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 칼럼] 물망초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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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7.20 14:48:35
  • 최종수정 2020.07.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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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납북자들을 잊지 마세요
국군포로들을 잊지 마세요
중국에 떠도는 탈북한 북한 동포들을 잊지 마세요
이승만대통령: 북한 동포여, 우리는 여러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을 기억하는 ‘물망초’를 잊지 마세요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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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효상’이라는 친구가 짝이어서 가깝게 지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덤덤하게 그의 가족 얘기를 털어 놓았다. 1년 전 그의 형이 해양경찰로 근무하던 중 북한에 납북되었다는 얘기였다.

1974 년에 그의 형이 승선한 속초 해양경찰청 소속의 경비정이 북한 함정 3척과 교전하다 승무원 28명 중 2명을 제외하고 전원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는데, 2명은 살아남아 납북되었다. 그의 형이 그 2명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해 생사를 모른다 하였다. 그의 슬픈 가족사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형이 납북된 후 가족들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내냐고 물었더니, 부모님께서는 매일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신다고 했다. 어느 날 형이 집에 왔는데 문이 잠겨있으면 바로 들어오지 못할까봐 그의 아버지는 항상 대문을 열어놓으라고 하시고, 언젠가 집으로 돌아 올까봐 이사도 못 가신다고 했다. 혹시 간첩교육이라도 받고 내려오면 집에 들를지 모른다고, 매일 밤 대문 밖에서 나는 인기척을 기다리신다고 했다. 그의 얘기에 큰 충격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그는 오히려 위로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이 친구에게 늘 빚을 진 느낌을 가졌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북한에 계신 형님의 소식이었다. 오래 전 이산가족 신청 당시 ‘생사확인의뢰’ 신청을 했는데 그 때 생존해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이상의 정보는 모른다 했다. 아들과의 재회를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부모님은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아들의 생사여부도 모르시고 한을 품으신 채 돌아가셨다 했다. 돌아가신 후에도 집의 명의가 아직도 아버지 앞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버지 명의의 집을 정리하려면 호적상 존재하는 공동상속자인 형의 동의도 있어야 하는데, 형의 존재가 없으므로 납북된 형을 사망으로 처리해야 서류상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북한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은 형을 사망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또 아버지께서는 유언으로 혹시 형이 돌아올지 모르니 호적을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한다. 이 친구는 아직도 덤덤하게 얘기한다. 속마음이야 어찌 덤덤하겠는가? 이산가족의 아픔은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다. 

6.25전쟁 휴전 이후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은 주로 어부로 종사했던 사람들인데 3,756명이나 된다. 1999년에 국정원은 그 중 억류되어 있는 미귀환 납북자가 454명이라 했다. 그 후 숫자가 약간 바뀌어서 2010년에 통일부는 납부자 3,835명 중 517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그 중 극소수가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가족을 만났다. 분단 후 북한과 관계개선을 한다는 좌파 정부도 정상회담을 하면서 납북가족의 가슴 저린 사연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과 같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권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이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이산가족들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아픔은 외면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한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다. 2018년 여당 국회의원 12명이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 법에서 ‘납북’이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거부감을 보이므로 ‘납북자’라는 표현을 ‘전시실종자’로 변경하자고 하였다. 납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납북 이산가족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 파는 악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을 지라도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허공에 대고 외친다.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을 잊지 말아 주세요!”

국군포로를 아십니까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6.25전쟁이 끝난 후 8만 2천명의 한국군이 실종되었고, 5만~7만 명이 북한과 중국에 억류되었는데, 그 중에서 휴전 후 60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약 500명 정도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1954년 포로 상호교환이 이루어진 1954년 이후 ‘강제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한 명도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들은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주로 탄광에서 일했다. 가족들은 북한에서 최하위 계층으로 취급당하고 천대받으며, 자식들도 최하위계층으로 살아가야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국군포로들 중 일부는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는데, 1994년 조창호(1932-2006)중위를 시작으로 81명이 돌아왔다. 올해 90세인 Y씨는 2000년에 탈북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1953년 휴전을 불과 50여일 남기고 강원도 철원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 평생을 광산 노동자로 일을 했다.

2000년 6.15선언 때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이 악수하고 포옹하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국군포로들도 조만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이 70에 보따리상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탈북을 감행했다. 돌아와서 ‘귀환국군용사회’를 만들어서 국군포로송환운동을 하였다. 북한에 얼마나 많은 국군포로가 있는지, 국군포로들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북한은 그들을 어떻게 대했고, 그들은 북한 체제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같이 고생하다 먼저 죽은 동료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들이나 언론인 등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했지만 답변이 없었다. 한 때는 군부대에서 강연 요청이 왔고 여러 차례 강연을 했는데, 점차 찾는 횟수가 줄었고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북한에 있던 아들의 가족도 데리고 와서 개인적으로 여한이 없다고 했다. 

