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보수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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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3.26 08:52:06
  • 최종수정 2018.03.2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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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를 읽으며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한 메이저 신문의 주말판에 연극인 손숙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미투의 가해자가 유독 좌파에 많은 이유를 묻는 기자 질문에 손숙이 “성 문제에 좌우가 어디 있겠어요?”라고 대답하자 기자는, 아마도 ‘여성 문제에 진보적인 줄 믿었다 발등 찍혔다는 배신감, 우파 못지않게 위선적이고 부도덕하다는 실망감...’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 분석했다. 우파 못지않게 위선적이고 부도덕하다? 우파는 그럼 당연히 부도덕하고 위선적이란 말인가? 성추행을 저지른 건 좌파들인데 굳이 상관없는 우파를 슬쩍 끌어 들여, 마치 위선과 부도덕성이 우파의 본질인 듯 규정 하고 있다.

몇 일후 같은 신문의 한 기자는 조찬 회동을 가장 많이 하는 집단이 여당이고, 청와대 근처와 신촌에서도 비슷한 모임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어서, 진보 측 인사들은 늘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행간에는 ‘진보’의 학구열에 대한 존경 어린 애정이 듬뿍 배어 있었다. 글의 말미에서 그는 ‘우파 중에는 누가 시대를 관통하는 담론을 만들고 있나?’라고 고마운 걱정을 잊지 않았다. 문제는 양대 진영에 대한 명칭의 비대칭성이다. 우파와 상반되는 단어는 좌파 아닌가? 그런데 좌파라는 말 대신 진보라는 말을 씀으로써 그 집단에 활기와 역동성의 이미지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나라 모든 사회에는 대립적인 정치 성향을 띤 우파와 좌파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그냥 우파(droite)와 좌파(gauche)로 불린다. 우파 안에 공화당, 국민전선 등이 있고, 좌파 안에는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 등이 있다. 마크롱이 새로 만든 중도파 정당의 이름은 ‘전진하는 공화국’(La République En Marche!)이다. 미국에서는 그냥 우파(right)·좌파(left)라고 하거나, 아니면 보수(conservative) 혹은 리버럴(liberal)이라고 한다. 우파 혹은 보수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좌파 혹은 리버럴은 민주당을 지지한다. ‘리버럴’이라는 미국 용어와 우리나라 용어에 약간의 불일치가 있어 혼선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다. 한국의 젊은 보수들이 내세우는 이념이 미제스나 하예크 등 경제학자들의 자유주의 이론인데, 미국 사회에서 리버럴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좌파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어느 선진국도 진보라는 말을 좌파의 명칭으로 쓰는 나라는 없다. 지난 수 십 년 간 우리 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진보라는 신선한 이름을 붙여 이미지를 조작하였다.

보수를 타자화(他者化)한 한국의 좌파

한국의 좌파는 꾸준히 보수를 대상화(對象化), 타자화(他者化)하여 완전히 인식의 장에서 배제해 버렸다. 대상화란 무엇인가?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는 ‘나’와 ‘나 밖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나는, 나 아닌, 내 밖의 대상을 의식할 때 언제나 그것을 대상(object)으로 의식한다. 대상이란 ‘상대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원적으로 ‘사물’ 혹은 ‘물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을 대상화 한다는 것은 그를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본다는 뜻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 옆에 서 있는 어떤 남자는 내게 있어서 버스 승강장의 기둥이나 다름없다. 친해지기 전의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우선 대상, 즉 사물이다. 비록 그에게도 나와 비슷한 감정, 고매한 인격, 깊은 영혼이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그를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의 감정, 영혼, 인격을 존중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채 그를 한갓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이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타자(the Other)이다. 그러나 그가 나와 친하게 되고, 나와 비슷한 감정,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면 나는 그와 동질감을 느끼며, 그와 나는 합쳐져 우리가 된다. 이렇게 ‘우리’가 된 집단 내의 우리 모두는 서로 비슷한 동일자(the Same)이다. 그리고 우리 밖의,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타자이다. 그 타자는 우리에 의해 따돌림 받고, 우리 집단에서 배제된다. 인류 사회의 모든 역사는 한 사회의 주류가 자기 사회의 타자를 배제하는 다양한 양태의 역사이다. 한 집단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통한 상징화 작업이 필수적이다.

