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이후, 더욱 확산된 패배주의를 보다
‘존버’의 시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승리의 DNA를 끄집어 내자!

최공재 객원 칼럼니스트

전장을 잃은 전사는 존재의미가 없다.

근 한달간 모든 활동을 접고 조용히 지냈다.

일종의 선거후유증이지만 다른 이들과의 후유증과는 사뭇 다른 후유증 때문이다.

문화전쟁을 하던 딴따라에게 지역구 도전(그것도 전남 나주/화순이라면)은 필자의 모든 것을 걸고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문화전쟁의 마지막 전투라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필자의 도전은 황당한 상황으로 인해 멈춰야 했고, 칼을 꺼내 보지도, 썩은 무라도 베어 보지도 못한 전장의 전사는 그렇게 존재의미를 상실했다.

그건 본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쪽팔림(죄송하지만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의 쓰나미를 맞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필자를 걱정해주신 몇몇 분들은 그래도 이름은 알렸지 않느냐며 위로를 해주시지만 그건 스스로 전사가 되고자 했던 필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죽으려고 작정한 놈에게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그냥 가는 거다.

영화 황산벌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호랑이는 거죽(가죽)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땜시 뒤지는 것이요. 이 인간아~!”

그래, 이름이니 명예는 죽고 난 후의 문제인 것이다.

 

선생님, 당신은 진 적이 없습니다.

총선 전, 필자는 경북의 몇 군데 지역을 돌며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대로 가다간 폭망이라는 것은 이미 20대 공관위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보수진영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보기 위해서였다.

문화전쟁의 위험성과 이번 총선에서의 갬성코드를 호소했지만 결론은 뭐 언제나 버킹검이었다.

필자의 이용남 교수가 문화전쟁과 선거용 기획영화들의 위험성에 대해 강연할 때 한 여성분께서 연신 눈물과 긴 한숨을 내쉬며 졌네, 졌어를 반복하신다.

속으로 화가 났지만 그 분께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을 드렸다.

선생님, 선생님을 비롯해 우파는 진 적이 없습니다. 웬 줄 아세요?

우린 싸운 적이 없으니까요. 지는 것도 싸워야 나오는 결과입니다.”

아마도 그 분은, 그리고 이 글을 읽을 상당수의 보수진영 분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싸워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글로 인해 기분이 상하신 분들이 계실지라도 어쩔 수 없다.

싸워보지도 않은 싸움에서 긴 한숨과 졌다는 탄식만 하고 있는 모습은 패배주의자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번 솔직 해져보자. 이번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건 한심한 패배주의자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우리의 자화상은 아니었나?

경북에서의 강연 이후, 필자는 더욱 더 확실하게 총선의 패배를 예감했다.

부족한 필자가 사지인 전남지역으로 출마를 결심하게 된 여러 계기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총선 이후, 더욱 확산된 패배주의를 보다.

한달 간, 자발적 근신을 끝내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신발끈을 동여맸다.

초토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영남과 호남 모두를 찾아 다니며 동지들과 전우들을 만났지만 필자가 놀란 건 더욱 더 확산된 패배 의식이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영남은 스스로 영남당으로 전락하며 전국정당으로서의 모습을 포기한 채, 패배의 원인분석과 함께 전국 보수정당의 확산작업에 대한 고민은커녕 극단적 지역 이기주의로 빠지고 있었다.

잠시, 몇몇의 사람들로 영남을 그렇게 판단하지 말라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미 1년 전부터 TK지역에서부터 감지된 흐름이었음을 말하고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자 한다.

호남지역은 더 심각했다. 전국정당의 모습을 포기한 직격탄의 결과물이 보였다.

이미 지난 지방선거의 패배로 힘겹게 운영되던 당협들마저 해체가 된 상태에서 후보들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호남보수우파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 적진에서 자신을 던지시던 분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말하며 갈 길을 잃은 듯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수정당은 전국정당으로서의 책무를 스스로 포기하며 자신들의 알량한 체면과 안위만을 아직도 쥐어 잡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4번의 전국 선거 참패 후, 이정도까지 무너졌으면 이제 아무리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어서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진짜 제대로 된 싸움이 시작되기에 동지와 전우들을 찾아 전투력을 찾으려던 필자의 부족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판단은 오히려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났던 길에서 그렇게 처참히 무너졌다.

고구려를 꿈꿨는데 삼국시대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고, 한달 간 자숙하며 생각했던 모든 계획들은 전부 도로아미타파가 되었다.

 

존버의 시대, 그래도 희망은 있다.

믹서기에 갈고, 전기톱으로 자르고, 불태워 버려도 시원치 않은 패배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보수우파의 희망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존재할 것이며, 누군가 그것을 다시 우리의 가슴에 새길 것이다.

그것이 언제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남았지만, 필자가 보기엔 희망은 이미 촉발되었다.

그 촉발의 시작점은 여러분들이 믿기 어렵겠지만 문화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국내 주사파들의 문화계 침투가 첫 진지전인 것처럼, 산업혁명 이후 문화산업의 폭발적 욕구가 터져 나온 것처럼, 그렇게 모든 혁명에 문화예술인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처럼……

한국의 보수진영은 문화계는 그냥 좌파들이라고 잘못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경제가 안 좋을 때 가장 타격을 먼저 받는 곳이 문화계고, 자본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곳이 문화계이며, 자신의 자유가 침해당했을 때 가장 먼저 행동하는 곳이 문화계다.

