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시인 엘리엇은 몰라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다 안다. 이 표현이 ‘황무지’라는 난해한 시의 한 구절이고 그 앞의 문장이 ‘겨울은 오히려 따듯했네.’라는 사실까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4월이 되면 누구 입을 통해서든 한 번은 듣고 넘어간다. 영문학과 졸업한 친구에게 4월이 왜 잔인한 달이냐고 물었다. 하시는 말씀이 4월에는 4ㆍ3이 있고 4ㆍ16이 있고 4ㆍ19가 있기 때문이란다. 과연 386세대의 저력이 느껴지는 답변이다.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 될 것 같다. 인류 역사상 이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최악의 전범 김일성의 손자가 판문점에 오기 때문이다. 온다는 거 가지고 투덜대는 거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이 진행되면서 혹은 회담이 끝나고 난 뒤 붉은 색 왼쪽 스피커에서 떠들어 댈 목소리들이 미리부터 겁나고 짜증나서 그렇다. 혹시 이 인물평 기억나실지 모르겠다.

“통이 크고 배짱이 있는 이 사람의 정치를 통이 큰 정치라고 한다. 북한에서 말하는 이 사람의 광폭정치, 인덕정치는 일종의 선심정치다. 이 사람의 사람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도 인정한 바 있다.”

누구일까~요? 2001년 전교조가 펴낸 교재에 나오는 이 인물은 김정일이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마치고 본격적인 북한 지도자에 대한 이미지 세탁쇼를 벌인답시고 한 짓이 이렇다.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 주민들을 향해 대포를 쏴 댄 인물평을 우리는 이렇게 들어야 했다(그게 통 크고 배짱 좋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2007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노무현-김정일 회담 때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취급하는(먼저 그렇게 처신해서였다고까지 절대 말하고 싶지는 않다)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전교조는 같은 교재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답방을 한다면 환영하는 플래카드는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요. 반갑습네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아저씨.”

혹시라도 남한의 학생들이 김정일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까 봐 이렇게 ‘쉴드’를 쳐 주고 계신다. 아저씨라는 친근한 언어 프레임 속에서 폭침과 포격의 이미지는 은연 중 휘발된다. 그래서 언어가 무섭다. 그 짜증과 불쾌를 우리는 오는 4월에 또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잔인한 달이라는 얘기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냐고? 이미 청와대에서 예고편을 틀지 않았던가. 지난 8일 대북 특사단이 다녀온 뒤 나왔던 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단을 배려하는 모습을 많이 느꼈다. 쉽지 않은 난제들을 말끔히 풀어가는 과정에서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려의 근거는 이렇다. 문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테이블 건너편으로 가는데 김정은이 같이 일어나 걸어와 테이블 중간쯤에서 친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니, 특사단이 무슨 장애인이라도 되나. 배려라고 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여 그의 불편을 덜어주려 할 때 쓰는 단어다. 혹시 소생의 악의적인 매도로 들리실까봐 국어사전에 나오는 배려의 뜻을 옮긴다.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는 이 눈물겨운 노력을 김정은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또 튀어나온 인물평 중에는 ‘여유’ ‘솔직하고 대담한 스타일’ ‘숙성된 고민’도 있다. 대통령도 머슴 취급하는 마당에 머슴의 머슴이 왔으니 여유 있고 대담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 제스처에도 감동이 복받치는데 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나이 차이가 많으니 어른 대접을 해준다든가 하면 대체 어떤 찬사가 이어질지 모르겠다.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와 완벽하게 다르게 진행될 그 회담이(내용은 떠나서 물론 내용도 공포물일 가능성이 높지만)두렵고 회담 이후에 쏟아질 정신분열증적인 칭찬이 무서운 이유다.

물론 소생도 그 회담이 잘 끝나기를 바란다. 나도 핵전쟁 위협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회담이 잘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 측 당사자들에게 충언 하나 드린다. 이미 뱉은 말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으로는 절대 ‘숙성된 고민’같은 표현을 쓰면 안 된다. 숙성이라는 건 술이나 고기에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성숙한 여인’같은 말은 있어도 ‘숙성된 여인’같은 표현은 없다. 둔감한 인간이라면 모를까 그런 표현 하면 바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ㅅㄲ들이 누굴 돼지 취급하나.” 그리고 회담 전후해서 절대 김제동은 집밖으로 못나오게 하고 트위터도 못하게 스마트폰도 압수해야 한다. 무슨 망발을 할지 몰라 그렇다. 김제동은 예전에 김정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처음 보고 텔레토비인 줄 알았어요.”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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