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너무 자극적인가? 아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 가정에서

직장인 A씨는 두 자녀를 둔 한 중견기업의 간부다. 아침 6시에 일어난 A씨는 조간신문을 집어 들고 화장실을 간다. 용변을 본 후 세수를 한 다음 아침식사를 마치면 7시가 조금 넘고 승용차를 몰아 회사에 도착하면 8시, 사장이 주재하는 간부회의를 30여분간 마치고 부하직원들에게 그날의 업무 지침을 하달하고 나면 9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오후 6시 업무를 끝내고 당일 일일 보고를 마친 다음 귀가하면 빠르면 7시 반 늦으면 8시다. 대충 몸을 씻고 저녁을 먹고나면 9시가 훨씬 넘는데, 그 때 자녀들은 이미 잠에 들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일반적인 생활패턴이다. 직종과 직책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가정에서 취침시간을 빼고 나면 자녀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은 대개 같다. 

주말이 되어서야 온 가족이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식사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모처럼 맞이한 휴일은 그 간 쌓여있던 피로와 긴장을 풀기 위해 레저를 즐기거나 휴식을 갖길 원한다. 어쩌다 자녀들과 세상살이에 대한 말문이 트여 대화를 나누다 보면 깜짝 놀란다.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넌지시 잘못 된 인식을 고쳐주려 하면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는데...’ 하고 이상 한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돌린다. 이 일을 어쩐다. 선생님이 틀렸다고 말해야 하나? 늘 상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잘 배워서 훌륭한 사람 되라고, 시험성적 잘 받을 적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난감하기 짝이 없다. 누가 감히 선생님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나? 누가 감히 자녀의 학업성적이 나빠지게 할 수 있나? 

단언컨대 자녀교육에 관한 한 가정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 줄 수 있는 여건도 되지 못한다. 아니 여건이 된다 해도 학교선생님과 상반되게 훈육한다면 그 아이는 낙제생이 되고 만다. 가정이란 결국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는 사육장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것. 

▲ 학교에서

등교한 자녀들은 그 시각부터 본격적인 교육을 받는다.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아이들의 활동시간 대부분은 선생님과 함께한다. 학교뿐인가? 학과를 마친 자녀들은 영어, 미술, 음악, 태권도 등등 두세 개의 학원을 더 거치는 것은 기본이다. 

하루 중 교육에 유효한 활동시간은 대부분 선생님과 함께 지낸다. 그에 비하면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은 거의 0에 가깝다. 

결국 자녀들의 인격은 선생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자연과학을 제외한 인문과학은 가르치는 교사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가 있다. 인문학이란 사람의 생각과 판단의 개입과 더불어 구축되는 학문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학과성적은? 선생님의 생각과 일치 할 때 그 학생의 성적은 100점이다. 인문학에 관한 한 학과성적이 좋다는 것, 즉 모범생이라는 것은 선생님의 그것을 닮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학부모들은 그렇게 되라고 자녀들을 채근하고 온갖 정성을 들여 뒷받침 하지 않는가? 

▲ 교사의 인격과 사상은 믿을 만 한가?

교사라면 누구나 다 교사 아닌 사람보다 우수한 인격자라고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직업이 교사일 뿐이다. 오로지 자녀교육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야는 자연과학계통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 분야조차 어떤 정신적 바이러스가 침투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현재 교권을 쥐고 있는 대다수 교육자들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들의 인격과 세계관을 의심 할 이유는 충분하다.  

1970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학원가는 극도로 혼란 한 시기였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끼니도 잇기 힘들던 다수의 빈곤 계층은 고도 경제 성장기를 맞아 밥술이나 먹게 되자 순진한 근로자들은 형편이 점차 좋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선동가들의 부추김을 받아 기업주를 노동력이나 착취하는 부도덕 한 계층으로 규정, 극심한 저항운동에 나서고, 거기에 대학생들도 가세하여 기업체에 위장취업까지 하며 노동운동을 부추겼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마르크스와 같은 이념서적에 심취하거나 관심을 가진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과 복지 향상을 위해 시작했던 노동운동현장은 사회 각계의 다른 불만 세력들이 합세하여 급기야는 친북 반정부, 반 자유민주주의,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이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후에는 학교 선생들까지 숭고하고 깨끗한 교육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나도 노동자다.’ 라고 하며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즉 전교조를 결성, 가장 급진적인 민노총 산하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민족, 민주, 인간화, 참교육’을 중요 설립 강령으로 내세움으로써 누가 봐도 순수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먼 정치와 이념적 색깔을 짙게 물들인 채 출발 한 이데올로기 단체였다. 

특정한 사상의 교육이념으로 가르치는 선생과 그 가르침을 받는 학생, 설사 전교조와는 무관 한 교사로부터 교육받은 학생이라 할지라도 그와 반대 되는 사상학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반 자유민주주의적’, ‘친 사회주의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주입하고 학습하는 분위기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유사한 이념의 소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 한 자녀들은 이제 사회를 주도하는 세대로 성장하였다. 교육을 시킨 자들과 교육을 받은 자들이 같은 의식으로 무장 된 한 몸이 되어 대한민국호의 좌경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런 자녀들이 성장하여 법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문인과 예술인이 되고 근로자가 되고 선생님이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수백만 학생 자녀들이 이념적으로 선생님의 그것과 같아진 좀비가 되어 사회를 향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꾸역꾸역. 

100%에 가까운 교육의 기회를 학교에 의탁 할 수밖에 없는 교육시스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교사가 불량하면 불량 한 그대로 불량하게 성장 할 수밖에 없는 자녀들의 교육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미 반자본주의 좌경 종북 세력들이 교육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 그곳에 가면 불순한 이념으로 세뇌되어 나올 줄 뻔히 알면서도 귀한 자녀들을 계속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무섭다. 

자녀를 사육하는 가정과 교육하는 학교, 이런 구도에서 교직사회의 정신적 위치를 바로잡지 않고는 머지않아 한국호의 침몰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신현규 시민기자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