인에게는 도사견이 주인에게는 애완견인데, 날뛰는 도사견을 제어하는 정당 행위를 그 주인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애완정치에 이르면 정치를 정치되게 하는 견제와 균형 장치가 작동하지 못한다. 견제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거나 자기 정체성의 훼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애완견은 주인의 주인이 된다. 노예를 부리는 사회는 결국은 주인을 노예의 정체성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정치의 오락화, 정치적 팬덤 현상, 애완정치에 이르면 주권자가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고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권력이 탄생한다. 정체성을 구현한다는 정체성 정치의 이상이라는 연못에 정치는 잠겨버리고 민주정은 사라진다. 대중독재가 이러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정체성 정치가 정치를 소멸시키면 정체성 전쟁이 이어진다. 비판을 넘어서 상대방을 빨갱이, 토착왜구, 살인자라고 함은 논쟁이 아니라 선전 포고다. 선전포고의 상황에서 전쟁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정체성 정치를 떨쳐 버려야 한다. 정치적 팬덤 현상, 애완 정치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방송을 꺼버리고, 같은 소리만 듣게되는 네크워크와 결별해야 겠다. 애완견의 무대를 뒤로 하고 주인이 현실의 세상으로 나와서 주인들끼리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언제까지나 공연이 계속 될 수 없다. 공연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전 포고가 나오는 상황에서 정체성 정치가 만든 무대에서 물러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공연장에서 떠날 때에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가 초래한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의 상실이다. 정체성 구현을 위해서 만들어진 지역별, 종족별, 그룹별 등등의 각 분열층의 이야기는 인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보편적인 메시지와 충돌한다. 개인은 보편적 메시지에 의하고 민주정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국가를 건설하였다, 정체성 그룹으로 분할되고 개인 단위까지 개별화되는 정체성의 분열은 민주정의 발전 과정이기도 하다. 정체성 정치는 개인의 궁극적 성취를 약속하지만 제한받지 않는 권력을 만듦으로써 개인을 구속하고 정치를 없앤다. 민주정의 실패는 민주정의 성취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보편적 메시지는 대화와 협력의 필요를 말하고 포기와 양보 및 절제를 권유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기 희생을 말하기도 한다. 정치는 인간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데 그 요구에 따를 때에 국가가 건설될 수 있다. 로마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던 키케로는 “국가를 세우거나 세워진 국가를 유지하는 것보다 인간의 덕이 신의 의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란 없다."고 말했다.

정체성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적 실현을 약속하지만 실현 가능성의 터전이 되어야 하는 모든 근거와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에 이른다. 정체성 정치는 오락의 정치, 애완정치에 이르러서는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서 정체성의 출발점인 개인을 파괴한다. 정체성 정치가 만든 진영은 그 무대가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듯한 공연으로 꾸며져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가두고 현실을 가리우는 감옥이다. 전쟁이 전개되기 전에 적어도 무대에서 내려와 그 공연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정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