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또 다른 얼굴 중우정치
자유 계속 누리려면 책임 뒤따라야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기레기’라는 말에 익숙해져있다. ‘기자+쓰레기’의 합성어인 이 신조어가 일상적인 단어로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얘기는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 언론의 자유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다른 나라의 이상한 통계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 통계작성의 기준이 좌익전체주의적 시각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언론의 자유가 그 도를 넘어 방종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누구라도 걸리면, 마녀사냥과 인민재판으로 보내버린다. 오보에 대한 책임은 없다. 기사는 처음부터 특정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 검찰은 기사에 따라 기소하고 법원은 설사 그것이 오보일지언정 언론의 눈치를 살피며 면죄부를 주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쯤에서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한번 살펴보자.
유력 국내 포털사의 국어사전에 ‘자유’라는 말을 치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영어는 어떨까. 옥스포드 사전에 ‘freedom’을 치면 “1.  freedom (of something) the right to do or say what you want without anyone stopping you 2. the state of being able to do what you want, without anything stopping you”라고 나오고, ‘liberty’를 치면 “freedom to live as you choose without too many restrictions from government or authority”라고 나온다.

Freedom과 Liberty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논증은 일단 접어두고, 적어도 옥스퍼드에서는 [법률]에서의 용례라는 안내 없이도 최소한 법적이거나 제도적인 의미, 다시 말하면 허용된 범위안의 행동이나 말이라는 뜻을 캐낼 수 있다.

다시 언론의 자유로 돌아가 보자.

우리 언론과 법조가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와 그 해석에 대하여 자유주의자인 미국의 홈즈판사는 1919년 Schenck v. United States판결에서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의 법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표현행위로 인해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그 표현행위는 보호되어야 하고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방첩법(Espionage Act of 1917)은 미군의 작전을 방해하거나 정당한 군명령에 대한 불복종, 적에 대한 응원행위 등을 금지하였는데, 이 법을 위반한 schenk에 대해서 홈즈 판사가 ‘유죄’를 선고하면서 설시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라는 보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그 기준을 넘어선 표현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기보다는 그 위험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위험으로 간주하고 언론의 방종만을 키워왔다. 적어도 광우병사태 및 최근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을 냉정하게 천착해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언론의 자유는 우월적 자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근대국가의 법원리이며 언론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것을 부정하거나 폄훼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다만, 왜 언론의 자유가 그렇게 보장되어야하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기존의 논의와는 좀 다르게 접근해본다.

모든 것을 똑같게, 누구라도 똑같게, 각 개인의 노력에 대한 대가는 무시해야 한다가 정의인 곳이 대한민국이지만, 건국부터 우리 대한민국 헌법상 평등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라는 배분적 정의를 의미했다. 이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가 1인 1표다. 즉, 사람의 역량과 식견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똑같이 1표를 준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헌법상 기계적 평등을 절대적으로 규정한 유일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은 중우정치라 했다. 전문가가 결정해야할 사안과 대중이 결정해도 좋은 사안을 구별하지 못하는 현대민주주의 사회는 항상 중우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여러번 그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투표 혹은 기표권을 평등의 원칙에 맞게 사람마다 다르게 배분을 하려해도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참정권의 영역은 시장경제의 합리적 원칙이 작동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라고나 할까.

이 배분적 정의에 맞지 않는 그 불합리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이 존재하려면 바른 언론이 존재해야한다. 언론을 통해 비전문가도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공부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합리적인 의견이 다수가 되는 과정이 일어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론은 엘리트가 가야하고 지적 정직성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한다. 근대국가에서 언론의 자유가 마치 면책특권처럼 최대한 보장되는 것은, 지적정직성에 대한 특혜이지 신분보장도 아니고 권력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진국에선 오보가 나면 사장이 사과를 하고 해당자를 해임하는 것이다. 최대한의 자유를 계속 누리려면 그에 대한 엄중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기 때문이다. 만일 스스로가 아니라 외부에서 책임을 묻게 되면, 그 땐 이미 그 자체로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한다라는 것을 선진국가의 언론기관은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 언론기관에서 이러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절망만 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SNS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매체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기레기를 퇴출하는 방법은 역시 우리에게 달렸다.

문득, 방종의 뜻이 궁금했다. 역시 유력 국내 포털사의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제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음”
앞서 국어사전 속의 ‘자유’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방종과 자유를 구별 없이 산 지 너무 오래됐다.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변호사, 법무법인 에이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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