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투사'만으로는 이제 쉽지 않다
-정신혁명이 승리의 비결-글로벌한 이 싸움의 본질은 정신과 가치의 전쟁
-‘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지’에 대해 더 우월한 대답할 수 있어야

김철홍 객원 칼럼니스트
김철홍 객원 칼럼니스트

문재인 정권 등장 이후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日常)은 우리를 점차 무기력증(無氣力症)에 젖어들게 한다. 북한 핵문제는 이미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 된 지 오래다. 계속해서 좌편향 되어가는 교과서들도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떻게 해볼 만한 구석이 없다. 무너져 가는 경제도 강 건너 불난 집 바라보듯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남북정상회담, 헌법개정, 언론방송장악, 모두 다 마찬가지다.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고, 매일같이 우리를 압박해오고 있다. 우리 내부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자원(resources)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절망감, 분노, 그리고 무기력증에 빠져든다. 만약 우리가 1945년 3월에 한반도에 살고 있었다면 이보다 더 절망했을까? 다행스러운 건 1945년 8월에는 구원의 손길이 외부로부터 찾아왔다는 점이다. 과연 이번에도 우리에게 그런 축복과 기회가 주어질까?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 손으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조용히 앉아 현실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역설적(ironic)이다. 문제 자체가 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면 제대로 잘 안보일 수 있다. 그래서 원(遠)거리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전체 그림을 보고, 이 문제들을 한 번에 꿰뚫어볼 수 있는 관점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일단 우리의 눈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돌려서 밖을 보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 국민이 좌우로 나누어져 서로를 적대시하는 현상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1. 우리가 경험하는 위기는 글로벌한 현상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미국에서는 반(反)트럼프 시위가 시작되었다. 2016년 11월 9일 뉴욕에서 이만 오천 명의 시위대가 참가한 반트럼프 시위의 대표적인 구호는 “Not My President”(나의 대통령은 아니다)였다. 볼티모어, 캔사스시티, 밀워키, 마이애미, 포틀랜드, 시카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등 전국에서 트럼프 반대 시위가 있었고, “It’s Time to Riot”(폭동을 일으킬 때다)이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시애틀 중심가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트럼프를 히틀러에 비유하는 그림이 등장했고, 그를 “A Thoroughly American Facist Pig!”(철저하게 미국식의 파시스트 돼지)라고 불렀다. 촛불시위만큼 거칠다. 이런 시위는 심지어 영국 런던에서도 벌어졌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판 트럼프’로 불리는 ‘국민전선’이란 정당의 대표 마린 르 펜(Marine Le Pen)에 반대하기 위해 반트럼프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2017년 2월 4일 표지에 피 묻은 칼과 피 흘리는 자유의 여신상을 양손에 들고 있는 트럼프 이미지를 싣고 “전 세계가 이 ‘위험한 대통령’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시위가 일회적으로 일어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가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서 계속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하나의 동일한 이념을 공유하는 두 명의 후보가 경쟁해서 한 명이 당선되는 경우였고, 누가 당선되건 지지자들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졌던 지지자들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면서 선거가 축제처럼 잘 마무리되곤 했다. 트럼프를 찍은 사람과 힐러리를 찍은 사람이 서로를 계속 적대시하는 것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다. 태극기부대와 촛불시위 참여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듯이 미국에서도 50%의 사람들이 다른 50%를 적으로 대하고 서로 대화하지 않으려 하고 죽어라고 서로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인 것은 분명 아니다. 글로벌한 문제다. 더구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가 꽃 피우고 자유시장경제가 비교적 잘 확립되어 온 선진국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설명할 때, 그저 단순히 ‘이 모든 게 다 주사파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주사파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단순히 주사파의 탄생, 1987년 민주화운동,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과 같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나열한다고 해서 설명되는 게 아니다. 역사적 경험을 넘어서, 심지어 경제이론이나 정치이론을 넘어서, 이념을 넘어서, 보다 더 깊은 철학적 문제가 그 위기의 뿌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이 거친 싸움의 본질은 정신과 가치의 전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금의 위기의 철학적 기초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전체를 추상화하여 현상 뒤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북한핵무기, 경제민주화, 헌법 개정과 같은 구체적 정치 사안을 다루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인간이 어떤 정치적 체제, 경제적 체제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이런 질문 뿐 아니라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종교적 질문도 점점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명한 대답 없이는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선출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의 몸과 생각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적인 사고를 통해 집단적 지성을 이루어야 할 지식인들이 이 싸움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제는 지성인들이 이 운동의 전면에 등장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아스팔트에서 싸워온 투사들이 일선(一線)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미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의 양(量)과 질(質)이 사회운동가, 아스팔트 운동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주말마다 태극기 시위에 나서는 시위대도 이제는 이념적, 철학적 지성의 기초 없이는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의 싸움은 ‘시위대의 머리수가 어느 쪽이 더 많은가’로 승패가 결정되지도 않고,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로 결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싸움은 그것이 지방 분권화 헌법 개정이건 경제민주화 헌법 개정이건 모두 다 ‘가치’를 둘러싼 ‘가치의 전쟁’이고, 가치의 전쟁에서는 ‘누구의 가치가 더 고상하고 우월한가?’가 싸움의 핵심이다. 만약 자유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물어야 하고 대답할 때, ‘자유인의 삶의 양식’이 왜 ‘평등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양식’보다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지적 노력 없이 태극기를 들고 서울 시내를 아무리 걸어 다녀봐야 승리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천박함’을 추방해야 한다. 천박함은 가치의 전쟁에서 아군(我軍)에게 치명적이다.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부 우파 진영 내부의 수준 이하의 야비함과 천박함은 왜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는지 경험적으로 잘 깨닫게 해준 바가 있다. 좀 낡은 이미지이긴 하지만 양복에 흰색 셔츠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김동길 교수가 천박하지 않은 언어로 이야기 할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적 성숙과 고상함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3. 정신과 정신의 싸움에서 우리가 정신혁명을 이루어야 이긴다

성경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인간(피와 살은 인간을 가리킴)과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통치자, 권세는 모두 악한 영들을 가리킴)과의 싸움이란 뜻이다. 세속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우리의 싸움의 상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어떤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 안에 깃들어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지배하고 있는 어떤 ‘정신’(spirit)이 바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다.” 지금의 정치적 투쟁은 본질상 정신(spirit) 대(對) 정신의 싸움이다. 가치의 싸움이고, 인간의 삶의 양식에 관한 싸움이고, 인간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전쟁이다.

미국에서 유사한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미국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내부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흔히 좌파이념이 PC(political correctness), 즉 인종차별, 성차별, 종교적 차별 등을 없애자는 주장을 옷으로 입고 나타난 것으로 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을 대체하는 대안적(alternative) 가치관/세계관이다. 미국 국민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존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으로 부족하다. 도전장을 내민 새로운 가치관을 발로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보다 더 우월한 가치관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 진영의 지식인들이 이 과제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국민들은 앞으로 짧은 시일 안에 얼마나 큰 정신적 성숙을 이룰 수 있을까?

1945년 8월 15일에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외부의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숙제를 지금부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계속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제발 지적 성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무조건 하면 된다’는 군대식 작전으로 이 정신의 전쟁을 이길 수 없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낙관적 희망을 갖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투쟁이다.

김철홍 객원 칼럼니스트(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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