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성과 이름까지 중국식으로 창씨개명하고,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고 날조했다. 세종이 15세기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까지 한문을 공용어로 사용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은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세운 화교국가이며, 한국의 영토는 곧 중국 영토라는 인식이 뇌에 들어가 박혔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한중(韓中) 동조론의 뿌리다.

#1. 폭발적으로 늘어난 21세기판 소중화주의자들

언제부터 한국인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2000년 필자가 월간조선 기자 시절 개혁개방으로 대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현장을 취재하면서 “중국에 와서 큰 소리 치면서 사업하고, 중국인들의 발마사지를 받는 것은 우리 대가 끝이겠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이제 거칠 것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들이 좀 먹고 살 만하게 되니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움)를 버리고 화평굴기(和平屈起), 돌돌핍인(咄咄逼人·기세등등하게 상대를 압박함), 대국굴기(大國堀起)를 외치며 기고만장하여 세계 패권에 도전하고 나섰다.

한국에는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친중(親中)·종중(從中)·애중(愛中)·뻑중(중국에 뻑 간 상태) 인사들이 바글대고 있다. 그저 문화인류학적 취미생활 정도로 중국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에 최고 예우를 갖춰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예를 표하고 상국(上國)인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이 나라, 이 민족을 중국에게 갖다 바치지 못해 환장한 21세기판 소중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 및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아니다. 애오라지 마오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한 공산 전체주의다. 미안하고 안 된 이야기지만, 지금 지구상에 중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화민국(타이완)과 중공(중국공산당)만 존재할 뿐이다. 한국은 이미 노태우 시절, 타이완을 차버리고 중공에 투항하지 않았는가.

#2.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로 나라 말아먹은 이유

조선 후기를 세도정치로 말아먹은 집단이 안동 김씨다. 안동 김씨가 조선에서 방귀깨나 뀌게 된 이유를 아시는가? 김상헌이란 위인 덕분이다. 병자호란이 닥치자 남한산성에서 애오라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의 명분론은 그 모든 논리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가 싸우고자 했던 대상은 상국 명나라를 불편하게 만든 여진 오랑캐들이다. 그는 상국 명나를 섬기기 위해 여진 오랑캐와 결사항전을 주장한 것이다.

그가 주장했던 주전론(主戰論)이 현실적이었느냐, 몽상이었느냐를 따지고 드는 것은 ‘주자성리학의 천국’에서는 부질없는 일이다. 김상헌은 국왕 인조 앞에서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는 등 온갖 행패와 난동을 부렸다. 인조가 여진족 추장(청 태종)에게 항복을 결정하자 그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김상헌은 며칠 간 식음 전폐 후 목을 맸으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구차하게 목숨을 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주화론(主和論)의 대부 최명길은 “가족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니 어찌 죽을 수나 있었겠는가” 하고 비난했다.

일본 사무라이들처럼 깨끗하게 죽지도 못해 체면이 크게 손상된 김상헌은 그 길로 낙향 은거했다. 1639년 오랑캐 청나라는 산하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중화대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군사 파병을 요구했다. 그 결과 1640년 4월, 임경업을 지휘관으로 하여 전선 120척과 포수 4,000명, 사수 1,000명, 수군(格軍) 1,300명을 만주로 파병했고, 화약 1만근, 군량미 1만 7,000석을 함께 보냈다(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메디치, 2016, 89~90쪽 참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군대가 만리장성 넘어 베이징에 진입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대 모화사상에 쩔어버린 주자성리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하늘이나 다름없는 상국을 치기 위해 하국(下國) 조선이 군대를 보내다니…. 김상헌은 조선군의 파병을 극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국대륙 평정을 눈앞에 두고 있던 청나라의 분노가 폭발한다. 김상헌은 결국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끌려가면서 읊었다는 시조가 한 동안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냐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작품이다.

