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후 칼럼] 묘비없는 초원, 내몽고의 비애(悲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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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9.07 17:19:06
  • 최종수정 2020.09.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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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고의 몽고 소수민족이 박해를 받은 역사는 위구르나 티벳에 가려져 지금까지는 국제사회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지만 사실 그 연원이나 진행과정을 보면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한국인의 병폐라 할 수 있는 반일종족주의 유산과 비슷하다. 일본 통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고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행태는 국 내에 거주하는 몽고인들도 겪었던 수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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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중국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 자치구에서 불거지고 있는 몽고어 교육 폐지 방침에 따른 소수민족 몽고인들의 저항이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네이멍구 전역에서 30만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2만8000여명이 연명(連名)으로 중국 당국에 저항의 뜻을 밝혔다. 몽고인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며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어린 학생들도 집에서 양과 소를 키울지언정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부짖고 있다. 네이멍구의 관영방송국 직원 300여명도 연대의 뜻을 밝혔고 몽고공화국의 동포를 비롯해 전 세계 몽고인 사회가 중국의 몽고어 말살 정책에 항의하고 있다. 몽고어 교육을 없애고 중국어 교육을 1세대 정도 시행하면 중국 내에서 소수민족 몽고인의 정체성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인종이 다른 위구르인과는 달리 몽고족은 한족(漢族)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 않아 언어가 가장 두드러지는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내몽고의 몽고 소수민족이 박해를 받은 역사는 위구르나 티벳에 가려져 지금까지는 국제사회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지만 사실 그 연원이나 진행과정을 보면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한국인의 병폐라 할 수 있는 반일종족주의 유산과 비슷하다. 나라를 갈라놓고 있지도 않은 친일파, 토착왜구와 같은 용어를 만들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억누르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일본 통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고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행태는 국 내에 거주하는 몽고인들도 겪었던 수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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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在日) 몽고인 학자 양하이잉(楊海英) 박사

현재 일본에 귀화해 몽고와 동아시아역사와 관련한 많은 저술활동을 하고 최근 네이멍구 사태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몽고족 인류학자 양하이잉(楊海英, 몽고명 오고누스 촉트, 일본명 오오노 아키라·大野旭) 박사는 소수민족 몽고인이 겪은 문화 제노사이드(Cultural Genocide)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중국에서 청왕조가 무너지고 군벌이 난립하고 있을 때 동북지역을 침략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운다. 이 만주국의 판도는 현재의 네이멍구 지역을 포괄한다. 당시 일본은 이곳에 육군흥안군관학교(陸軍興安軍官學校)를 세우고 몽고인들까지 학생으로 입교시켜 교육한다. 징기스칸의 후예로 말타기에 능한 몽고인들을 기마병으로 양성해 소련군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몽고인들은 일본군에 참여하는 것이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향후 중국에서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데에 기여하는 엘리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기에 적극 협조했다.

그런데 몽고인들은 국제사회가 만든 전후질서에 따라 분리됐다. 북방의 몽고인들은 구소련의 지원으로 현재의 몽고공화국에 속하게 된 반면, 남방의 몽고인들은 중공의 네이멍구자치구에 편입됐다. 이 때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중국을 장악한 마오쩌둥(毛擇東·모택동)의 공산당은 소수민족 몽고인들에게 일제(日帝) 부역자라는 낙인을 찍고 박해를 시작했다. 쑨원(孫文·손문)이 내세우고 만주국도 계승했던 오족공화(五族共和)의 슬로건은 자취를 감췄고 괴뢰(傀儡) 만주국에서 일제에 부역했다는 올가미를 씌워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중국 공산당의 판도에 속한 네이멍구에 남게 된 소수민족이라는게 원죄(原罪)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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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근대사와 중공의 소수민족 멸절역사에 천착하고 있는 양하이잉(楊海英) 박사가 저술한 두 권의 책, 《묘비 없는 초원: 네이멍구의 문화대혁명·학살의 기록》(오른쪽)과 《몽고기병의 현대사: 티벳에서 휘두른 일본도》(왼쪽)의 표지 디자인.(이미지=아마존재팬)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동안 일본군에게 국민당군의 정보를 넘기고 일본군과 일정부분 협력해 대륙을 장악한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몽고 소수민족에게 오히려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몽고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다시 이용하게 된다. 티벳에서 중국 공산당의 강점(强占)과 문화탄압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그동안 탄압했던 몽고기마병을 용병으로 동원한다. 1958년 몽고족 기마병은 중공인민해방군과 함께 티벳에 진입해 현지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다. 몽고와 티벳은 라마불교를 포함해 문화를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 서로 원수가 될 일이 없는데 중국 공산당이 소수민족을 이용해 또 다른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티벳 봉기 진압에 동원됐던 몽고 기마병은 이후 철저하게 토사구팽당한다. 이용하고 난 뒤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고 여기에 협력한 몽고족 공산주의자들도 숙청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어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게 되자 소수민족 몽고인들은 청산(淸算)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중국 대륙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청년 지식인들이 청산의 목표가 됐다. 중국 공산당이 이들에게 찍은 낙인은 일제 부역자 내지 만주 괴뢰국의 매국노였던 아버지 세대로부터 교육받은 반(反)혁명분자였다. 문화혁명 시기 몽고인들은 한족들에게 남녀노소가 살해당하고 토지를 몰수당했으며 몽고어 사용도 금지당했다. 이 때 학살당한 몽고인들은 줄잡아 10만명이 넘는다는 게 양하이잉 박사의 증언이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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