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의 청년일자리 대책, ‘3종 오류’의 표본이자 '국민세금 우회지불제 '
일자리 창출은 기업의 몫...미봉적 포퓰리즘 정책에 희생당하는 청년들
‘더불어 몰락하는 경제’로 곤두박질치는 정부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책임 있는 정책결정이 아쉽다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정책분석론의 “3종 오류”(Type-Ⅲ error)란 해결해야 할 정책문제를 잘못 정의한 뒤엔 그럴싸한 정책대안들을 아무리 잘 선택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며칠 전 정부가 발표한 청년일자리 대책은 자본에 대한 증오는 본능이고, 일자리 만들기에는 무능인 정부가 보여준 3종 오류의 표본이었다. 동시에, 잘못된 이념에 선 정권이 만드는 정책 능력의 끝을 보여 준다.

그 골간은 중소기업이 ‘청년’ 실업자를 고용할 경우 세금으로 연 1천만 원 정도의 소득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기업을 열망하느라 실업 상태에 머물러 있는 청년들을 중소기업으로 몸을 돌리게 하여, 구인란에 놓여 있는 20만개의 중소기업 일자리를 채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청년 실업자, 중소기업 및 실업자 해소를 공적으로 내세울 정부조차 행복해지는 일거삼득의 멋진 정책으로 보인다. 이리 좋은 정책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 각국 정권들이 청년 실업 해결 못해 물러났나.

청년은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어느 곳에 배분할 것인가를 계산하고 그에 자신의 행동을 맞춘다. 보수, 장기근무 가능성, 기업의 명성 및 기타 조건 등을 중시할 것이다. 나아가 기업에 판매할 자신의 노동의 가치와 이것을 비교한다. 즉, 취업의 질 및 임금 수준은 청년측의 희망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결정되는 시장 가격에 의해 정해진다. 기업의 노동 수요에 비해 노동 공급자가 더 많을 경우 노동 가치는 떨어진다. 그런데 이런 양적 측면에 더해 더 중요한 점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과 청년이 제시하는 노동의 구체적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질적 측면이다. 

자본과 노동의 총량(aggregation)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좌파주의 경제정책의 치명적 결함이다. 청년이 가진 노동의 구체적 기능, 성질, 종류가 노동 수용자인 기업이 요구한 질적 요소들에 부합하는가는 완전히 무시한다. 즉, 오늘날의 청년 실업자들이 중소기업의 각 일자리들이 요구하는 모든 지식, 기술 및 정보는 다 갖추고 있지만 오직 급여가 대기업보다 낮아 취업을 안 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문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20만개 자리에 실업 청년들을 밀어 넣으면 된다는 총량주의 사고 틀에서 설계된 정책이다.

시장 경제 속에서 개인은 경제에 관한 자신의 계획들을 조정해 나간다. 실업자는 기업이 원하는 노동의 유형과 성격에 자신의 역량을 맞추어 갈 것이다. 그 조정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원하지 않는 일자리는 스스로 기피하는 자발적 선택을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아마 대졸생은 앞으로 줄어들 것이며, 기업에서 요구하는 다채로운 능력과 새로운 요구들에 조응하는 역량을 갖추어 나갈 것이다. 그 조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실업이 나타남은 당연하다. 시장 경제는 수백만 청년층이 자신의 경제 계획들을 노동 수요에 맞춰 조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기제이다. 기업 역시 시장에 맞추어 조정을 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시장의 조정을 교란하는 것이 정치이다. 청년 실업 구제하겠다고 큰 소리 쳐 놓은 정권은 시장적 조정보다 정치적 해결을 도모한다. 청년은 이제 시장 조정을 버리고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미봉적 포퓰리즘 정책들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취업 문제는 정치화하고, 일자리 늘려달라는 요구를 기업 앞이 아닌 청와대 앞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가 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여성을 남성으로 혹은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과, 진정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전자는 신의 영역이고, 후자는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시기의 추경 놀음도 실업 문제에 정치가 끼어들어 나온 것이다. 추경의 세 가지 요건은 국가재정법(89조)에 선명하다. 첫째, 전쟁이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정의하는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에 따른 피해가 발생한 경우인데 이는 현 상황과 전혀 무관하다. 둘째,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여야 하는 지출이 발생하거나 증가하는 경우인데 이 역시 마찬가지. 셋째, ‘경기침체, 대량실업, 남북관계의 변화, 경제협력과 같은 대내ㆍ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 아마 이에 해당된다고 둘러댈지 모르나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닌 청년실업 상황이 오늘 갑자기 크게 변했다는 건 거짓이다. 이 모두는 법적 요건일 뿐, 실질적 요건은 따로 있다: 선거가 다가 온 것이다.