#3. 중화 흠모하고 섬기면 대대손손 부귀영화

김상헌은 오랑캐 땅으로 끌려가 6년여 옥고를 치렀고, 1645년 소현세자의 귀국 때 풀려나 함께 귀국했다. 효종 시절 그는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를 정벌한다는 정치적 쇼였던 ‘북벌’의 선명한 화신으로 떠오른다. 인구 3억의 대국, 조선보다 병력은 수백 배요, 국력은 수천 배인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선동에 조선의 대신들은 찍 소리도 못 냈다. 어떤 현실적 이유도 “오랑캐 타도”라는 명분 앞에서는 존재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김상헌은 화끈한 주전론 설파와 청에 끌려가 6년여 볼모 생활을 한 덕분에 ‘명분의 나라’ 조선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김상헌은 일약 조선의 정신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이것이 19세기에 안동 김씨가 대표적인 세도 가문으로 등장하는 정서적 배경이다.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宰相)과 판서(判書, 장관)·참판(參判, 차관급)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순조비·헌종비·철종비 등 왕비 3명,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다. 나라가 결단 나든 말든 애오라지 중화의 나라를 섬기고, 오랑캐의 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선동 덕분에 김상헌의 가문은 오래도록 꿀단지를 빨았다.

#4. 중화 천하일가를 이루려는 사람들

조선 주자성리학 지식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중추적 이데올로기가 중화사상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관념이다. 오늘날 한국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치인·언론인·학자·운동권 출신 나부랭이들의 정서도 이들과 완전 동질이다. 그들은 중화 문화를 종족이나 국가보다 우선했고, 그것을 수용하고 본받는 것을 동방예의지국의 기본이라고 믿었다. 사대 모화를 체질적으로 습득하면서 자발적 충성심으로 중국에의 종속을 자처했다.

그들은 중화 천하일가에 동참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섬겼다. 그 결과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중국 주(周)나라 무왕으로부터 고조선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기자를 시조로 삼고, 우리가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기자가 정말로 고조선에 왔는지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았다.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고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는 기자(箕子) 상. 학술적으로 기자가 고조선에 왔는지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소중화주의자들은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기자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족보를 날조했다.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해주 기씨 등이 기자를 자기들 시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고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는 기자(箕子) 상. 학술적으로 기자가 고조선에 왔는지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소중화주의자들은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기자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족보를 날조했다.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해주 기씨 등이 기자를 자기들 시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여부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것이 명예스럽다고 여겼으니까. 그 결과 이 나라의 청주 한(韓)씨, 태원 선우(鮮于)씨, 해주 기(奇)씨, 서(徐)씨 등은 자신들이 기자의 후예라고 족보를 꾸며댔다.

#5.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중국식 창씨개명

각 씨족들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족보는 거의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주자학이 조선에서 민간에까지 확산되는 시점에 편찬되었다. 씨족의 문중들은 자신들의 혈통과 가계를 미화하기 위해 민족의 시조를 단군에서 기자로 바꿔치기 하듯, 자신들 성씨의 시조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날조했다. 사대 모화사상에 쩔어버린 주자성리학 천국이기에, 자신들 시조가 중국에서 도래했다고 주장하면, 즉 내가 중국인의 후손이면 그만큼 권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한국인 족보의 80%는 그 시조를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선의 행세깨나 하는 문중들은 족보 편찬 과정에서 중화 방식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그들은 중화식 창씨개명을 너무나 자랑스러운 행위로 인식하고 행복해 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성만 중국식으로 갈아치운 것이 아니다. 이름마저 중국식으로 갈아치웠다. 신라 초기만 해도 존재했던 혁거세·알지·거칠부 같은 토종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한문식으로 짓는 것이 대유행했다.

