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이냐 교육이냐 이전에 국가주도의 획일적 교육 우려는 없나
방과후 학습이나 돌봄교실을 왜 꼭 ‘학교 안’에서만?
유아기에서 아동기에 걸쳐 ‘어버이 국가’에 길들이는 교육을 경계한다

조윤희 부산 금성교 교사

예상치 못한 세계적 유행병으로 초등학교의 돌봄교실로 향한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초등학령기 아동들의 돌봄 역할이 오롯이 초등학교 몫인양 과장되기 시작했다. 맞벌이 부부로 인해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 자녀의 보살핌은 전적으로 사회와 국가가 책임져야만 한다는 논리가 너무나도 당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돌봄을 책임감있게 끌고 나갈 것은 정부 주도의 돌봄교육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복지로 볼 것인가, 교육으로 볼 것인가만 따지고들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엽기적이고 참담한 아동학대의 범죄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보도될 때마다 ‘돌봄’의 부재가 빚은 사건이라도 되는 양 돌봄교실 강화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고 ‘돌봄교실’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단지 국가주도의 돌봄교육(집단교육)을 경계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 돌봄교실의 쟁점, ‘누가’와 ‘어떻게’

‘온종일 돌봄체계’, ‘전일 보육제’. 약간의 표현만 다를 뿐 여야가 한목소리로 돌봄교실을 들고 나왔다. 여당의 한 정치인은 ‘온종일 돌봄체계 운영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야당의 한 정치인은 오전부터 방과 후 저녁까지, 초등 1학년부터 중 3까지 국가가 교육과 보육을 책임지는 ‘전일보육 제도’를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공교육’을 강화하자는 합의를 한 셈이다.

이를 두고 교사노조를 포함, 교사단체들은 한목소리로 돌봄교실의 법제화에 반대를 천명했고, 비정규직 강사들을 대변하는 단체나 학부모 단체에서는 교사들을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교육은 내몰라라 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만을 탐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며 교사들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이르렀다.

이런 극단적 논란의 핵심에 놓인 돌봄교실의 문제는

첫째, 누가 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할 것인가의 두 가지 쟁점으로 요약된다고 여겨진다.

● 누가? 교육은 교육전문가에게, 보육은 보육담당자에게

교육은 교육전문가에게, 보육은 보육담당자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최적이다.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학습 기간이 길어졌고, 부모가 출근한 후 방치된 아동들을 돌볼 사람들이 필요해지자 돌봄교실의 역할이 시급해졌고 급기야 수업 이후 공교육에서 긴급돌봄을 포함, 돌봄교육을 확장해서 실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교사는 수업을 제대로 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고 본연의 업무이다.

그런데도 돌봄교실의 확대로 교사의 업무가 가중된다면 제한된 자원(시간과 노력)을 배분함에있어 돌봄교실의 확장 이전에 비해 피로도가 높아지고 수업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이며 교사들은 슈퍼맨이 아니다.

그래서 방과후학교와 돌봄은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총이나 교사노조 등의 교사단체들은 입법 저지 운동을 펼쳤고, 결국 교육부는 법제화를 하려던 개정안 추진을 철회했다. 그 결과 그 결정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생각을 전환하면 교육을 꼭 공교육에서만 맡아야 할 이유도 없고, 돌봄교육의 코디나 보육교사의 공교육 내 진출을 막을 이유도 없다.

교내에 민영화된 업체나 위탁업체가 들어온다고 해서 교육의 질이 떨어지거나 턱없이 비용이 증대될 것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가 미약하다. 업체 간 경쟁은 결국 비용을 낮추게 될 것이고 프로그램의 수준을 끌어올리거나 다양함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소득층에게 가중되는 보육비 부담은 바우쳐나 소득분위에 근거한 무상 제공도 가능할 것이다.

●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까 고민하는 교육

사실 본격 논의는 이 부분인데, 이 문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차원의 문제’와 ‘복지 차원의 문제’이다.

먼저 ‘교육차원의 문제’는 교육 ‘내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주도의 집단교육, 단체교육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돌봄교실을 ‘국유화’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유아교유의 중요성은 이미 재론의 여지없이 많은 교육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Benjamin S. Bloom)에 따르면 지적 성숙이 최고조로 달하는 17세의 지능을 100으로 보았을 때, 0∼4세 사이에 인간지능의 약 50%가 발달하고, 4∼8세 사이에 30%가 발달하며, 그리고 나머지 20%가 8∼17세 사이에 발달된다고 한다(Bloom, 1964:8).

인간 발달의 기본 원리에 비추어 보아도 어릴 때의 발달이 나중의 모든 발달의 기초가 되므로 어린 유아기 때의 교육이 중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는 공연히 붙여진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 외 발달심리학에 근거한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지적한 부분에서도 아동에게 적절한 수준의 지적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자극을 주기 위해 적당한 지적 불균형과 호기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유아교육이 성장단계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어 주고 학령기 아동들보다도 학습의 진행 정도나 발달량이 가장 많이 진행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다양성을 배제한 획일화된 학습에 매몰되게 하는 국가주도 돌봄교육은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교육이 되지 않을 것이란 주장도 가능하겠지만 획일화된 교육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이렇게 중요한 유아기, 초등 저학년 아동 때부터 국가가 주도하는 단체 육아, 단체 교육. 국가가 ‘어버이’가 되어가는 교육에 방치되고 길들여질 것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으려는 것이다.

