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선진 문물을 접한 조선의 관리들은 당시 무엇에 관심을 두었을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외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나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로지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는 국왕의 안전 확보만을 위해 전전긍긍했던 것이 아닌가, 또는 서로 반목하느라 볼 것을 제대로 못 본 것 아닌가 해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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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조선 말기의 관리 민영환이다. 1896년 4월1일 제정(帝政)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제물포항을 떠난 민영환·윤치호 등은 중국·일본·캐나다·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이르렀다. 그런데, 돌아올 때에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였으니,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다. 그중 프랑스어를 계속 배우고 싶었던 윤치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행과 헤어져 프랑스로 갔다. 그래서 최초의 세계 일주자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러시아로 갈 때는 조선에서 아관파천(1896년 2월)이 일어난 직후로, 우리 역사상 러시아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다. 처음 특사의 명령을 받았을 때 민영환은 “…나는, 내가 결코 할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처벌을 받기보다, 여기서 전하의 명(命)을 따르지 않아 처벌받는 것이 낫겠다…”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 직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말로 미루어볼 때 당시 러시아와 조선은 서로 간에 기대하는 바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군주가 러시아에서 얻고 싶은 바는 러시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민영환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누군가 민영환에 대해 어떤 거짓 비방을 고종에게 하더라도 보호해줄 것과 민영환이 적어도 1년 동안은 유럽 여행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민영환을 설득할 수 있었다.

민영환과 윤치호는 각자 일기를 열심히 써서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윤치호는 출발 직후인 4월 11일 민영환에 대해 “그는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이다. 그는 셔츠를 입고 양말을 신거나 외투의 단추를 채우는 일 등 모든 일에 시중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 잠자고 먹는지 내게는 신기한 일이다. 담배는 훌륭한 이 신사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련, 잎담배, 파이프용 담배를 모으면 러시아에 가서 담배 가게를 쉽게 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준비한 약재들은 아마 그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성이 있고 유머 감각도 있는 신사이다. 그는 먹거나 마시는 일로 자신이 조롱을 당하거나 부끄러운 일에 노출된다면 분명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것이다. 이 점이 그의 진면목이다”라며 민영환에 대해 약간의 조롱을 섞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이런 감정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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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모스크바 크램린궁(宮) 안에 위치한 우스펜스키 성당(왼쪽). 이곳에서 1896년 5월26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1896년 5월20일 오후 세 시, 그들은 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목적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5월21일 일기에 윤치호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오늘 아침 조선 국기가 이 신성한 도시 모스크바에 게양됐다”라고, 다소 감동 어린 어조로 이 사실을 기록했다. 또 그날 있었던 ‘황제 부처(夫妻·부부)의 도시 입장 행렬’에 대해서는 “내가 이제껏 본 어떤 장면보다 더 장관이었다. 군인, 관리, 수행원, 말, 마차와 모든 것이 거의 금은으로 덮힌 것처럼 보인다. 황제는 홀로 간편한 서양식 옷을 입고 말에 반듯하게 타고 있었다. 조선 국왕의 모습을 추하게 하는 궁내관, 내시, 하인 같은 떨거지는 없다. 러시아를 다스리는 이 군주 주변에는 그 같은 역겨운 존재들이 하나도 없다”라며 감탄과 더불어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한 불만도 빠뜨리지 않았다.

1896년 5월22일 오후 두 시, 사절단은 크렘린궁(宮)에서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하례 자리였다. 민영환은 조선에서 통역으로 데려간 특명전권공사 김도일을 중요한 순간에는 통역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김도일은 국어 어휘력이 너무 부족해 러시아 황태후를 ‘황제 에미’라고 옮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와의 첫 접견 때에는 윤치호가 영어 통역을 했다.

황제는 민영환과 윤치호에게, 어느 경로로 왔느냐, 모스크바의 경치가 어떠냐며, 유창한 영어로 질문했다. 민영환은 이 자리에서 고종의 친서를 황제에게 전했다. 친서에는 ①조선 군대가 신뢰할 만한 병력으로 훈련될 때까지, 국왕의 보호를 위한 경비병(警備兵) 제공 ②군사 교관 파견 ③ 국왕 측근에서 궁내부(宮內府)의 일을 돌볼 고문, 탁지부 고문, 광산과 철도 고문관 등 각 한 명씩 파견 ④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에 이익이 되는 전신선(電信線)의 연결과 전신 전문가 파견 ⑤일본에 진 빚을 청산하기 위한 300만 엔(円)의 차관 제공 등 조선 측 제안 5개항이 들어 있었다.

대관식은 크렘린 안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열렸다. 그런데 그 성당은 장소가 좁아 러시아의 최고위 인사들과 외국 사절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모자를 벗어야 했지만 민영환은 갓 벗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대관식이 열리는 1896년 5월26일 조선 사절단은 성당에 입장하지 않기로 했다. 모자를 벗지 않아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나라는 조선뿐만은 아니었다. 청나라, 터키, 페르시아 사절단도 모자 때문에 밖에서 대관식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성당에서의 대관식은 세 시간 넘게 걸렸고 식이 끝난 오후 두 시경부터는 황궁의 한 홀에서 귀빈들을 위한 풍성한 연회가 제공되었다. 1896년 5월28일에도 하례 행사와 축하연이 계속되었다. 밤 아홉 시부터 열린 만찬에는 ‘몇 천 명인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참석했는데 이날은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남자는 황후의 손을, 여자는 황제의 손을 잡고 궁전 안을 도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을 철저히 교육받았을 민영환은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날 시 한 편을 남겼다.