N씨도 역시 철원에서 휴전을 불과 2주일 앞두고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두 살 난 딸과 아내가 있었다. 전투 중에 척추 골절과 왼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었지만 적절한 치료는 받지 못했다. 그 역시 탄광에 있는 수용소에서 일을 했다. 후에는 주민증도 받고 아내도 얻었다. 국군포로라는 신분이 그와 그의 가족을 괴롭혔다. 자녀들은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원망의 말을 듣고 살았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아들 넷이 막일을 하다 죽거나 병에 걸려 치료를 받지 못해 죽었다. 47년이 지나서야 탈북을 감행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조국에 돌아왔는데 조국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국방부는 그를 일찍이 전사 처리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아들의 전사소식에 병세가 악화되어 별세했고, 두 살배기 딸은 병으로 죽고 전처는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가보훈처는 수용소에서 함께 포로생활을 하다 탈북한 다른 국가유공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에 대해 ‘증거불충분’이라고 결론내렸다. N씨는 이것을 가장 원통해했다. 그가 탈북하여 돌아왔을 때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던 47년을 인정받아 3억이 넘는 정착지원금을 받았다. 그는 이 돈을 북한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 알선비용으로 다 썼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연고가 없어진 한국에서, 북한에 남겨진 가족이야말로 그가 살아야할 이유였다.

지금 그는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고 있다.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지원하는 월 50만원과 무공명예수당 24만5천원과 노령연금 10만원과 휴지를 주워 읍사무소에서 주는 20만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기초수급대상 지원금은 32만원이었는데 탈북정착금을 받았다고 삭감되었다. 그는 줍는 휴지의 할당량을 채워야 눈치가 덜 보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것이 47년 만에 탈북에 성공하여 돌아온 87세의 국군포로, 6.25 참전용사의 모습이다. 이제 북한에서 돌아온 귀환용사 중 3분의 2가 사망했다. 살아있는 분들은 이제 23명이다. 그들은 잊혀지고 있다. 

중국에 떠도는 탈북 북한 동포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탈북민’이라고도 하고 ‘북한이탈주민’이라고도 한다. 2000년 이전에는 해마다 수백 명의 북한주민이 국내에 입국했는데, 2002년 이후에는 1천명이 넘었고 2006년에는 2천명을 넘었다. 이후에는 매년 2천5백여 명의 탈북자가 국내 입국했으나 2012년부터는 1천명 선으로 하락했다. 탈북자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탈출한 후 중국내 외교공관을 통해 입국하였는데, 중국정부가 탈북자 단속을 강화된 2000년도 이후에는 베트남,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지역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주민들 중 일부만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국내로 들어오는데 있어서 돈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면 중국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일부 여성들은 성노예로, 일부 남성들은 급여도 못 받고 노예노동을 하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들이 어떤 인권 유린을 당하는지 들어보면 기가 막힌다. 이들의 숫자가 적게는 10만 명 많게는 20만 명이라 한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북한 주민도 우리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픔 때문에 저지른 작은 죄 때문에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헌법상 우리 국민이고,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인데 국가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 머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 우리 국민들을, 적어도 굶어죽을 염려는 없고, 아파도 치료를 못 받을 염려는 없고, 원하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이들을 입국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국가이다. 종교와 인종이 달라도 차별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 중국에 그렇게 많은 북한 동포들이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니게 하는가? 중국 하늘 아래 떠돌면서 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들을 잊지 마세요!”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7월 19일은 이승만대통령의 55주기 추모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과 인권에 큰 관심을 가졌던 분이었다. 6.25전쟁 전, 1949년 10월 7일에 발표한 ‘공산당과 협의불가 - 인권보증에 결사투쟁’이라는 담화문에서 “우리는 인권보증을 위하여 공산당과 싸워야한다”고 말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그 날, 이승만대통령은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굶주림과 자유를 빼앗긴 채 억압 속에서 살게 될 북한의 동포들에게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 동포의 인권의 중요성을 6.25전쟁 전이나 후나 명확하게 하신 분이다.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대통령의 목적이 북한 동포를 공산주의의 압제로부터 구해내려는 것이었다. 

