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칼럼] 끝나지 않은 백선엽 장군의 장례
[김태우 칼럼] 끝나지 않은 백선엽 장군의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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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우들 곁에 묻히지 못한 백선엽 장군...'친일파 파묘법' 제정되면 대전현충원에서도 파묘될 듯
백 장군이 승리로 이끈 다부동 전투 없었으면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존재하지 않았을 터...
구국의 영웅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이며 대한민국 안보자산인 '백선엽 장군 추모재단' 창설돼야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6·25 전쟁 동안 결사보국(決死保國)의 의지와 탁월한 부대 지휘로 나라를 구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7월 10일 국민의 곁을 떠났다.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이 끝남에 따라 공식적인 장례절차는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백 장군의 장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백 장군은 생전에 원했던 ‘6·25 전우들의 곁’에 묻히지도 못했고, 싸가지 없는 보훈처 직원의 말대로 ‘친일파 파묘법’이 제정되면 대전현충원에서 파묘·이장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좌파들은 대전현충원 안장도 반대한다며 장례행렬을 훼방했다. 대전현충원도 백 장군이 영면(永眠)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백 장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에게도 대전현충원은 백 장군에게 어울리는 안식처가 아니다. 그들은 “동작동에 자리가 없다”는 보훈처의 설명에 대해 “6·25 전쟁의 영웅이 11만 6·25 전사자들이 묻혀 있는 동작동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하며, 굳이 서울현충원 안장을 거부하는 정부를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백 장군이 일본 군복을 입었다는 흠결보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한 공적이 압도적이라는 나름 합리적인 논리를 펼쳤지만, 보훈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반대자들의 ‘친일’ 매도도 이어졌다. 그렇다. 애초부터 어떤 주장이 맞고 틀리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편’이 하면 억지도 진실이 되고 ‘네편’이 하면 진실도 억지가 되는 세상에서는 그렇다. 이렇게 백 장군의 장례는 국민장도 사회장도 아닌 육군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이 모셔진 대전현충원은 ‘내편’과 ‘네편’ 모두가 반대하는 ‘임시 거처’일 뿐이다.

억지가 진실을 압도하는 곳

우선, 백 장군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민족 반역자’로 모는 좌파적 시각에 과장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 장군은 1941년에 임관하여 수년간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지만 계급은 소위와 중위였다. 의사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초급장교에 지나지 않는 그를 독립군 토벌의 괴수로 간주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일본 관동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정도의 항일 투쟁은 부재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에 승리한 봉오리·청산리 전투는 그보다 20여 년이 앞선 1920년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가정을 설정해보자. 조선인 항일독립군의 규모가 컸고 이들의 활동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김원웅 광복회 회장의 말대로 중국 팔로군을 토벌했지만 조선독립군과 전투를 벌인 적은 없다는 백 장군의 설명이 ‘구차한 변명’이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흠결들은 그가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한 공로와 비교·상쇄되어야 마땅하며, 비교·상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친일’ 낙인을 찍어댄다면 일제 시대 동안 더 잘 살기 위해 공무원을 했거나 일본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반역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미국 독립민병대 총사령관으로서 영국군과 싸워 독립을 쟁취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무척 존경한다. 독립전쟁 이전에 그는 영국군 중령이었고 영국을 위해 프랑스군과 싸우고 인디언들을 죽인 식민제국의 앞잡이였다. 미국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의 공적이 업적을 압도하기 때문이며, 미국 전역에 늘려 있는 워싱턴의 이름을 딴 상징물들이 이를 강변한다. 수도 워싱턴 DC가 그렇고, 워싱턴 주(State of Washington)도 있으며, 10만톤급 핵추진 항모 조지워싱턴함은 미 해군 7함대의 핵심전력이다. 워싱턴 DC에는 조지워싱턴 대학이 있으며, 뉴욕의 맨하탄과 뉴저지의 포트리를 연결하는 조지워싱턴 다리도 있다. 그는 지금도 러시모아산(Mt. Rushmore)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자신이 세운 조국을 지켜보고 있다. 핀란드의 칼 구스타브 만네르헤임 대통령은 젊은 시절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1차 대전 동안 러시아군 장군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싸웠다. 하지만,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핀란드군 총사령관이 되어 결사 항쟁하여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는 선에서 독립을 지켰다. 그는 핀란드에서 원수로 추서된 유일한 전쟁 영웅이자 정치인이다. 한국 좌파들이 하는 식대로라면 워싱턴과 만네르하임도 “조국을 향해 총을 겨눈 매국노”일 것이다. 미국과 핀란드는 억지가 진실을 압도하는 곳은 아닌 모양이다.

대한민국을 사경(死境)에서 구한 다부동의 승리

전사가(戰史家)들은 다부동 전투, 인천 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을 대한민국을 있게 한 3대 전투로 꼽는다.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이 경기·충청·강원·전라도와 경상도의 일부까지 점령하여 대한민국 영토가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낙동강 전선으로 축소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에서 치러진 혈전이었다. 김일성은 경북 수안보에 차려진 북한군 전선사령부에 내려와서 8월 15일까지 대구와 부산을 ‘해방’하여 ‘민족통일’을 완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전라도에서 낙동강 방어선의 측면을 돌파하던 북한군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이 지휘하는 미8군의 저항에 직면했고, 다부동에서 남진하려던 북한군 3개 사단은 백선엽이 지휘하는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딛쳤다. 영천·포항 쪽에서도 국군 3,7,8 사단이 분전했다. 특히 다부동 전투는 산하(山河)를 붉게 물들인 혈전이었고 백 장군은 방어선을 지켜냈다.