서양에서는 예부터 여인을 소중히 여겨 / 귀한 손님과 같이 앉는 것을 꺼리지 않네. /

입맞춤과 손잡음에 정이 돈독해지고 / 술 시키고 차 맛을 말하니 이야기 더욱 새롭구나. /

허리는 버들처럼 가늘고 살결은 옥과 같고 / 붉은 화장 하지 않고 눈썹 그리지 않아도 /

아름다운 모습 자연스레 갖췄으니 / 어여쁘고 가녀려 차마 가누기도 어려워라…

1896년 5월29일에는 조선 국왕이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을 제국 문서보관소에 맡겼다. 조선에서 가져간 선물은 자수 병풍 두 개, 큰 대나무 발 네 개, 자개장 한 개, 놋쇠 화로 두 개 등이었다. 윤치호는 국왕이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로는 너무 빈약하다며 ‘가난한 조선’을 한탄했다.

다음날 황제가 군중에게 선물을 주는 행사가 있었다. 선물꾸러미에는 손수건 한 장, 컵 한 개, 케이크 한 조각, 대관식 프로그램 한 장, 큰 소시지 한 두름이 들어 있었다. 분배하는 관리는 40만 개를 준비하였다고 했는데 이를 나누는 과정에서 큰 참사가 있었다. 군중은 꾸러미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아우성치며 달려들었고 이 난리통에 1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윤치호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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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윤치호 등 조선사절단 일행이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페테르고프.

민영환은 친서에 담긴 5개항 가운데 국왕 보호를 위한 첫 번째 항이 가장 중요하다며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에게 거듭 강조했다. 군사 교관 200명을 파견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왕을 보호하고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도록 해야 하며, 조선의 국왕이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궁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러시아의 병력 협조가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5개항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 답변은 1896년 6월30일에야 사절단에 전달되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①조선 국왕은, 그가 원하는 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수 있다. 만약 궁궐로 돌아간다면 러시아 정부는 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그러나 경비병은 러시아 공사관에 남는다 ②러시아 정부는 군사고문 문제에 대해 조선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숙련된 고위 관리를 조선에 파견할 것이다. 그의 첫 임무는 국왕을 보호할 수 있는 경비병을 조직하는 것이다. 또 조선의 경제 상태를 조사할 또 다른 전문가를 파견할 것이다 ③이 두 사람의 믿을 만한 관리는 조선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의 지시 아래 고문으로 일할 것이다 ④차관 문제는 조선의 재정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신중하게 고려하겠다 ⑤ 러시아는 두 나라 사이의 육상 전선 가설에 동의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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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이 “참으로 진기한 물건”이라고 극찬한 황금 나무, 황금 공작, 황금 닭.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미술관이 소장중이다.

이들 사절단은 1896년 7월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페테르고프에서 황제를 다시 만났다.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경로를 묻고 다과를 대접했다. 사절단은 1896년 8월1일 에르미타쥐 미술관에 방문한 외에도 러시아에 있는 동안 탄약공장, 조선소, 유리공장, 양초공장, 농업박물관, 천문대, 종이공장 등 각종 군사‧교육‧산업 시설과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윤치호를 제외한 나머지 사절단은 1896년 8월19일 모스크바를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은 일단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탔다. 니즈니노브고라드에 도착한 그들은 볼가강(江)을 이용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카잔을 거쳐 사마라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타서 우파, 옴스크 등을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닿았다. 그런데 당시 횡단열차는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만 개통되어 있었기에 그곳에서 마차로 갈아탔다.

마차가 달리는 길의 양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 나무가 울창한데, 길은 돌 한 덩이도 없는 부드러운 흙길이었다. 더럽고 습한 진흙으로 마차가 나아가기 힘들었지만 너비는 마차 두 대가 오갈 만큼 넓었다고 민영환은 회고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는 화륜선을 타고 바이칼 호수를 건넜다. 화륜선은 증기기관으로 물레바퀴 모양의 추진기를 돌려 움직이는 배였다. 호수를 건넌 후 이들은 미소바야라는 곳에서 다시 마차를 탔다. 치타, 네르친스크를 지나 시들예전스카야라는 곳에서는 다시 배를 타고 아무르강에 오른 이 배는 하바로프스크를 지나 이만까지 왔다. 이만에서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한 이들은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본디 출발지인 제물포로 돌아왔다.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1896년 10월18일로, 조선을 떠난 지 6개월여 만이였으며, 모스크바를 떠난 지 두 달 만이었다.

120여 년 전 러시아를 방문한 이들의 여행기는 책으로 엮여 지금도 읽히고 있다. 민영환은 담백하게 보고 들은 것만 기록하고 그 사이사이에 자신의 감흥을 한시로 표현했다. 그런데 윤치호는 자신의 상사였던 민영환에 대한 불만 등 개인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유럽의 선진 문물을 접한 조선의 관리들은 당시 무엇에 관심을 두었을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외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나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로지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는 국왕의 안전 확보만을 위해 전전긍긍했던 것이 아닌가, 또는 서로 반목하느라 볼 것을 제대로 못 본 것 아닌가 해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그나저나 코로나19 때문에 가지 못 하는 나라가 돼버린 러시아가 문득 궁금해진다. 민영환 일행이 러시아에 발을 들인 5월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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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노야르스크 기차역. 당시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은 모스크바에서 이곳까지만 개통되어 있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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