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여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끝난다. 동해 물이 마른다는 것은 지구의 물이 증발해버린다는 뜻이다. 지구의 재령이 46억 년이고 태양이 적색거성의 단계를 밟는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50억 년쯤 후가 된다고 하니 지구는 대략 100억 년이 한계수명이라고 볼 수가 있다. 수명의 중반기에 접어든 현재 시점으로부터 머지않아 지구의 수명은 후반기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태양은 대략 10억 년쯤 후에는 적색거성의 사전 단계로 접어드는데 이때부터 체적이 서서히 팽창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물은 증발하여 20억 년이 지나면 동해는 물론 지구 바다의 물이 말라 바닥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때쯤이면 진화와 퇴화를 거듭한 끝에 끝내는 미생물로 회귀하여 끈적끈적한 열탕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콜로이드집합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백두산은 높이가 2744m로서 풍화작용, 침식작용, 지각작용이 끊임없이 거듭된다고 하더라도 그 높이가 다 닳아 없어지기까지는 어쩌면 그 자체로 지구의 종말이 될지도 모른다. 20억 년 긴 세월. 동해 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기까지 자자손손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욕심이 과하다고나 할까? 이처럼 대한민국을 지구 끝까지 보전하여야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사자 미상, 작곡자 안익태의 애국가다.

애국가의 제작연도는 대략 일제 치하인 1935년경으로 추정된다. 안익태는 이 무렵 ‘한국환상곡’도 거의 연달아 작곡했었는데 단군의 개국을 알리는 서정적인 선율로부터 시작하여 왜적의 침략으로 한때 나라를 잃으나 끝내는 광복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대서사시로 일제강점기에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담겨 있다. 특히 이 음악의 후반부에는 애국가의 선율이 격앙과 고조를 이루어 끝을 맺으면서 우리에게는 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노래하고 세계무대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때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노래했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감격에 겨웠던 순간들이 있다. 특히 ‘대-한사람 대한으로’라는 엑센트가 가해지는 대목에서는 울컥하는 마음에 가까스로 노래를 멈췄다가 건너뛰어야 할 때도 있다. 어떤 작품에 있어서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있듯이 그것은 아마 작곡자의 의도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움트는 그것을 애국심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안익태가 애국가를 통하여 노래했던 그것은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안익태를 친일파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안익태가 독립투사였는지 자못 궁금해질 때가 있다. 독립군이라든가 독립투사의 신분으로 친일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변절자라고 불러 마땅하다. 필자가 알기로 그는 독립투사도 독립운동가도 아닌 음악가이며 작곡자였다. 독립투사에게는 국가의 광복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할 목적이 되고 음악가에게는 개인의 음악 활동이 목적이 된다. 스포츠정신에서 적국을 가리지 않듯이 음악가에게는 지구 전체가 그들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安益泰)를 일본국가를 연주하고 일본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변절자로 낙인을 찍어놓고 있다. 심지어 혹자는 그의 이름이 ‘에키타이 안’이었음이 친일의 증거라는 궁색한 논리도 서슴지 않는다. 에키타이 안이야말로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에키타이 안은 ‘익태 안’에 대한 세계인들의 발음이었을 뿐이며 ‘오고타이 칸’처럼 몽골계 운율의 차용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일본인이든 스페인인이든, 세계인이 그를 안익태라는 이름 그대로 불러줬다는 의미가 된다.

조금 비약한다면 돌이 멈췄다가 다시 굴러갈 때의 표현이 ‘떽떼구르’이다. 구르다가 멈췄을 때의 표현은 ‘떼구르르 떽’이다. 국어에서 ‘ㄱ’ 받침은 순간적이나마 멈춤의 동작을 수반하고 있다. 발음상으로나 이치상으로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국어의 구성이 그러하므로 그나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영어권에서나 여타의 외국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안익태’라는 발음이 무척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따라서 익태를 ‘에키타이’라고 자신의 명함에다 올려놓았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음악가에게 애국을 강요하거나 애국심을 인격의 잣대로는 쓸 수가 없다. 애국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자발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국가를 부르면서 감격에 젖었을 때 그 마음을 타인이 알 수 없듯이 우리는 안익태의 마음속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작곡한 것은 제목 자체가 한국환상곡이요 애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창우 한국건설감정 대표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