서거 55주년을 맞아 어제, 미 국무부는 기밀문서 하나를 공개했는데, 이것은 1959년 10월에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이승만대통령과 회담하고 난 후 본국으로 타전한 것이다. 이 문서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4.19혁명의 불과 6개월 전에 했던 주장이었다. 미국은 이승만대통령이 북진통일의 신념을 행동에 옮길 경우 제거하려는, 일명 ‘에버레디 작전(Everready Operation)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승만대통령 서거 10년이 지난 1975년 공개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과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북한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북진통일 밖에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항상 공산국가에서 고통을 받는 동포들을 잊지 않았다. 어제 서거 55주년을 맞아 이승만대통령의 말씀을 다시 떠올린다.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탈북 국군포로들의 김정은 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

지난 7월 7일 법원에서 대단히 이례적이고, 의미가 있고, 역사적인 판결이 하나 나왔다. 6.25전쟁 때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가 강제노역을 했던 탈북한 국군포로 두 사람이 북한 정부와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는데 승소의 판결을 받았다. 그 주인공인 국군포로 두 사람은 1953년 포로가 되었다. 정전 후에도 국내로 송환되지 못하고 탄광 등에서 착취당했고 각각 2000년과 2001년에 탈북했다. 그 후 ‘사단법인 물망초’의 박선영이사장을 만나서 여러 해 동안 준비과정을 거쳐 2016년에 소송을 내었는데, 재판이 계속 미뤄지다 이제야 판결이 나게 되었다. 재판 결과에 대해, 소송을 주도한 ‘물망초’의 ‘국군포로 송환위원회’는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국군포로를 47년 동안 불법으로 노동을 시켜 착취한 북한의 행위에 당시의 통치자였던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배상책임이 있는데, 상속 비율에 따라 책임져야할 김정은에게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이었다. 지난 달에 탈북민 단체가 대북전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한 김여정의 한마디에, 우리나라 통일부는 4시간여 만에 ‘대북전단 중단 법률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고, 안보와 환경오염, 폐기물 수거 부담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또 최근에 통일부는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탈북민 단체들을 경찰에 수사의뢰하고 압수수색을 당하게 하고,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의 법인 설립허가를 취소했다. 최근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헌법정신을 망각한 판결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즘, ‘김영아 부장판사’의 이번 판결은 법리적으로 당연하지만 보기 드문 너무나 용기 있는 판결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상 북한과 김정은은 우리나라 법정에서 피고의 자격을 갖는다고 보았고, 피고 북한 정부는 국가가 아닌 불법단체인 ‘비법인 사단’이고 김정은은 불법 행위를 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상속인으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실제로 북한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방법이 있는가? 

민간단체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은 현재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인 임종석이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데, 이 재단은 2004년에 통일부 산하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허가를 받았고, 2005년에 북한의 민화협과 저작권 양도를 합의하고,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북한 언론의 사진이나 방송화면을 사용하면 이에 대한 비용을 수금하여 김정은에게 전달하는 독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2008년 박왕자씨에 대한 금강산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이명박정부는 대북제재의 하나로 저작권료 송금을 금지하자 경문협은 이 돈을 법원에 공탁했다. 대북제재 전까지 8억 정도를 북한에 송금했고, 현재는 20억 정도가 모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법원에 민사집행 신청을 내고 공탁금에 대한 채권 압류를 통해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따라서 향후 북한 정부와 김정은을 피고로 하는 소송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탈북 국군포로들이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에 허탈해했을 그들에게 이번 판결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국군포로, 납북자, 중국에 떠도는 탈북민, 우리나라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은, 그들을 잊지 않고 있는 ‘물망초’라는 단체가 있고 그 단체를 돕는 사람들이 있고, 그 단체를 만들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박선영이사장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기를 바란다.

물망초를 잊지 마세요

물망초는 유럽이 원산지인 한해살이 식물이다.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 물망초를 영어로는 ‘forget me not’이라 한다. 독일어로는 ‘Vergissmeinnicht’. 남부 독일, 알프스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도나우 강이 있다.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강 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한 청년이 이 섬에서 피는 예쁜 꽃을 꺾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려고 섬에 헤엄쳐갔다. 꽃을 꺾어 돌아오던 중에 급류에 휘말리게 되었다. 청년은 온 힘을 다해 여인에게 꽃을 던져주고 물속으로 사라지면서 한마디를 외쳤다. ‘나를 잊지 마세요!’ 여인은 평생 동안 그 꽃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 한다. 이 꽃이 물망초이다. ‘사단법인 물망초’는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는 북한주민, 국군포로, 북한이탈주민(탈북민)들을 잊지 않고 이들의 인권실태를 파악하고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번에 역사적인 판결을 이끌어 낸 ‘사단법인 물망초’에 우리나라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납북자, 납북자 가족 그리고 탈북민들에게 갖고 있는 미안한 마음과 ‘물망초’에 대한 빚진 마음으로 호소하고 싶다. “물망초를 기억하세요!”

황승연 객원칼럼니스트(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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