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의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반일 선동에 격하게 반응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운다. 반응이 뜨거우니 정치인들은 계속 그 약을 사용한다. 그러는 사이, 점점 한국인의 이성은 마비되고 감정만 살아남는다. 거의 모든 역량과 에너지는 미래를 향한 준비가 아니라 과거사를 때려 엎는 데 투입된다. 그러는 사이,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준비에 가장 앞서가는 나라였던 한국은 중세적 광기가 판을 치는 ‘항일의 나라’로 전락했다.

#1. 그들은 왜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았을까?

이 땅에는 수많은 친일파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을사오적과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태평양전쟁에 나아가 싸우자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선동 연설을 한 최남선·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친일파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 시절 세계정세를 좀 안다는 지성인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황국신민의 자손이여,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 달라”고 연설을 하고 다녔을까? 이광수·최남선의 혈관에는 태초부터 친일 매국노의 피가 흘렀기 때문일까?

미국에서 거주하며 세계 정세를 꿰뚫어보고 있던 이승만을 제외한다면 그 시절 이 땅에 발 붙이고 살던 독립운동가나 민족지도자, 지식인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항공모함과 전투기, 전함과 잠수함, 대포와 전차를 자체 제작하여 귀축미영(鬼畜米英)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기백 명 규모의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의열단, 독립군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막강 일본을 제압하고 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시절의 심정을 미당 서정주는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란 시에서 “그들의 이 무렵의 그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나는 그 가까운 1945년 8월의 그들의 패망은/ 상상도 못했고/ 다만 그들의 100년 200년의 장기 지배만이/ 우리가 오래 두고 당할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2. 그들의 선택, 무엇이 문제였나?

점점 암울해져가는 정세에 절망낙담한 조선 지식인들은 깊은 고뇌 끝에 궤도를 수정한다. 즉, 납세와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대가로 참정권을 얻고자 노력했다. 조선인들이 완전한 일본 시민이 되어 ‘내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자.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여 조선인들의 권리를 향상시키자.

그런 결론에 도달한 조선 지식인의 대표가 최남선과 이광수였다.

일본은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심각한 병력 부족 현상에 직면하자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 시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끌어내려면 조선 사람들에게 정치적 자유, 즉 참정권(제국의회의 의원 선출)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과 조선인에게 제국의회 의석을 주는 조건으로 “일본을 위해 싸워 달라”는 거래가 성사되었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달라"고 학병 권유 연설을 했던 이광수(좌)와 최남선. 이 땅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혔던 그들이 대체 왜 그런 일들을 했을까?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달라"고 학병 권유 연설을 했던 이광수(좌)와 최남선. 이 땅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혔던 그들이 대체 왜 그런 일들을 했을까?

 

#3. 일제 위한 학병·징병은 공짜가 아니었다

1943년 11월 교토에서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었던 인물이 김우전 전(前) 광복회장이다. 그는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광수의 연설은 “당신들이 희생해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반일종족주의에 중독된 학자와 언론인·정치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천황폐하를 위한 성전(聖戰)’에 끌려 나간 조선 청년들의 학병·지원병·징병 행렬, 즉 그들의 희생은 공짜가 아니었다. 일본은 1945년 4월 1일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률 및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귀족원(상원) 의원은 조선인 7인(대만인 3인) 칙임, 중의원(하원)은 조선인 23인(대만인 5인)을 배당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실시는 차기 선거부터 적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놓았다. 불행하게도 관련법이 시행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그들의 노력은 허무한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다. 조선 지식인들이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은 어리석은 판단이 되었고, 그들이 조선의 앞날을 구상하며 행했던 일들은 친일 매국의 증거물로 남고 말았다.

“조선 청년들이여. 그대들의 피 값으로 조선인에게 일본 상원 7석, 하원 23석을 제공하겠으니 일본을 위해 싸워 달라.”

