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원 정족수의 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해 웬만한 법안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승리에 취해 스스로 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면 인조반정 직전의 대북파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더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수난을 당한 ‘사화(士禍)’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4대(大) 사화는 연산군 때부터 시작되어 중종, 인종을 거쳐 명종 때까지도 계속됐다. 사화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라는 조선 최고의 대학자들이 배출됐다.

이황과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14개월 후 조식이 그 뒤를 따랐으니, 이들은 명실상부 동시대 인물들이리 할 수 있겠다. 이황은 낙동강 동쪽 예안에서, 조식은 낙동강 서쪽 지리산 일대에서 살았다. 그래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좌퇴계 우남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서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또 편지도 서로 주고 받곤 한 사이였지만, 이들 두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조식은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科擧)에 몇 번 응시했지만 37세에 과거 보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당시는 거듭되는 사화로 사회도 어지러웠고,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들이 정치를 쥐고 흔들어 그 폐해가 극심한 때였다. 조식은 입신양명을 위해 성리학을 공부하는 당시 사대부들을 혐오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세상일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평생을 오로지 학문과 제자 교육에만 힘쓰기로 한 것이다.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조식은 나라 돌아가는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555년 명종(明宗)이 조식에게 단성현(丹城縣, 현재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일대) 현감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자 그는 이를 거절하며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를 올렸다. 자신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사양의 말과 함께 임금의 정치가 잘못됐음을 준열하게 꾸짖고,  여인천하를 구가하던 문정왕후를 비판했다.

“…… 전하의 국사가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과 인심이 떠났다’라든가 ‘전하께서 종사(從事)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등의 말은 임금에게 던지는 최악의 비난이다. 더구나 ‘깊숙한 궁중(宮中)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다’며 문정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정말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문정왕후는 당시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명종과 문정왕후는 화가 났지만 함부로 조식을 죽이지는 못했다. 벼슬에도, 목숨에도 연연하지 않는 조식 같은 사람을 죽였다가는 오히려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일을 더 많이 그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식과 달리 이황은 단양 군수, 풍기 군수, 홍문관 교리, 대사성 등 몇몇 벼슬을 지냈다. 조식이 번번이 벼슬을 거부하자 이황은 조식에게 벼슬하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황은 조식에게 보내는 편지에 “벼슬을 하지 않는 일은 의리가 없는 것이니, 군신의 큰 윤리를 어찌 폐할 수 있습니까? … 임금께서 어진 인재를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기다리고 있으니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썼다. 이황이 의리까지 들먹이며 임금이 조식을 기다린다고 하니, 무작정 사양했다가는 군신 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불충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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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선생의 동상.

이 편지를 받은 조식은 자신의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댔다. “지난 겨울부터 허리와 등이 쑤시고 아프더니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라고 했다. 게다가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라고 했다. 병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으니 눈병 치료약인 발운산(撥雲散)을 구해 줄 수 없겠느냐고 답장을 보냈다. 조식이 하필 ‘눈병’ 핑계를 댄 것은 이황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못 본다고 비꼰 것이었다. 그러자 이황은 발운산이 아닌 당귀(當歸)를 구하는 중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당귀는 약초 중 하나이지만 그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면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라는 뜻이다. 이황 자신도 곧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조식이 먼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황과 기대승이 8년에 걸쳐 ‘사단칠정론’ 논쟁을 이어가고 있던 명종 19년의 일이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上等)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

이황의 대표적인 사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서로 다른 두 가지 원리로 모든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그의 제자였던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기대승은 스승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이(理)와 기(氣)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라며 논박했다. 이황은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제자의 지적에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었다. 이런 얘기를 가지고 8년이나 토론할 것이 뭐 있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후대 학자들은 이 토론의 결과로 이황의 사상이 보다 논리적으로 탄탄해지고 정밀해졌다고 평가한다. 그 유명한 논쟁을 조식은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는’ 일이라 치부해버린 것이다.

