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근찬 대표] 피터 드러커의 ‘기능하는 사회’와 대기업 그리고 전체주의의 위험
[기고/문근찬 대표] 피터 드러커의 ‘기능하는 사회’와 대기업 그리고 전체주의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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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주의는 이성주의의 실패로부터 자라난다.

역사적으로 근세 이전의 왕정은 절대군주의 시대였다. 1776년 미국 혁명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 체제를 형성했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거쳐 다시 나폴레옹의 왕정으로 복귀했다. 흔히 개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주의 전통이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프랑스 혁명은 오래된 건축물의 잔해를 모두 날려버린 폭탄이었고, 왕정 시대의 전통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사건이었다. 루소의 철학을 내세운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은 전체주의로 이어졌을 뿐 19세기에 견고해진 자유 체제에 기여하지 않았다. 루소에서 히틀러까지의 연장선 속의 로베스피에르, 마르크스, 스탈린을 잇는 전체주의 폭정 모두는 그들 시대의 이성주의(주: 합리주의 또는 이성주의적 자유주의)로부터 혹은 그 실패를 딛고 자라났다.

전체주의 폭정이 도래하는 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이성주의적 자유주의의 정치적 무능으로 사회의 기능이 작동되지 않는 시기를 겪는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발견으로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했지만 정치적인 조직화나 제도화에는 철저히 무능했다. 이런 무능을 단숨에 뒤집기 위해서는 反 이성적 신앙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다. 일반의지와 같은 인간 이성의 절대화는 합리적 설명이 필요 없는 일종의 선언이며, 어떤 철학적 근거보다는 오직 대중에게 어필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절대주의 직전에는 이런 선동의 상징이 등장한다.

2) 자유 체제는 ‘기능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반면 미국 혁명은 기독교 전통의 절제가 바탕이 되었고, 이후 19세기 영국의 구 휘그당 자유주의 전통이 미국에 계승되어 미국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 건국 시 미국 자유 체제의 특징이라면, 각 주와 카운티의 자치가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점, 연방의 정치 권력이 균형과 조정의 권력분립 원리에 바탕을 둔 헌법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군소정당의 난립이 아니라 양당 체제가 공고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 권력의 작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정치 권력의 영역과 사회 권력의 영역으로서 대기업 경영의 영역이 상호 독립된 영역으로 존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통은 중세 이래 왕의 세속 권력과 교회의 사회적 권력을 서로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중하던 영국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보수주의 反혁명적 전통이다.

자유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려면 사회는 우선 '기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피터 드러커에 의하면, 기능하는 사회는 사회 구성원에게 역할을 주어야 하며, 동시에 사회의 결정적 권력이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오늘날은 산업 사회이므로, 기능하는 사회가 되려면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사회가 잘 기능해야 한다. 이는 정치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경제계가 자유로운 자율적 영역으로 지켜져야 함을 뜻하며, 혁명이 아니라 질서 속에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정치 권력의 힘이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의 가장 실질적인 의미다.

3) 한국 자유 체제의 건설

한국은 해방 후 3년의 미 군정을 거쳐 자유 체제의 국가를 수립했는데, 운 좋게도 신생국이면서도 영미식의 자유 국가를 세운 예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가 단군 이래 최고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체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참화를 가져왔지만, 한국이라는 신생국을 자유 체제로 건국하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자유 체제가 무엇인지 상세히 알지는 못하면서, 막연하게 사회주의 이념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의 행태를 직접 겪으면서, “이건 아니구나.”라는 자각 속에, 이북의 동포들이 대거 남쪽으로 탈출했다. 이런 실존적인 경험을 거쳐 한국은 신생국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유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한국이 추구했던 자유 체제는 비록 한국인의 몸속에 체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영국, 미국식의 자유 체제로서, 이성주의 전통에 젖어 있던 유럽 대륙의 나라들보다도 앞선 체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적 도약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 체제를 적용한 결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대기업의 활약에 기인한 것이다. 그 당시 정치 권력은 어떻게 하면 대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에 필요한 인프라를 깔아주고, 성과가 좋은 기업에는 수출탑 등 인센티브로 독려하고 동기부여 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여겼다. 이는 오늘날 정치 권력이 대기업을 미워하는 것과는 너무 다른 풍토였는데, 이는 산업 시대를 자유 체제로 열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던 것은 지금이 아니라 바로 그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4) ’기능하는 사회’의 퇴조

산업 사회에서 그 주역인 대기업을 부정하는 이 현상은 한국 사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즉 피터 드러커가 말한 ‘기능하는 사회’가 퇴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나중에 역사가들이 평가하겠지만, 아마도 이른바 87 체제라는 개헌에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유 체제의 전범이 된 미국은 헌법이 잡다한 틀에 갇히는 것을 염려하여, 시민의 기본권이 무엇인지에 관한 권리장전조차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87 체제 헌법에는 수많은 잡다한 조항에 더하여, 농어업, 중소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들어있고, 이는 자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각 개인의 자유로운 직업 전환의 자율과 성장 가능성을 ‘가부장적 보살핌’을 내세워 막고 있다.