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서 앞부분을 지우고 뒷부분만 강조하면, 그런 주장을 한 사람들은 천하의 친일 매국노가 되고 만다. 이광수·최남선이 그런 경우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지금 이러한 외눈박이 역사관에 젖어 의도적으로 친일파를 양산해 내고 있다.

#4. 일본 식민통치와 조선왕조 통치, 객관적 비교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스토리는 『현대 일본의 역사』에서 “(조선에서의 일본의 식민 통치는) 조선에 많은 물질적 혜택 주었고, 그것은 이전 왕조 정부의 통치보다 효율적이었고 훨씬 덜 자의적이었고 덜 가혹했다”고 분석했다.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 복거일은 식민 통치의 본질적 제약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 살았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스토리나 복거일뿐만 아니다. 식민지 조선을 연구했던 다양한 국내외 역사학자들은 거의 모든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조선인들이 조선 왕조의 통치 아래에서보다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훨씬 잘 살았다고 평한다.

여러 증거물 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2.09%였다. 이것은 식민모국인 일본인(1.24%),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대만 원주민(1.85%), 세계 인구증가율(0.85%), 아시아 인구 증가율(0.94%)보다 훨씬 높았다.

정복자들이 식민지에서 약탈적이거나 추출적(extractive) 정책 펴면 원주민 인구는 빠르게 줄어든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식민지 조선의 인구 증가율이 세계·아시아 평군보다 훨씬 높았다는 뜻은 보건의료·위생 수준뿐만 아니라 소득도 높아져 영양 섭취가 그만큼 좋아졌음을 증명하는 증거다.

두 번째는 무역액이다. 1910년부터 1941년까지 30년 간 중국은 무역액이 무려 57%나 줄어든 반면 일본은 3.7배 늘었고, 대만은 4.0배 증가한 데 비해 조선은 무려 19.5배 폭증했다. 대외 교역이 거의 없던 ‘은둔과 폐쇄의 왕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활발하게 교역하는 사회로 탈바꿈했다. 게다가 교역품의 70~80%가 공업제품인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 시절이 조선왕조 시절보다 훨씬 잘 살았음을 각종 자료와 통계를 통해 밝혀낸 복거일의 문제작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일제 시절이 조선왕조 시절보다 훨씬 잘 살았음을 각종 자료와 통계를 통해 밝혀낸 복거일의 문제작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5. 친일 프레임의 근원은 소련공산당

참으로 미안하고 안 된 이야기지만, 해방 후 친일 프레임은 소련공산당의 작품이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보니 북에 있는 공산당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한국인 특유의 인재 중앙집중론에 의거, 엘리트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서울로 이동했고, 38선 이북 지역에는 오합지졸의 찌질이 공산주의자들만 남아 있었다.

이들을 긁어모아 지주·자본가·기독교인·반공 민족주의 세력을 찍어 누르고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정권 창출을 위해 소련공산당은 ‘친일’을 무소불위의 무기로 사용할 것을 지령했다. 이를 상세하게 폭로한 책이 중앙일보 기자 출신 김국후가 쓴 『평양의 소련군정』이다.

이 책에 의하면 1945년 9월 10일, 평양주둔 소련군정사령부는 38선 이북의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 ‘독립 조선의 인민정부 수립 요강’ 6개 항을 지령한다. 그 중 네 번째 항목이 “친일 분자는 철저히 소탕하고 각 분야의 불순분자를 엄정하게 숙청”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공산정권 창출에 협조하는 자들은 일제하에서 무슨 짓을 했든 관계없이 우군으로 수용하여 요직을 맡긴다. 반대로 공산정권 창출에 저항하는 자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낙인을 찍어 철저히 소탕·제거 하라는 뜻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공산정권 창출에 반대하는 자들을 친일파로 몰아 공격하라고 지령한 것은 소련군정 및 소련공산당이었음을 자료를 통해 밝혀낸 김국후의 화제작 "평양의 소련군정".
해방 공간에서 공산정권 창출에 반대하는 자들을 친일파로 몰아 공격하라고 지령한 것은 소련군정 및 소련공산당이었음을 자료를 통해 밝혀낸 김국후의 화제작 "평양의 소련군정".