조식은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라 하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말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황이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얘길 들은 조식은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조식은 일생 한 번도 벼슬에 나간 적이 없지만 명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지은 시조를 보면, 그가 임금에 대해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 없건마는

서산(西山)의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해석: 추운 겨울철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굴에서 눈비를 맞으며 살면서

쨍한 햇볕은 물론, 구름이 낀 시원찮은 볕도 쬔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 해가 서산으로 졌다고 하니 눈물이 나는구나.)

이 시조에서 ‘해’는 명종 임금을 뜻한다. 명종에 이어 어린 나이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도 즉위 초에 조식을 두 차례 불렀다. 그러나 조식은 역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조선 최고의 직언(直言) 중 하나로 꼽히는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려 어린 임금이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했다. 조식은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川齋)라는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여유롭게 지낼 때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짓기도 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해석: 지리산의 양단수를 옛날부터 얘기로만 듣다가 이제 와 처음 보니,

복숭아꽃 떠오는 맑은 냇물에 산 그림자까지 어린 것이 정말 아름답구나.

아!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이 어디냐? 내 생각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인 것 같구나.)

인조반정 때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칼을 씻은 세검정.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칼을 씻은 세검정.

조식은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정인홍 등 조식의 제자들은 주로 사색 당파 중 북인(北人)이 됐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을 대거 등용했고 조식의 제자들은 조정을 독점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날 때 대부분 숙청당했다. 더불어 그들의 스승인 조식의 학파 자체가 이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앞에 쓴 조식과 이황과의 일화를 보면 왠지 이황이 조식보다 한 수 아래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황의 학문은 제자들에 의해 번성했지만 조식의 학문은 이단으로 배척됐다. 이황의 위패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에 영광스럽게 배향(配享)됐고, 그는 오늘날 지폐의 모델 자리까지 차지했다. 반면 조식은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게 됐다. 조식의 제자들이 정치적 싸움에서 패자(敗者)가 됐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세자 때부터 전란 극복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던 영민한 왕 광해군이 맥없이 왕 자리에서 쫓겨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반정(反正)의 표면적 명분은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았다는 점과 ‘폐모살제(廢母殺第)’였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북인 중에서도 대북파(大北派)가 조정 세력을 독점함으로써 곳곳에 만들어놓은 정적들에 의해 광해군은 옴짝달싹 못하고 왕 자리에서 쫓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주변을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도 없었다는 얘기다.

광해군이 사방에 수많은 적을 만들어내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바로 대북파였다. 대북파가 조정(朝庭) 세력을 독점함으로써 광해군은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균형 있게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대북파의 끝없는 욕심과 제어되지 않은 오만은 자신들이 모시던 왕을 파멸로 몰고 간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망국으로 치닫는 때는 여러 당이 싸울 때가 아니라 오히려 독점 세력이 발호할 때인 경우가 많다. 병자호란의 패배라는 망국적 사건을 초래한 인조반정은 반대파의 씨를 무자비하게 말려버린 대북파의 독재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을 급전직하로 기울게 한 것은 견제 세력이 없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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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묘.

최근 조(曺) 아무개 교수가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다, 또는 아니다, 하는 논쟁으로 느닷없는 혈통 논쟁이 일었다. 직계는 아닐지라도 같은 성씨를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결론이 어떻든, 모난 후손 때문에 저승에서 편히 쉬고 있는 자신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이 조식 선생에게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원 정족수의 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해 웬만한 법안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승리에 취해 스스로 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면 인조반정 직전의 대북파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더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무소불위로 보이는 여당의 옹호를 받는 인물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인조반정으로 모조리 숙청된 대북파의 스승 조식 선생의 후손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왠지 심상(尋常)해 보이지 않는다.

훌륭한 사상을 세우고 교훈적 삶을 살았던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들과 후손들에게, 과하면 반드시 넘치고 치우치면 반드시 기운다는 경계의 말씀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랬던 걸까?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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