한국의 좌파는 ‘늙음’과 ‘무식함’이라는 키워드로 보수 우파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틀딱’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보수를 희화화했고, ‘이념이라고는 고작 반공 이데올로기뿐인 늙은 아스팔트 보수’라는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자연법칙 상 늙음은 추한 것, 활기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다면 늙음과 짝을 이룬 보수는 자연스럽게 모든 젊음, 아름다움, 활기와 상극이 된다. 젊음과 보수는 완전히 모순적 개념이 되어, 젊은이의 보수 진입이 아예 싹에서부터 차단된다. 결국 우파 젊은이들은 한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동년배들 앞에서 자신의 성향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보수는 무식하다?

정권 교체 이후 모든 언론의 장에서는 보수의 몰락이 시간문제라느니, 40대 이하에선 아예 경멸의 대상이라느니, 10~20년 후까지 당분간 보수에는 미래가 없다느니 등의 조롱이 봇물을 이루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의기양양하게 보수를 불태워야 한다느니, 보수를 궤멸시켜 씨를 말려야 한다느니, 겁도 없이 말하고 나섰다.

보수의 무식함을 질타하는 대열에는 젊은 보수들도 가담하였다. 늙은 보수는 87체제 이후 아무런 이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고작 반공 구호에만 매달려 있다가 탄핵으로 최종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이라면 모르겠으나, 아예 보수 세력 전체가 무식해서 몰락했다는 이야기는 묵묵히 자기 생활을 성실하게 해오던 기층 보수 세력들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매일매일 가족의 안락과 소소한 기쁨에 만족하며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했고, 이 무심한 일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 체제를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연스럽게 반(反) 북한, 반(反) 공산주의 사상이 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조롱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나라건 보통 사람들은 그저 별 생각 없이 순리대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미덕이기도 하다. 자신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힘들게 공부하며 살아가는 국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갑자기 그 동안 왜 무식하게 살았냐고 질타하는 것은 그들에게 이중의 죄의식을 심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기는 역사적으로 보수란 원래, 기존 제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대두되었을 때 그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된 논리였다. 과거의 방식대로, 다시 말해 별 생각 없이 평온하게 보수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출현한 새로운 이념에 놀라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해 낸 이념이 바로 보수 사상이었다.

미국의 보수 이론가 헌팅턴(S. Huntington)의 보수주의 정의도 공산주의가 미국을 위협하던 냉전 시대에 나왔다(Conservatism as an Ideology, 1957). 그는 보수주의란, 기존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 세력이 등장했을 때 그에 대응하기 위해 나오는 ‘상황적 이데올로기’(situational ideology)라고 정의했다. 보수는 그러한 위협 세력이 존재함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세력을 형성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상황에서만 호소력을 지니고 번창할 수 있다고도 했다.

심대한 체제 위협에 대항하는 상황적 이데올로기가 곧 보수주의라는 헌팅턴의 정의는 보수주의의 원천인 에드먼드 버크에게서도 확인된다. 보수주의의 경전이 된 그의 저서『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은 프랑스혁명이 영국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을 감지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버크의 보수주의

익숙한 삶 속에 별 생각 없이 살던 나도 보수주의의 위기라는 경고음 앞에서 새삼스레 관련 책을 뒤적였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보수 사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보수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버크는, 인간은 종교적이고, 인간 본성은 복잡하며, 이성은 허약하다고 했다. 따라서 한 사회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해온 기존 제도와 관념은 지혜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신이 마련한 제도라고 했다. 온 국민이 동일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보수적 가치의 유구한 역사도 갖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기존 제도와 관념은 지혜의 보고이고, 신이 마련한 제도’라는 이야기는 다소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70년 동안 거둔 눈부신 발전은 우리에게 그 짧은 기간이나마 형성된 정신적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윗세대를 존중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단숨에 때려 부수려는 혁신 세력은 이기적 성향과 편협한 시각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버크의 말이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 세력은 당연히 후손에 대한 배려도 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우리 좌파 정부의 단견적 경제 정책을 떠올렸다.

