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돌격나팔 소릴 듣고 연해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간도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우리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을 향해 목숨 걸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승전보의 뚜껑을 열고 보니 전과는 너무나 심하게 과장되었고(봉오동·청산리), 4,000여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여 시체를 얼음구덩이에 처박은 끔찍한 학살 만행은 은폐되어 있었다(니콜라예프스크).

기(起) : 항일무장투쟁의 3대 승첩, 왜 1920년에 일어났을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만주 북간도에서는 우리의 용맹한 항일 전사들이 5,000명의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청산리 일대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쳐 압승을 거두었다고 알려진 청산리대첩의 웅대한 승전보가 울렸다.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우리 무장 독립군이 기록한 항일무장투쟁의 3대 승첩으로 꼽히는 것이 니콜라예프스크(니항·尼港) 탈환전투(1920년 3월), 봉오동전투(1920년 6월),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다. 일정을 추적해 보면 1920년에 3대 승첩이 연이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필 1920년에 3대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국화꽃을 한 송이 피우기 위해서는 소쩍새가 봄부터 울어야 하는 법. 그것은 3·1운동 덕이다. 3·1운동 과정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비폭력·무저항, 국제회의에 대표단 파견을 통한 외교독립 실현 방략을 추구했다. 이 노선은 일본의 강력한 진압,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의 한국 독립에 대한 무관심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미몽에서 깨어난 한국인들은 외교독립론에 대한 기대를 환멸로 치환한다. 자연스럽게 1919년 후반기부터 입이 아닌 주먹, 즉 무력으로 일본을 제압하고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독립한다는 독립전쟁론이 등장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30여 개의 항일 군사단체가 조직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독립전쟁론의 원조는 임시정부 실세였던 국무총리 이동휘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국무원 포고 1호’와 ‘군무부 포고 1호’(1920년 2월 14일)를 통해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다.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 명의로 선포된 군무부 포고 1호는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철(鐵)과 혈(血)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왔다”면서 간도 청년들에게 광복군에 지원하라고 외쳤다.

이어 만주 한국인 사회에 징병령을 발포했다. 연해주·북간도·서간도에 동로(東路)·북로(北路)·서로(西路) 군관구를 설정하고 각 군관구 사령관도 임명되었다(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14, 183쪽).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선전포고에 피가 끓어오른 서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들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져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값진 성과가 1920년 6월과 10월, ‘독립전쟁의 제1회 회전’이라 불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값진 승리였다.

 

1920년 2월 14일,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 명의로 발표된 '군무부 포고 1호'. 이 포고를 통해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1920년 2월 14일,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 명의로 발표된 '군무부 포고 1호'. 이 포고를 통해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승(承) : 나콜라예프스크 승전보? 알고 보니 끔찍한 학살 만행

1920년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기 3개월 전,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 사상 3대 승첩의 하나로 꼽히는 니콜라예프스크 탈환전투가 벌어졌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후폭퐁으로 소비에트러시아를 지지하는 적군과 자유러시아를 갈망하는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연합군은 공산혁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하여 자유러시아를 위해 투쟁하는 백군을 도왔다. 일본군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7만여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니콜라예프스크는 1854년부터 1860년까지 러시아 태평양함대 기지로 사용됐던 항구 도시로서 태평양 연안의 어업 중심지였다. 인구는 1만 2,000여 명이었는데 해상 교통이 편리하여 1908년 일본 영사관이 개설되었고 일본인 상주 인구는 500여 명, 한인들도 다수 진출해 있었다. 이 항구도시를 일본군 제14사단 산하 2개 중대 병력 370여 명, 러시아 백군 30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1920년 1월 23일 2,000명이 넘는 규모의 러시아·한국·중국인 빨치산 연합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 탈환을 위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적군을 지지하는 이 빨치산 부대는 제정러시아 포병장교 출신인 야코프 이바노비치 트랴피친(Triapitsyn)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이 전투에 한인들로 구성된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사할린의용대라고도 불림)가 일본군과 백군 연합군을 공격하는 핵심 돌격대가 되어 최일선에서 맹활약했다. 한인 빨치산 병력은 400여 명(다른 자료에는 700~750명), 지휘관은 한인학교 교사 출신 박일리야였다.

전투는 1923년 1월 23일 시작되었다.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2월 28일 빨치산 부대의 행동에 대해 중립을 약속하고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도시로 입성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군과는 충돌하지 않고 백군 정부 관리·장교·자본가 등 400여 명을 체포하여 총검으로 찔러 살해한 후 시체를 아무르강 얼음 구멍에 처넣었다.