고려말 주자학에 심취한 정몽주는 “꿈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본다”는 뜻에서 이름을 몽주(夢周)라 지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조선 땅이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의 이상 국가로 추앙받던 주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정도전 이름은 도(道)를 전한다(傳)는 뜻이다. 여기서 도란 물론 ‘주자의 도’, 즉 조선을 동주(東周)로 만드는 것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성웅 이순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중화를 떠받드는 큰 신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들 넷의 이름을 지을 때 중국 삼황오제 이름을 차용했다. 이순신의 '순(舜)'자는 순 임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성웅 이순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중화를 떠받드는 큰 신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들 넷의 이름을 지을 때 중국 삼황오제 이름을 차용했다. 이순신의 '순(舜)'자는 순 임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성웅 이순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중화를 떠받드는 큰 신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작명 과정에서 중국의 전설적인 삼황오제 이름을 차용했다. 첫째 아들은 복희씨(伏羲氏)에서 한 글자를 따 이희신(李羲臣)으로 지었다. 둘째는 요(堯) 임금에서 한 글자를 빌려 이요신(李堯臣)이 되었다. 셋째는 순(舜) 임금 이름을 따서 이순신(李舜臣)이요, 넷째는 우(禹) 임금 이름을 따서 이우신(李禹臣)으로 지었다(박치정, 『한국 속 중국』, 도서출판 삼화, 2017, 293쪽).

구한말 단발령,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은 대부분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주자성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의 탄압으로 조선 땅에서 의병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 두만강 건너 만주,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의 의병 봉기는 조선의 임금을 모시는 충성심의 발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중화의 파괴를 걱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박치정, 앞의 책, 82~83쪽).

#6. 중국식 창씨개명은 OK, 일본식 창씨개명은 No?

식민지 시절 일본은 한국인을 상대로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중화적 종법제도가 뿌리내린 조선을 중화권에서 분리하여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 한국인들이 창씨개명을 지극히 수치스럽게 여기고 혐오·저주하는 이유는 창씨개명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 문명’이 아니라, 주자성리학자들이 ‘왜놈’이라고 멸시 천대했던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나 다름없는 중화 문화에서 떼어내려 하자 이 땅의 중화주의자들이 극심하게 반발 저항한 것이 창씨개명의 실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제기해보자. 중국식 창씨개명은 누가 강권하거나 감언이설로 속인 것이 아니다. 자기들 스스로 나서서 성(姓)과 이름(名)을 중국식으로 갈아치웠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자발적으로 중화적 창씨개명을 통해 중화 문화에 투항한 것이다. 그 결과 이름만으로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중국식 창씨개명은 되고 일본식 창씨개명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지도자와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중화사상, 소중화, 심지어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에 미쳐 있다는 증거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정책을 도입하면서 서울에 설치한 창씨 상담소. 한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식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시행했다. 따라서 중국식 창씨개명은 열렬환영하면서도 일본식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있다. 창씨개명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문명이 아니라 조선의 주자성리학자들이 멸시 천대한 '왜놈들'이기 때문이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 정책을 도입하면서 서울에 설치한 창씨 상담소. 한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식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시행했다. 따라서 중국식 창씨개명은 열렬환영하면서도 일본식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있다. 창씨개명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문명이 아니라 조선의 주자성리학자들이 멸시 천대한 '왜놈들'이기 때문이다.

#7.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정신상태가 이쯤 미친 나라이니 중국인들은 한국을 자신들의 하류쯤으로 여긴다.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원(孫文)은 “중국이 혁명을 완수하고 부강해지면 태국이나 조선, 베트남이 중국의 한 성(省)으로 복속시켜 달라고 요구해 올 가능성이 있다”(배한경, 『쑨원과 한국』, 한울아카데미, 2007, 295쪽)고 모욕해도 아무도 시비하지 못한다.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蔣介石)도 제2차 세계대전 중 한반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했다. 즉 중국 국민당 정부는 전쟁이 끝나면 한강 이남에 미국과 영국이 진주하고, 한강 이북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려 했다. 마오쩌둥(毛澤東)도 1936년 7월 16일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중국이 상실한 식민지의 하나이자 여전히 중국의 세력권 내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중국공산당의 후예인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이나 다름없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렇게 심한 모욕을 해도 반박할 논리와 근거가 막막하게 되었다. 이 땅의 주자성리학자들이 입만 열면 ‘중화 본가’를 자처한 덕분이다.

