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와 진보주의'에 대한 고찰 [유태선]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에 대한 고찰 [유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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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투표를 하게 된다. 공직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소속 정당들은 거의 모두 보수(保守)와 진보(進步) 중 하나의 진영에 속한 정치적 결사체로 언론에 의하여 분류되며 여론조사기관들은 유권자들의 성향도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표현은 무엇일까? 일상생활에서 보수는 하자보수(瑕疵補修), 진보는 기술진보(技術進步)라는 표현의 사용빈도가 가장 높다. 그렇지만 정치사상(政治思想)의 영역에서 보수와 진보는 이런 일상생활의 용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선 정치학 용어인 보수주의(保守主義)와 하자보수에서 사용되는 보수라는 용어는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굳이 양자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보수주의의 보수(保守)는 끊임없이 각종 사회 문제점들을 보수(補修)하는 것을 포함하는 정치학의 상위 개념이다. 한편, 진보주의(進步主義)와 기술진보에서 사용되는 진보라는 용어는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나 진보주의의 진보는 현재의 상태와 그 변화의 방향에 반대하는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용어인 반면에 기술진보의 진보는 주어진 일정량의 생산요소를 가지고 더 많은 산출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가치중립적 단어이다.

여기에 더하여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라는 용어는 영어의 conservatism과 progressivism을 번역한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치사상에서 논의되는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쉽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영국인들의 사상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한국으로 수입된 학술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보수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기피하고 현재의 상태 또는 체제를 필요한 범위 내에서 개선해 가려는 사상으로 진보주의는 현재까지 인정되어 온 전통적 가치나 체제에 반대하여 새로운 가치나 정책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보수는 과거의 경험에 기반하여 현재의 상태를 서서히 개혁해 나가는 것으로 진보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하며 필요하다면 현행 체제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설명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현상적 측면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며 보수정당(保守政黨)과 혁신정당(革新政黨)의 분류에 보다 적합한 설명방식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은 정부와 민간의 바람직한 역할 분담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있다고 보아야 두 정치이념 사이의 많은 차이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수주의적 견해에서는 정부의 역할은 민간에서 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에 국한되어야 하지만 진보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정부는 외교, 국방, 치안 등 전통적인 분야에 더하여 국민의 경제생활에 관련된 전통적으로 민간이 주도하여 온 부문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에 대한 학술적 설명이 쉽지 않다면 2016년 4월 11일에 있었던 대통령 박근혜와 영화배우 송중기의 만남과 2018년 1월 17일의 대통령 문재인과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단과의 만남을 비교하여 보면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세계관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정부 부문"으로 송중기와 김아랑은 "민간 기업"으로 해석하면서 아래의 사례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된다.)

당시 영화배우 송중기는 서울 중구 한식문화관에서 대통령 박근혜와의 만남이 첫번째인지 두번째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였는데 박근혜는 지난 번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자신도 송중기의 팬임을 밝힌다. 한편, 충청북도 진천에 위치한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한 대통령 문재인과 국가대표 선수들과의 만남에서는 김아랑 등 쇼트트랙 선수들이 문재인이 서명한 헬멧을 선물로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보수주의자 박근혜와 진보주의자 문재인의 세계관과 정치철학의 차이에 의하여 민간인 송중기와 공직자 박근혜의 만남에서는 그 주인공이 송중기인데 반하여 민간인 김아랑과 공직자 문재인의 만남에서는 문재인이 주인공이 된다. 앞으로 송중기가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될 경우 보수주의자인 박근혜는 "저도 송중기의 많은 팬들 중의 한 사람이며 그를 만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어서 매우 좋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한편, 김아랑이 세계적인 운동선수로 성장할 경우 진보주의자인 문재인은 "제 응원과 격려가 김아랑 선수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보수주의자들은 정부의 영역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공직자들보다 민간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주로 보여주게 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정부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아닌 공직자들이 무대의 중심에 서는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이에 따라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업적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거의 예외 없이 과소평가되는데 반하여 진보주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업적이 거의 없는 경우에도 "자신의 시대를 앞서 갔던 불행한 사람"으로 역사책에 미화되어 기록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정치철학의 차이에 의하여 보수주의에 입각한 정책과 진보주의에 입각한 정책은 조세와 예산에 관련된 재정정책, 경제활동의 주도권 행사집단, 정부 정책의 핵심과제,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적극성 여부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아래에서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제도가 확립되어 있는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통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보수주의 정부에서는 정부수입이 정부지출을 초과하는 경우 세율을 낮추고 그 반대의 경우 정부부처의 구조조정을 통하여 지출을 통제하려 하는 반면 진보주의 정부에서는 동일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부 프로그램을 도입하려 하고 그 반대의 경우 세율을 인상시키게 된다. 진보적인 오바마(Obama)의 민주당 정권 하에서는 중산층에 대한 증세를 실시하고 전국민 건강보험 의무화를 근간으로 하는 오바마 케어(Obama Care)를 도입하였으나 보수적인 트럼프(Trump)의 공화당 정권에서는 대규모 감세를 실시하였고 획일적인 사회보장 프로그램인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보수주의 정부의 경우 외교, 국방 정책이 정부활동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진보주의 정부의 경우 경제, 복지, 사회 정책 분야에 주력하게 된다. 이에 따라 보수주의 정권은 작은 정부 실현을 위한 법인세 및 소득세 인하와 (국방예산이 아닌) 복지예산의 대폭적인 삭감에 따라 부자들의 입장과 기득권의 옹호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진보주의 정권의 경우 국내 사회복지 정책 우선에 따른 대외정책에 대한 소홀 및 국방비 감축 등에 따라 외교 무능, 안보 불안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대처(Thatcher) 수상은 임기 중 언론들에게 마녀(the witch), 미국 공화당의 레이건(Reagan) 대통령은 전쟁광(warmonger)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1960년대 미국 민주당의 존슨(Johnson)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국내 복지정책에 주력하다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전의 책임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말없는 다수(silent majority)의 권익을 목소리가 큰 소수(vocal minority)에게 일정부분 양보하는 것에 대하여 소극적, 부정적인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미혼모, 동성애자, 외국인 이민자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요구할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보수주의 정권인 미국의 부시(Bush) 행정부에서는 동성애 반대 여론이 대세를 형성하였지만 진보주의 정권인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그 반대의 경향이 우세하게 나타났으며 2015년 6월 26일에는 연방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합헌이라는 판결(찬성 5명, 반대 4명)이 있게 된다. (Obergefell vs. Hodges)