백군 세력을 전원 참살한 트랴피친은 3월 하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며 무기와 탄약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이 이를 거부하여 빨치산 부대와 일본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5일 밤낮에 걸친 격렬한 시가전 끝에 현지에 거주하던 일본 영사 이시다(石田) 부부를 비롯하여 미야케(三宅) 해군 소좌, 일본군 수비대장이 전사했고 영사관 건물은 불타 재로 변했다. 시가지에 있던 일본 상점들도 불탔으며,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 130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수류탄 공격으로 발목에 부상을 당한 트랴피친은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빨치산 부대는 일본인 집을 수색하여 전 가족을 몰살했다. 이 과정에서 한인들로 구성된 니항 부대가 앞장서서 일본인 학살의 전위부대 역할을 했다.

니콜라예프스크 위치. 바로 이 도시에서 한인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가 1920년 봄, 러시아 민간인 4,000여 명, 일본군 포로 및 일본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하는 니항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본군의 연해주 4월 참변이라는 대보복으로 연해주 일대의 한인들 수천 명이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위치. 바로 이 도시에서 한인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가 1920년 봄, 러시아 민간인 4,000여 명, 일본군 포로 및 일본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하는 니항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본군의 연해주 4월 참변이라는 대보복으로 연해주 일대의 한인들 수천 명이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철수하면서 도시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했는데, 갈 곳 없는 주민들이 이동을 거부하고 도시에 남았다. 트랴피친 부대는 이주를 거부한 러시아 주민들을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학살했다. 시가전 과정에서 살아남아 감옥에 가두었던 일본 여성과 아이들, 부상자 130명도 총검으로 살해한 후 시체를 아무르강 얼음구덩이에 버렸다.

시가지와 마을은 모두 불태워지고 파괴됐다. 한인들이 거주했던 마을도 폐허로 변했다. 니콜라예프스크에 거주하던 러시아 주민을 비롯한 4,0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만행에 한인 빨치산부대가 선두에 섰던 관계로 일본군의 보복을 자초하게 된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적군 부대의 무장 해제는 물론,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피해자 중에는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던 한인 2,500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연해주 4월 참변이다.

4월 4일 밤, 일본군은 한인 민족운동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수색에서 한인 민족운동가 54명, 니콜스크우스리스크에서 76명을 체포했다. 러시아 지역의 유력한 한인 지도자이자 상하이 임정 재무총장 최재형도 체포되어 김이직·엄주필·황경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반병률, ‘4월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역사문화연구』26집, 2007, 255~284쪽).

일본군의 신한촌 토벌 모습을 본 러시아인 목격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있는 한국인 마을(신한촌)은 놀랄만한 약탈을 당했다. 흉폭한 일본군 병사들은 한국인들을 개머리판으로 패면서 마을에서 내몰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는 신음과 통곡으로 가득 찼다. 피에 절은 긴 옷을 입은 채 반쯤 죽도록 얻어맞은 그들은 일본 호송병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지하실과 감옥은 체포자들로 만원이었다. 그때 당시 사형집행인의 손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죽었는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전했다(김승화 저·정태수 옮김, 『소련한족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95쪽).

연해주 4월 참변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한인 무장 항일조직은 물론, 한인 거주지까지 초토화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 이후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운동은 끝났다.

전(轉) : 너무나 심하게 과장된 봉오동·청산리 전과

두만강에서 만주 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봉오동은 고려령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 지대다. 이곳에는 한인 민가 100여 호가 살고 있는 독립군 근거지로서 최진동 가족이 살고 있었다.

니콜라예프스크 전투가 벌어진 지 3개월 후인 1920년 6월 7일, 조선군 제19사단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를 대장으로 한 700명의 추격대가 두만강을 건넜다. 일본군 정규군 부대가 봉오동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 사령관은 봉오동 골짜기에 병력을 매복하고 적을 유인했다.

이날 대한북로군독군부를 주축으로 한 북간도 독립군 연합세력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고, 기관총 3정, 소총 160정을 노획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4)』, 시사문화사, 1988, 99쪽).