지난 2017년 미중 정상회담 당시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인들은 자기 조상을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날조하고, 중국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뜨거운 소중화주의로 중국을 섬겨왔으니, 중국 지도자들이 입만 열면 이런 망언을 해도 항의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지난 2017년 미중 정상회담 당시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인들은 자기 조상을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날조하고, 중국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뜨거운 소중화주의로 중국을 섬겨왔으니, 중국 지도자들이 입만 열면 이런 망언을 해도 항의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8. 단일민족 순혈주의의 진짜 의미

현재의 한국인들이 종교처럼 숭앙하는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가 ‘단일민족’이란 순혈주의다. 이것의 진짜 의미는 여진이나 몽골, 흉노의 혈통이 끼어드는 것은 안 되고, 중국 혈통이 끼어드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저지른 거대한 사기극이다. 성씨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날조하여 중국인(漢族)과의 일체감과 연대감에 만족하는 구제불능의 중화사상이 만들어낸 판타지다.

성과 이름까지 중국식으로 개명하고,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고 날조했다. 세종이 15세기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까지 한문을 공용어로 사용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은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세운 화교국가이며, 한국의 영토는 곧 중국 영토라는 인식이 뇌에 들어가 박혔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한중(韓中) 동조론의 뿌리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중인환시리에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같은 나라.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中國夢) 함께 하겠다”고 읍조리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 운동가 나부랭이들의 친중·종중·애중·뻑중 행태를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하면 10~20년 후에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일개 성(省)으로 흡수 동화되어 한반도 전체에 중공의 오성홍기 깃발이 펄럭일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하다.

지난 6일,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 공군의 B-1B 전략폭격기가 동중국해 상공을 비행하면서 조종석에서 성조기를 펼쳐 보이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의 연구소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미국 측 주장이 과학적 근거로 밝혀질 경우 중국공산당은 지구에서 퇴출될 것이다.
지난 6일,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 공군의 B-1B 전략폭격기가 동중국해 상공을 비행하면서 조종석에서 성조기를 펼쳐 보이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의 연구소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미국 측 주장이 과학적 근거로 밝혀질 경우 중국공산당은 지구에서 퇴출될 것이다.

#10. 공산 전체주의, 지구에서 퇴출 임박

기자는 그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 사태의 본질은 시진핑과 문재인이 손잡고 전 인류를 상대로 생화학전, 바이오 테러를 벌였음을 주장한 바 있다. ‘코로나19’로 용어가 세탁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처가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WIV)라는 미국 측의 주장으로 인해 미·중 대결은 점입가경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이제 곧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한에서 의도적으로 유출된 사실이 명백한 근거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되면 생화학전의 주범인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을 비롯하여, 그 협조자나 다름없는 문재인 정권은 더 이상 존속할 국제법적 근거를 상실 당한다.

이들 정권 담당자 및 및 관계자들에게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인적·경제적 손실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금이 청구될 것이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해당국가의 모든 금융자산 및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봉쇄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생존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고 단호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생화학전, 혹은 바이오 테러를 벌이는 적을 향해서는 핵무기 공격이 정당화된다. 지금 이 순간, 동아시아 지역에 여러 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작전배치 된 데 이어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스텔스 전략폭격기가 성조기 퍼레이드를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이해가 가시는가?

대한민국의 21세기판 소중화주의자들이여, 제발 미몽에서 깨어나시기 바란다. 당신들이 꿈꾸는 세상, 공산전체주의의 막장 드라마는 곧 끝날 것이다. 당신들이 지금까지 국내법·국제법을 어기고 미친 짓을 해 온 행위를 징벌하기 위한 모든 준비절차는 끝났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