이미 주어진 정부 인력과 예산으로 새로운 국정 과제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민간 위탁이나 민영화를 선호하는데 이는 사회적 형평성에 대한 경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사회적 소외계층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각종 위원회(committee)를 설립하여 대응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기존의 행정부 조직과 충돌하게 되어 행정의 비효율이라는 문제점을 수반하게 된다.

요약하면 외교, 국방을 제외한 국내 정책에 국한하여 평가할 때 보수주의 정권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민간의 역할을 확대하려고 하는 반면 진보주의 정권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보다 중요시하므로 민간 부문의 수익성 위주 의사결정으로 인한 시장실패 (market failure)와 공공 부문의 비효율로 인한 정부실패 (government failure) 중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인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안이며 장기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대중들이 보수주의자는 온건한 우파(右派)로 진보주의자는 급진적 좌파(左派)로 인식하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에 비하여 집권기간 동안 정부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므로 임기 내에 각종 개혁 조치들을 조속히 완수하겠다는 급진적 행동 경향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현실정치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급진적, 혁신적 성향의 인물들로 보수주의자들은 점진적, 현실적 성향의 인물들로 일반 국민들에게 인식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의사표현 방식에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각각 좌파, 우파와 유사한 면을 공유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분기준은 자유와 평등의 우선순위에 대한 인식과 바람직한 제도개혁의 속도에 대한 상대적 견해 차이를 의미하므로 이러한 구분을 자신의 정치성향을 평가하는 우선적인 기준으로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본인이 어떤 정치철학과 정책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이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의 어감에 따라 자신의 정치성향이 진보로 분류되기를 막연히 희망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 예컨대 공무원의 수를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규제완화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며 동성애 합법화에 강력히 반대하면서도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에서는 자신은 진보적 성향이라고 응답하는 젊은이들 - 이러한 기류에 반발하여 일부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보수를 우익(右翼) 또는 우파로, 진보를 좌익(左翼) 또는 좌파로 호칭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진보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비유를 통하여 반박해 보기로 한다. 보수주의자는 축구경기(경제활동)에서 민간인들이 공격수와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고 공직자들은 수비수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믿는 반면 진보주의자는 공직자들이 수비수의 역할에 더하여 공격에도 적극 가담해야 하며 민간인 선수들은 그들의 감독 하에서 모범적인 경기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 평론가들은 공직자들의 역할에 주목하여 전자를 수비축구(보수주의), 후자를 공격축구(진보주의)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 하자.

당신이 민간인이라면 "수비축구팀"의 공격수나 미드필더로 경기에 참여하여 직접 골을 넣고 싶은가 아니면 "공격축구팀"에 소속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다른 선수들의 득점을 보고 기뻐하는 역할에 만족하고 싶은가? 전자를 선호한다면 나는 골을 직접 넣고 싶기 때문에 수비축구팀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다니면 된다. 후자를 선호한다면 득점을 올리는 역할은 공직자 선수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공격축구팀의 일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보수와 진보라는 구분이 나오게 된 제도적 기반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적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프랑스혁명의 이념과 같이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의 실현수단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미국의 링컨(Lincoln) 대통령과 같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하여 건국된 대한민국의 역사가 어느덧 7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개개인이 각자의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주변의 시선, 군중심리 및 주요 언론의 논평에 흔들리지 않고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스스로 판단하며 그에 따른 자신의 개인적 신념을 선거를 통하여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 민주주의 이념 자체의 추구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운영을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당면한 중대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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