봉오동 전투는 한인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 대대급 부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들었다. 두만강 일대를 넘나들며 게릴라전을 벌이는 한인 무장 세력에게 일격을 당한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중국의 마적들을 사주하여 간도 훈춘현의 민가와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사주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군 제19사단을 주축으로 하고 다른 부대에서 차출된 총 2만 5,000명의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출병시켰다.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로 유인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 부대를 섬멸했다. 이어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완루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400여 명을 사살하거나 중경상을 입혔다. 이후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고동하 등지에서 연이어 격전이 벌어져 한인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일대에서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6일간의 전투는 두만강을 건너 간도까지 추격해 온 일본군 정규군 5,000여 명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1,600여 명, 홍범도의 연합군 1,400여 명이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고, 독립군은 사상자 150명의 피해를 입은 대승이었다(황민호·홍선표,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독립기념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22쪽).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우리 독립군 단독으로 일본군과 싸운 항일 무장투쟁 사상 최대의 성과였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전투의 상대방이었던 일본 측 자료는 한국의 사료 및 연구결과와는 케게 다르다. 일본방위대 교수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는 1985년 발간한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 연구(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韓國獨立運動の硏究)』에서 봉오동에서 일본군이 승리했으며, 청산리 전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저서에서 사사키 교수는 야스카와 추격대가 봉오동에 진입하여 독립군 24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는 전과를 기록했으며, 일본군 피해는 단지 전사자 1명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청산리의 경우 일본군은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사키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야스카와 지로 소좌의 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 부근 전투상보’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피해는 병사 1명 전사, 2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주차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의 1920년 6월 9일자 전보(朝特43호)에도 “아군 병졸 1명 전사, 작들의 손해는 불상하나 24구의 시체와 다수의 부상자 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내에서도 두 전투의 전과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신효승 연구위원은 기존의 사료를 꼼꼼히 검토한 결과 청산리 전투의 전과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사키 교수처럼 청산리전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는 주장도 문제지만, 청산리 전역에 대한 정확한 전과의 전달보다 독립군의 건재, 독립의지의 표명을 위해 불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청산리대첩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비판했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운영기획실장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측은 전과를 너무 확대 과장했고, 일본 측은 패전을 감추기 위해 자신들의 피해를 너무 축소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자료를 토대로 봉오동 전투에선 일본군 100여 명 살상, 청산리 전투에선 일본군 400~500여 명이 살상되었으며, 우리 독립군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156쪽).

신효승·장세윤 두 학자의 연구 결과는 봉오동·청산리가 더 이상 한국 독립군의 압승·대승·대첩·승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근거다. 이처럼 만주에서 우리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크게 과장되어 있다는 주장은 실제로 항일 무장전투를 수행했던 당사자인 김학철 씨로부터 제기되었다.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이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밝힌 김학철 씨의 증언이 담겨 있는 "김학철평전". 조선의용대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잃은 김학철 씨는 청산리, 봉오동의 전투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이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밝힌 김학철 씨의 증언이 담겨 있는 "김학철평전". 조선의용대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잃은 김학철 씨는 청산리, 봉오동의 전투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다리를 한쪽 잃고 포로가 된 경험이 있는 김학철 씨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다. 어쩌다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이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김호웅·김해양 편저, 『김학철평전』, 실천문학사, 2007, ***)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봉오동·청산리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일격을 당한 일본군은 간도 일대의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여 독립군 거점을 뿌리 뽑기로 작정했다. 일본군은 1920년 10~11월 한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북간도의 훈춘·왕칭·화룡·연길 등 8개현 일대를 토벌 공격했다. 그들은 한인 가옥을 불태웠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이 경신(庚申)참변이다.

10월 30일, 일본군이 용정촌 기독교인 마을 장암동을 포위했다. 일본군은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불길에 휩싸인 교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칼로 살해했다. 한국의 제암리 학살사건과 거의 비슷한 만주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롱징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S H. Martin,), 캐나다 선교사 푸트(Foote)의 현장 조사를 통해 그 만행이 알려졌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8개현의 한인들 중 피살 3,469명, 체포 170명, 부녀 강간 71명, 민가 3,209호, 학교 36개교, 교회 14개소가 불탔으며, 양곡 손실 5만 4,045석이었다(<독립신문> 1920년 12월 18일자). 일본군의 만행을 목격한 서양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했다.

경신참변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지역은 초토화되어 만주를 무대로 하는 한국인의 항일무장투쟁은 거의 올스톱 상태가 되었다. 경신참변 당시 서·북간도지역 한인사회가 일본군에게 받은 피해는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대가치고는 너무 엄청난 희생이었다.

결(結) : 대체 항일무장투쟁 ‘3대 승첩’으로 무엇을 얻었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 지위를 얻게 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세계 5대 열강, 세계 3대 군사강국으로 평가 받았다. 외교관을 퇴직하고 와세다대학에서 국제법을 가르친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는 전후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나라는 1894~1895년의 일청(日淸) 전역, 1899년의 의화단 사건을 거쳐 그 실력이 세계에서 인정되었고, 1902년에는 영일동맹이 만들어지고 동양의 치란(治亂)에 대한 중요한 발언권을 획득했다. 나아가 1904~1905년의 대로(對露) 전역의 결과 세계 최대강국의 하나로 헤아려지게 되었다. 열국은 공히 우리나라를 대국의 반열에 더해 그 결과 구미의 7대국은 세계의 8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 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개국을 대국의 지위에서 탈락시켰다. 그래서 남은 5대국이 세계의 웅국(雄國)으로서 새롭게 국제정국에 돌출했고, 국제연맹도 이 새로운 5대국을 주축으로 운용되게 되었다. (…) 최근 별도로 세계의 3대국이라는 말도 있다. 즉 프랑스, 이탈리아를 빼고 일본·영국·미국의 3개국을 일컫는 말이다.”