정부가 푸는 돈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올바른 답이 아니다. 고교생부터 젊은 아저씨까지 그물에 다 잡기 위해 15~34세가 이 정책의 혜택을 받을 ‘청년’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에게 던지는 ‘표(票) 값’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후보자가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에게 1만 원의 식사를 사면 위법이지만, 연 1천만 원의 현금을 청년에게 제시하며 표를 구하는 이런 정책이 당당히 집행되는 게 기이하다.

공무원 및 공공기관 직원 늘려 직접 채용하는 것은 국민 세금을 축내지만 이번 청년일자리 정책은 민간 기업들이 채용하는 방식이므로 시장친화적 정책이라고? 그 4조 역시 내 호주머니에서 빼 간 돈으로 선심 쓰는 짓일 뿐이다. 지난 해 살림의 결산에서 나온 세계 잉여금을 쓰는 것이니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11조 넘는 세계 잉여금을 남긴 것 자체가 세금을 과도히 받아간 불건전한 살림인 것이다.

이런 나쁜 정책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김동연 부총리가 시장과 기업에 대한 이해라곤 대체로 ‘손을 봐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집단 속에 포위되어 있는 고충을 모를 바 아니다. 그러나, 반(反)시장적 정권 밑에서 그나마 경제 합리성을 가진 희소한 각료로 변론해주고 싶던 경제부총리가 청와대에서 청년일자리보고대회 이벤트에서 선거용 돈풀이 프로그램을 해설하는 모습은 참담하다.

청와대 정책 실세 운동권들만을 탓할 수 있을까? 포퓰리즘의 나쁜 정책 아이디어 개발해주고 그 집행의 총대를 맨 장관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경제부총리는 가치 판단과 무관한 정책 기능공이 아니라 책임 있는 정책결정자이다. 경제의 근본 가치 결정에 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 5공 때 차관급에 불과한 경제수석 김재익은 서슬 시퍼런 전두환 정권 밑에서 오히려 군부정권을 시장경제 가치를 교화해 나갔지 않았던가. 그럴 기대는 없는가.

유일한 답으로 다시 돌아온다. 기업은 일자리 창출의 선택 대안이 아니라 근본 전제이다. 일자리 수요자에게 돈 지원하기 보다는 일자리 공급자인 기업들이 투자 잘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지원하는 게 바른 방향이었다. 그러나 법인세를 올리고, 기업 총수를 잡아넣고, 최저임금을 올리고, 투자하라고 종용하며, 게다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까지 덧붙여 요구해 온 것과 그것은 모순된다.

나아가, 기업을 적으로 삼는 정권이 기업이 일 잘하도록 돕는 것은 좌파의 도덕적 열등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바로 그 때문에 반(反)기업정서로 먹고 사는 정권은 이 정답 하나만 제외한 채, 잘못된 좌파적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래서 기껏 남의 세금 돈으로 일자리 만들겠다는 허구로 귀결한 것이다. 그러나 좌파 정책이 오히려 실업의 원인이 되는 예는 흔하되 올바른 취업의 원인이 된 사례를 역사에서 본 적이 없다.

결국, 공무원 자리, 공공기관 자리 늘려 만들어 국민 세금으로 월급 주겠다는 문재인식 정책은 국민세금 직불제이며, 마침내 청년 당 1천만 원 세금을 중소기업을 통해 배급해주는 단계까지 간 이번 정책은 국민세금 우회지불제에 불과하다. 선거 직전 청년들 앞에서 4조원짜리 지대추구 게임 판을 정부가 앞장 서 펼치는 식으론 청년 실업의 근본 해소는 무망하다. 그 판돈이 커져 꼭 1백배가 되면 지금 한 해 예산에 육박한다. 그때는 세금으로 모든 청년이 월급 전액을 배급받는 시대가 된다. 남의 돈 뜯어 먹으며 “더불어 몰락하는” 경제, 바로 사회주의 말이다. 이 정부는 그 시대로 또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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