우파와 좌파의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평등의 개념이다. 좌파는 유독 평등을 강조하여 사회 정의를 독점하려 한다. 예상했던 대로 버크는 인간의 불평등을 쿨하게 인정한다. 모든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시민들로 이루어지는 법이어서, 그 중 한 부류가 최상위에 위치해 있기 마련이다. 미용사나 양초공, 또 혹은 더 비천한 많은 직업의 사람들을 물론 함부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성경의 외경(外經)인 ‘집회서’에도 직분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학자가 지혜를 쌓으려면 여가를 가져야 한다. 무릇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현명해진다. 쟁기를 잡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를 모는데 여념이 없고,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농부가 어떻게 현명해 질 수 있으랴?”

재산이야말로 불평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부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과정에는 복합적인 원리가 작동한다. 이렇게 형성된 재산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덜 가진 자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그것을 강탈하도록 유혹하거나, 이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평등하게 만들려는 자들은 오히려 불평등을 더욱 악화하고 쓰라리게 만들 뿐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잔인한 압제자이며, 무자비한 적이라고 버크는 단언한다.

잉여재산의 문제에서도 버크의 현대성은 두드러진다. 모든 번영하는 사회에서는 생산자의 생계를 직접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산물이 생산된다. 다시 말하면 생산자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양 보다 더 많은 재화가 생산된다. 이것이 잉여재산이다. 이 잉여분이 토지 자본가의 소득을 형성한다. 그 소득은 노동하지 않는 재산 소유자에 의해 소비될 것이다. 이 현상이 후대 마르크시스트들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자체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버크는 말한다. 무노동 자체가 노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이 아니라 IT 같은 지적 노동이 고도의 부(富)를 만들어내거나, 기업가의 머릿속 생각이 엄청난 부를 생산하는 현대 산업 환경을 마치 예언하기라도 한 것 같다.

모든 중요한 것이 민중의 여론으로 결정되는 한국 사회에서 민중의 위험성을 말하는 버크의 주장은 2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완전한 민주정은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이라고 했다. 가장 파렴치하므로 동시에 가장 두려움 없는 것이 된다. 민중은 가장 자유로운듯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억압적인 지배를 행사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정치 모리배들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이 절대적 민주정에서는 격렬한 의견 대립이 있을 때마다 시민의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잔인한 압제를 행사한다. 이때 소수파에 대한 탄압은 1인 지배에서 우려될 수 있는 어떤 탄압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더 격렬하게 행해진다고 버크는 말한다. 민중이 자행하는 박해에서 고통을 당하는 개개인들은 다른 어떤 박해에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도 했다. 마치 네티즌의 악플에 고통 받는 우리 사회 선량한 시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하다.

친일파 논란을 그대로 묘사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사람을 그의 선조가 저지른 범죄를 이유로 삼아 징벌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서, 선조의 범죄적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이 계몽된 시대의 철학에 맞는 일인가?라고 그는 개탄한다. 이 시대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소급적 연좌제야말로 우리 사회를 2백 년 전의 과거로 후퇴시키는 퇴행적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역사 문제에 대한 언급도 그대로 우리의 문제와 부합된다. 그는 우선 역사란, 과거 인류의 오류와 약점들이 방대하게 펼쳐져 있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거대한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가 악용될 때 그것은 국가 내부의 한 당파에게 공격용, 방어용 무기들을 제공하는 병기고와도 같다고 했다. 그것은 불화와 적의를 유지하거나 부활시켜, 내전의 격렬함에 기름을 붓는 수단들을 제공한다고도 했다. 역사의 불관용, 교만 그리고 잔인성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구시대의 해로운 원리를 증오한다는 깃발 아래, 실은 자기 당파에 존재하는 가증스러운 패덕들을 허용하고 육성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특징들이 프랑스 혁명가들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악을 너무 많이 증오한 끝에 거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에게 봉사할 의향도, 봉사할 능력도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일반화시켜 말해 보자면, 오류를 찾아내고 드러내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던 사람들은 사회를 개혁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신에는 공정과 선의 원형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기쁨을 얻는 습관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괴하기, 발목잡기에만 몰두하던 우리의 좌파 세력이라고 그들과 다를 것인가. 버크는, 민중은 굴종적이지 않되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야 하고, 고위 공직자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법률은 권위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마침 정부가 새로운 헌법안을 발표한 이 시점에, 버크는 200여 년 저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한 마디를 던진다.

“당신들의 헌법은 깊은 분별력을 지니기에는 너무 많은 시기심이 포함되어 있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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