1919년 1월부터 6월 말까지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북미 대륙과 극동지역이라는 변방에 머물던 미국과 일본이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린 무대였다. 전후 탄생한 국제연맹에서 일본은 당당히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3대 군사강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우리의 항일무장 독립군 실태는 어땠을까? 중국 구이저우(貴州)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했던 김홍일은 항일 독립군에 합류하기 위해 간도의 안도(安圖)로 가서 1921년 3월 29일 군비단 부대와 만났다. 그가 본 우리의 무장 독립군 부대인 군비단 모습은 어땠을까? 김홍일 자서전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내가 찾아갔던 군비단 부대엔 겨우 장교라곤 사령관인 임표 씨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조경호, 이렇게 단 두 사람뿐이었다. 장병의 수도 총 255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단 50명만이 독립군 출신이라 전쟁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 대원은 그냥 함경도 개마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 산간벽지인 삼수, 갑산에서 모병하여 온 신병들인 탓으로 전쟁 경험은 물론 제대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부대의 장비라는 것도 겨우 일제 소총 21정에다 권총 3자루, 수류탄이 두어개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맨주먹만의 부대였다. 그리고 복장 또한 다 낡은 한복 차림 그대로여서 초라하기 짝이 없어 한심한 상태였다.’(김홍일,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89쪽.)

우리 항일 무장 독립군은 ‘조국광복’의 불타는 의지, 뜨거운 전의를 십분 인정한다 해도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지 못한 민병 수준이었다. 일부 부대는 약탈로 겨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무보급 상태였다. 이처럼 가혹한 현실에 처해 있었으니 독립운동 연구가 신용하 교수도 “국권을 빼앗긴 이상 패하여 죽더라도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고 결의한 사람들의 항일 무장투쟁은 승패를 초월하여 봉기한 것”, “이 운동은 패전을 각오한 것이었으나 가장 강렬한 애국주의 전통을 수립했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은식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선비들은 전투를 배우지 않았으며, 농민들은 병기가 없어도 그들은 순국할 뜻을 결연히 세우고 맨주먹으로 칼날에 무릅써 맞서서 뼈는 들판에 드러나고 뇌와 살갗은 창끝에 발라지면서도 조금도 후회하는 뜻이 없었다”고 써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우리 무장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전투를 통해 일시적으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수만 명이 동원된 대공세를 견딜 재간은 없었다. 그 결과 독립군은 이동휘와 한국사회당의 선전에 따라 소련 혁명세력의 후원과 독립군 단일지도부 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표현은 ‘북상 이동’이었지만 사실은 쫓겨 간 것이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돌격나팔 소릴 듣고 연해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간도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우리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을 향해 목숨 걸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승전보의 뚜껑을 열고 보니 전과는 너무나 심하게 과장되었고(봉오동·청산리), 4,000여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여 시체를 얼음구덩이에 처박은 끔찍한 학살 만행은 은폐되어 있었다(니콜라예프스크).

한국인들의 ‘독립전쟁’이라는 도전에 일본군은 연해주 4월 참변, 경신참변으로 응전했다. 그 결과는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금품을 제공하고(때로는 강제로 뜯기고), 그들을 입히고 먹여 살리고, 휴식처를 제공한 죄밖에 없는 한인들의 끔찍한 학살·강간·폭행·구금으로 인한 간도·연해주 한인 사회 초토화라는 비참한 결과였다.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보급기지였던 한인 마을이 초토화 되었으니 독립군이 어디서 어떻게 활동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 봉오동·청산리와 니콜라예프스크 전투 덕분에 연해주와 간도에서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끝장났다. 이것이 이 나라 국민들이 그토록 종교적 차원에서 숭앙해 마지않는 간도·연해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사족(蛇足) : 한국인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1919년 3·1운동 이후 외교독립론의 파탄, 독립전쟁의 실패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요구했다. 그 새로운 길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세계였다. 대부분의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기울어진 논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한국 독립은 일본 제국주의가 붕괴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 5대 열강, 3대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을 붕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 동맹이 필요하다. 당시 자본주의 열강들은 모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국주의 정책 하에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일본을 붕괴시키고 조선을 독립시켜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시회주의자들이 기댈 곳은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과, 세계무산자 혁명세력뿐이었다. 때마침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 소비에트러시아(소련)가 그들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들은 소련의 후원을 받아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때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한국인들 사이에 일대 유행적 사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의 저자 임경석은 3·1운동을 “한국 사회주의의 어머니”였다고 분석한다.

청산리전투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인들은 항일무장독립투쟁이라는 미몽과 허상, 우상, 과장된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위안부 소녀상을 비롯하여 항일무장투쟁은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우상화되었고,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처럼 과장되거나 거짓된 우상과 종교에 정신이 중독되어 있는 한, 이 나라 국민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