 

#6. 민족정기 회복? 공산혁명의 투쟁도구

소련공산당의 “친일 청산을 통한 공산정권 창출” 프로젝트는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통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후에 남로당)에게도 지령되었다. 그 결과는 어떤 형태로 나타났을까? 1945년 10월 단신으로 환국한 이승만은 귀국 일성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표출된 ‘대동단결,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즉각 이승만 노선에 반기를 든다. 10월 30일, 박헌영은 “통일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덮어놓고 한데 뭉칠 수는 없다. 조선에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세력 남아 있다. 친일파 근절시킨 다음 옥석 완전하게 가려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만을 한데 뭉쳐 통일해야 한다”면서 이승만의 대동단결 노선을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이때부터 남한 사회에서도 ‘친일 프레임’ 소용돌이가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그 소용돌이는 지금까지 좌익·공산주의 추종세력에 의해 한국인들의 의식을 물고 뜯고 있다.

북한을 비롯하여 그들과 이념이 비슷한 대한민국 내의 좌익 세력들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공격하고, 그들의 도덕성을 흠집 내어 매국 집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 친일 청산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휘두른다. 말하자면 해방 공간에서의 북한에서처럼 적폐세력 청산을 위한 투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반공·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자산가로부터 재산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갖다 붙인 ‘친일파·민족반역자’ 딱지와, 이들을 주류 세력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인민재판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공산혁명에 동참하는 자는 일제 시절,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악질 친일파라도 어떠한 책임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반일 선동이 수시로 터져 나오는 이유가 있다. 반일 선동의 약발이 확실하고 정확하게, 광풍처럼 먹혀 들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일 선동이 수시로 터져 나오는 이유가 있다. 반일 선동의 약발이 확실하고 정확하게, 광풍처럼 먹혀 들기 때문이다.

#7. 아직도 친일 프레임에 춤추는 여론

한국 사회에서 ‘반일 카드’만큼 확실한 정치적 만병통치약은 찾아보기 힘들다. 표의 향배에 목숨을 건 정치인들이기에, 자신들의 인기가 하락하거나 정치적 궁지에 몰리면 여지없이 반일의 독가스를 살포한다.

반일 정서 이용하기에는 좌우가 따로 없고, 이념 따위도 관계없다. 2012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이명박 대통령은 가죽점퍼 걸치고 독도를 방문했다. 이어 “아키히토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박근혜 정부도 집요하게 일본과의 관계를 극한으로 몰고 갔다. 심지어 2015년에는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가 개최한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 소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의 대규모 열병식 사열을 받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공산당이 항일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기요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승절 행사를 요란하게 열어 자신들의 항일전쟁을 떠벌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군사 굴기(堀起)를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자유민주 진영의 우방국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산진영의 리더 격인 중공의 가짜 전승절 행사 참석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를 재고하라는 애국 진영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가짜 전승절 행사 참석을 강행하자 중국 네티즌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파오다제(朴大姐, 박근혜 큰 누님)’로 부르며 열렬 환영했다.

아직도 우리의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반일 선동에 격하게 반응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운다. 반응이 뜨거우니 정치인들은 계속 그 약을 사용한다. 그러는 사이, 점점 한국인의 이성은 마비되고 감정만 살아남는다. 거의 모든 역량과 에너지는 미래를 향한 준비가 아니라 과거사를 때려 엎는 데 투입된다.

그러는 사이,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준비에 가장 앞서가는 나라였던 한국은 중세적 광기가 판을 치는 ‘항일의 나라’로 전락했다. 중세적 광기라는 측면에서 좌나 우나 가릴 것이 없다. 이것이 이 나라 보편적 시민들의 수준과 인식 정도이니 ‘개·돼지’라 무시당해도 누가 누굴 비난하겠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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