교육은 다양해야 하며, 개인의 각성을 전제로 책임과 의무를 가르치고, 건강한 사회의 근간은 가정임을 체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니 집단육아의 한 방편인 돌봄교실의 확장을 결정함에있어 단순히 교육이냐 복지냐의 문제를 떠나 건강한 가정과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을 배양하기 위한 기초단계임을 고려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간과한 채 보육만을 강조해 획일화된 교육을 실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려에는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 어떻게? 누가 어디에서 가르칠까 고민하는 보육

그럼에도 현실의 벽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는 맞벌이 가정의 육아 문제이고, 저소득층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는 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육아의 어려운 점을 들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종일반과 반(半)일반 규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오후 시간까지 보육을 안심하고 맡길 종일반 혜택이 어렵다는 점 ▲현 초등돌봄교실이 대부분 1~2학년만 지원됨에 따라 3학년 이상의 아동들은 돌봄이 어렵다는 점 ▲돌봄교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학급당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 ▲지역아동센터와의 연계가 순조롭지 못하다는 점 ▲학부모들이 일하는 대부분의 직장은 6시 이후 업무가 끝나는 데도 초등돌봄교실의 시간은 4시 반부터 정리를 시작해 5시까지로 제한되는 점 ▲초등돌봄교실과 학교의 방학(휴일)의 중복으로 일반 직장 부모들은 연차를 쓰고도 부족하다는 점 ▲돌봄교실도 안되면 사교육에 의존해야 하므로 경제적 부담이 증가된다는 점 등을 들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생각해 낸 것이 초등학교 1, 2 학년을 대상으로 5시까지 학교 내에서 돌봄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문제를 ‘답정너’로만 생각한다면 갈등은 좁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법이 없지는 않다.

▲ 방과후학교든 돌봄교실이든 학교 내에만 묶어 두지 말고 꼭 교내 교사가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것

- 교육의 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인력풀이 넓어지면 학생들이 만나는 교사가 다양해지고 공교육 교사만으로 제한된 강사의 독과점이 해소될 것이다. 학교 밖 방과 후 강사나 돌봄 코디, 돌봄 도우미 등에게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 지역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방과 후 수업은 선택적으로 외부 방과 후 교사들에게 맡겨 자율적인 경쟁구도에 따라 양질의 프로그램을 교육수요자가 선택 할 수 있게 하면 그만이다. 자격 미달의 인력을 누가 검증할 것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장에서 판가름 나고 훌륭한 교사들의 강좌만 선택받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분업과 특화로 비교우위를 살리는 것이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이득

- 학교를 아이돌봄 서비스 제공기관으로만 묶어 두는 순간 ‘학습(TEACHING)’에 더욱 비교우위에 있는 교사를 ‘아이돌보미’의 보조 업무에 지치게 하여 비교우위를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비능률적 결과만을 낳게 할 것이다. 과중한 돌봄교육의 부담은 교육 본연의 업무 수행에 지장을 주고 교육의 질 저하를 초래하게 될 것이므로 교사에게 교사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저소득층의 아동보육에 대한 실질적 안전판을 마련할 것

- 필요하다면 <아이돌봄 서비스>를 확대 시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시행 2019. 7. 1.] [법률 제15270호, 2017. 12. 19., 타법개정]. 중위소득 75% 이하부터 150% 초과하는 소득의 가구에게 모두 지원 가능하며, 소득 기준에 따라 정부 지원 금액이 차등 제공되고 돌봄교실 이후 시간에도 이용이 가능하다. 주관 부서는 여성가족부로, 충분히 이것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돌봄이 복지로서 기능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장치를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추가로 저소득층의 복지를 위해 바우처 등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초등교사들이 돌봄교육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해서, 그것을 법제화하길 거부한다고 해서 교사들을 싸잡아 이기주의자로 매도하고 막말을 일삼는 학부모가 학부모의 전부가 아니듯, 무조건 돌봄교육을 밀쳐만 내려고 하는 교사 역시 교사의 전부는 아님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교사들도 이미 과중한 업무에 허덕이며 이젠 좀 교사 본연의 업무로 복귀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교사들이라고 그 일을 잘해서 여지껏 돌봄교실을 허덕이며 끌어왔겠는가. 힘들어도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보고자 노력해온 교사들의 지금까지의 노력이 폄훼되지 않길 바란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아동에서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복지차원의 돌봄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교육도 국가 주도 일변도이어야 함에는 문제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참담한 아동학대마저도 돌봄교육의 미흡으로 빚어지는 일이라고까지 말하며 돌봄교육이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억지에 가깝다. 그래서 돌봄교육만 확대되면 최근 가정의 해체와 인간성의 파멸에서 비롯된 잔혹한 아동학대가 멈출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가정과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을 사회와 국가로 떠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국가가 책임져 주는 정책들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은 도깨비방망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그럼 그 도깨비 방망이로 코로나나 먼저 막아 보시든가!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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