특히 자유 체제를 위협하는 실마리가 된 조항이 119조 2항이다. 원래 보완적으로 들어와 있는 이른바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족보에도 없는 개념인데, 이 단어가 전체를 흔들어 경제마저 대중의 뜻대로 해야 한다는 풍조가 일면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제 기능을 잃게 하는 독소가 되고 있다. (주: 헌법 제119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한국에 反 대기업 정서가 만연했고, 그때부터 대기업들이 새로운 투자를 하려면 한국 땅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간 대기업들은 점차 본색을 드러내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횡포로, 최악의 경우는 수조 원에 달하는 투자액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손 털고 나와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는 이성주의 만능의 시대였다. 국민교육헌장도 조선총독부 건물도 모두 과거의 유물이라며 해체되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만능으로 여기는 몇 가지 신조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2010년경에는 한국 땅에 ‘정의’라는 단어가 온 누리를 점령했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미국 철학 교수의 강의 노트를 정리한 책이, 미국 현지에서는 10만 부도 안 팔렸는데, 한국에서 무려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그 재미 없는 책을 그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사람에게 어필했다는 사회적 현상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란 대체로 분배 정의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 사회가 87 체제 이후 10여 년 만에 사람들의 정서 면에서 자신의 책임과 자조를 중시하는 자유 체제로부터 국가의 시혜적 보살핌을 바라는 무차별적 복지 사회주의로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사실 자유 체제를 지키는 데 필요한 정의란 분배 정의가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 규칙’으로서의 정의, 즉 자연법적인 전통에서 유추되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안 하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기능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를 세우는 전제 조건이다. 반대로 ‘기능을 못 하는 사회’는 사회 구성원에게 제 역할을 찾아주지 못하는 사회이고, 사회는 아무 사회적 목적과 가치를 갖지 못하는 부유하는 대중(mass)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대중이 커지면 바로 전체주의 혁명의 촉매가 된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反 대기업 정서 속에 건국 후 30여 년을 가꾸어 온 자유 체제의 전제 조건인 기능하는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징후들을 겪고 있다.

5) 전체주의를 막는 길

우리 사회가 ‘기능하는 사회’에서 이탈하면서, 결국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기존의 가치와 관행을 단절하고, 자유와 법치가 없는 나라, 도덕이 사라지고 홉스적 투쟁만이 있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기에 루소의 ‘일반 의지’라면 그 어떤 합리적 설명이 불필요했듯이, 오늘날은 네 편이냐 내 편이냐의 ‘진영’이 모든 사실과 선악을 덮어버리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몇 걸음 더 내디딘다면 전체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을 조금 더 우상화 하고, 정권의 ‘숭고한 뜻’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계도’할 경찰력을 조금 더 강화하기만 하면 전체주의는 완성된다.

지금 이런 흐름을 막을 가능성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첫 번째 과제는, 자유 체제에서 멀어진 젊은 층에 진정한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의 지원금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할 지위를 찾아주는 일, 즉 고용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대기업 자율성의 훼손, 그리고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는 노조가 있은 한 이는 쉽지 않은 과제다. 그렇다고 현재 정부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기업의 영역이 ‘기능하는 사회’를 만드는 핵심 영역이고, 사회가 자유 체제로 남아 있으려면 이 영역이 자율적으로 영위되어야 함을 쉽게 수긍할 것 같지 않다. OECD 국가 중 단연 최고인 65%에 달하는 대기업 재벌의 지분상속세라는 것이 기업을 ‘계속하는 실체(going concern)’로서 영위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는 제도라는 점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의회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에게는 조선조의 사대부 같은 이미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로 대기업을 보는 전근대적, 전산업사회적 성향이 엿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능하는 사회, 나아가 자유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진정한 자유 보수주의적 정치 이념이 무엇인지 아는 정치 세력이 부상해야 한다.

둘째로 한국의 자유 체제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시민들은 건실한 자치(self-government)의 정신을 키울 필요가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시민 단체들이 있지만, 이들 중에는 정부 지원금을 받는 일종의 관변 시민단체들이 많다. 자유를 지키는 것이 공짜가 아니라는 자유 보수주의적 마인드를 갖는 자치적 단체가 많이 생겨나야 한다. 우리는 누군인지도 모르는 채 지자체장 선거를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커뮤니티의 자치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편이다. 진정한 자원봉사단이나 커뮤니티 활동 같은 것이 자라나야만 진정한 자유 체제의 전통을 만들 수 있다.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서 정치에 뜻을 둔 젊은 인재를 발굴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기능하는 사회, 나아가 자유 체제를 위해 공헌할 사람인지 검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리더십을 검증받은 인재가 키워지고 중앙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 인재는 이성 만능주의적 인재보다는, 우리가 쌓아 온 전통의 의미를 알고, 거짓말을 하지 많으며,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연속과 변화의 균형을 추구할 줄 아는 인재, 그러면서도 늘 자유를 지키는 일이 소중한 것을 아는 反전체주의적 인재였으면 한다.

문근찬 자유경영원 대표, 전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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