인천 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은 맥아더 장군의 승부수였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던 1950년 9월 15일 미 제10군단, 미 해병 1사단, 한국군 제17보병연대, 해병 제1연대 등 7만 5천 명의 상륙군은 261척의 함정으로 인천에 상륙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전세는 뒤집히고 보급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북쪽으로 패주했다. 이후 북진을 개시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도달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함에 따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37도선까지 후퇴했다. 이후 유엔군은 재반격을 통해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 이남을 다시 장악하지만 전선은 한반도 중부에서 교착되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한반도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는 함경남도 장진군까지 북진했던 미 제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 1만 5천 명이 중공군에 포위당한 후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 격전을 거치면서 흥남으로 철수한 작전이었다. 모택동은 미국이 최정예로 자부하는 해병 1사단을 궤멸시킴으로써 미국의 전쟁 의지를 꺾겠다는 심산으로 제9병단 산하 7개 사단 12만 명을 동원했다. 알몬드(Edward M. Almond) 제10 군단장이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전원 항공기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스미스(Olive P. Smith) 사단장은 “항공기 철수는 해병대의 불명예”라면서 싸우면서 걸어서 이동하겠다고 고집했고, 사상자들만 항공기로 후송했다. 해병 1사단은 전사자 730명을 포함하여 4,400명의 전상자를 기록했고 많은 장병들이 동상에 걸렸지만, 중공군은 전사자 2만5천여 명을 포함한 3만 7천여 전상자를 기록했다.

6·25 전쟁에서 장진호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 중공군 9병단이 큰 손실 없이 해병 1사단을 섬멸했더라면, 또는 1사단이 9병단에 손실을 주지 않고 항공기로 철수했더라면,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3사단, 미 육군 7사단, 한국 해병대 등 10만 명의 병력과 숱한 탈북민을 탈출시킨 흥남 철수작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통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지만 장진호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제9병단은 서울 점령에 참가하지 못했다. 9병단이 이 공세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 유엔군이 수원 일대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반격에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전사가들은 장진호 전투를 ‘후퇴했지만 승리한 위대한 전투’라고 부른다.

이렇듯 다부동 전투, 인천 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은 대한민국을 사지(死地)에서 구출해낸 전투이지만 시작은 다부동이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인천 상륙은 꿈꾸지 못했을 것이고 장진호 전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부동이 뚫리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수도 대구가 온전하게 지켜졌고, 해외 망명정부 수립 계획도 중단되었다. 그렇게 해서 교두보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미군과 유엔군이 속속 파병되어 전선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공(功)이 과(過)를 압도한다

백 장군의 공적은 다부동 전투에 국한되지 않는다. 백 장군은 1945년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남쪽을 택한 이후 한국군의 창설에 참여했고, 사상무장을 위한 숙군 작업을 주도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한국군의 여러 사단들이 후퇴 과정에서 와해되었지만, 백선엽의 제1사단, 김종오의 제6사단, 이성가의 제8사단 등은 부대 체제를 유지하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그것이 낙동강에서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다부동 승리 후 백 장군은 북진의 선봉으로 평양에 입성했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준 후 재수복 전투에서도 선봉이었다.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둘러보면서 동작동을 국군묘지로 결정한 것도 백 장군이었다.

백 장군은 일찍부터 대규모 전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했고, 정전 후에는 제1 야전군을 창설했다. 전쟁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한국군도 함께 싸울수 있는 군대”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 동맹조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다. 백 장군은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으로서, 한·미 양국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과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을 받았다. 새로이 부임하는 미 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은 늘 백 장군을 찾아 예우를 표했고, 미8군은 백 장군을 종신직 명예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렇듯 백 장군은 조국을 절망으로부터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이며 대한민국의 안보자산이었다. 백 장군의 이런 업적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를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매도하는 것은 억지로 진실을 가리는 행위다. 잘한 열 가지를 외면하고 못한 것 한 가지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 전략과 흡사하다. 여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정부는 백 장군의 서거에 한 마디의 애도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백선엽 장군을 보내면서 “공(功)이 과(過)를 압도한다”라는 너무나 자명한 진실을 외면했다.

‘백선엽 추모재단’의 창설을 제안한다

전대협 청년들이 전국구국동지연합회,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등 예비역 군관련 단체들과 함께 광화문에 분향소를 마련한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15만여 명이 조문했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조문객만 4만7천 명에 달했다. 이들이 꼬박 4박5일 간 밤낮으로 수고하면서 정부가 거부한 ‘백선엽 국민장’을 치러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파묘·이장’을 협박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한 백 장군은 대전현충원에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에 의해서든 ‘백선엽 추모재단’이 창설되어 백 장군을 원수로 추서하여 다부동으로 모시고 함께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워커 장군을 비롯한 한미군 지휘관들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이 일대를 안보 성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해주기를 바라는 국민이 적지 않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만 된다면,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팡테옹의 국가유공자 묘지를 사양하고 청년 장교 시절에 살았던 시골마을 콜롱베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독립영웅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가 모세의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네게브 사막의 협곡에서 영면했듯, 백 장군도 자신이 최대의 격전을 치른 유의미한 곳에서 기쁘게 눈을 감을 것이다. 그것이 백 장군의 장례를 끝내는 길이자 영웅을 영웅답게 대접하는 방법일 것이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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