어찌보면 혁명적일 수 있는 이런 패턴을 두고 좌파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좌파는 될 수 없는 것이 기본 룰이다.

단지, 보수우파가 문화계를 외면시했던 결과물이 지금일 뿐이다.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끄집어 내어보자.

그저 정치에만 한정되어 예기한다면 공산당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겠지만, 문화적으로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펼쳐진다.

블라디미르 비쇼스키라는 러시아 롹가수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한대수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노래를 불렀고, 온갖 박해를 받았다.

그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영화 백야에서 발레를 추는 주인공들의 모습 위로 흐르는 그의 노래 야생마가 잘 보여준다.

구 소련의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 탈출한 발레리노 주인공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잘 표현한 걸작영화이자, OST인 것이다.

그런 비쇼스키의 음악들은 당시 소련의 모든 문화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렇게 해서 젊은이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담아 탄생한 사람이 바로 키노의 빅토르 최였다.

그는 좌파가 아닌 자유의 상징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자유를 갈망한 청년들의 행동을 촉발시켰고, 그것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성공으로 이끄는 대중적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것뿐인가?

히틀러가 영화와 문화를 대중선동의 도구로 전락시키자 독일의 신진문화인들은 그런 과거의 세력들과 단절을 선언하는 뉴저먼시네마운동을 일으키며 자유로운 예술셰계를 추구했다.

모든 것을 좌파들 편한대로 해석해 버리는 한국의 정치홍위병 영화계로 인해 이 자유를 위한 혁명이 좌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 황당하지만, 보수는 뭐 한 게 없으니 자업자득이다. 우리는 과연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을까?

문화계의 핵심은 좌파적 기질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물 좀 주소의 한대수씨가 박근혜 대선 때 그의 캠프에서 지지선언을 했다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어떤 임계점에 도달할 때 가장 먼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들이 문화예술계이며, 필자가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에서다.

그렇게 정치판 홍위병으로 전락해 나치처럼 행동하던 문화계에서 필자 같은 돌연변이가 처음 나오더니 그 뒤에 이용남 교수, 김규민 감독 등이 나타나고, 순수예술계에서 전시중 감작가같은 미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중문화산업에서까지 문화예술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구피에서부터 조현, 내시십분의 김영민 개그맨까지 이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문화예술인들과 엔터테이너들이 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진영에서 문화계를 잘 모르시기에 첨언을 드리자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문화계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밥줄 끊기고 매장당할 각오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위다.

필자가 망신창이가 된 후 십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유우파의 목소리를 내는 문화예술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생계형 좌파가 득시글대는 이 바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자유의지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어떤 의식의 흐름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임계점에서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에 힘찬 박수를 보내주시고,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첫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빅토르 최, 블라디미르 비쇼스키가 되고자 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펼치는 문화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정치권도 좌파도 아닌 일반인들(국민이라 불리는 대중)에게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젠 패배주의에 절어 행동하지 못하는 자들의 변화가 필요한 때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건 개개인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이며, 생존의 문제이다.

변화하지 않은 자는 도태되고, 변화하는 자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

한국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수많은 문화예술가들의 무덤 위에 곧 세워지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들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의 문제는 남겠지만, 도태될 존재들마저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승리의 DNA를 끄집어 내자!

서두에 보수진영은 싸워본 적이 없기에 진 적이 없다고 했다.

전체 진영의 관점으로 보면 솔직히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싸워본 적이 있고 보수는 분명 승리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게 625.

하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분명 싸워본 적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탄핵 이후, 4번의 선거 참패를 보면 이들이 분명 싸울 의지조차 없음을 알 수 있고, 남탓만 해대던 모습이 좌파적 기질 때문이 아닌, 싸울 줄도 몰라 겁을 먹고 몸만 사리는 비겁한 패배주의자의 모습임을 우린 인정해야만 한다.

싸워보지도 않으면서 졌다는 말은, 지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필자가 영화판에서 10년 동안 싸우고, 보수 내부에서 문화전쟁을 10년 동안 한 경험으로 여러분들께 단언컨데 지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아이들에게, 청년들에게 말하지 않는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이다.

실패 역시 행동해봐야 나오는 결과이고, 패배 역시 싸워봐야 나오는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 하나에 우리가 죽자살자 덤벼들 필요도 없다.

다음에 다시 일어서서 싸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싸움판을 보면 지면서도 계속해서 일어나 이길 때까지 싸우는 놈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놈은 언젠가 반드시 이기게 된다.

그가 계속 일어나는 원동력은, 졌을 때의 아픔보다 한번이라도 이겼을 때 그 승리의 맛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은 자들에게 그런 승리의 맛은 영원히 제공되지 않을 것이다.

눈치 슬슬 보다가 저 좌파들이 이제 완전한 기득권임을 알게 됐을 때 어물쩍 넘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 문화계의 생계형 좌파들의 연장선상인 것처럼 말이다. 그저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그들에게 승리의 dna는 분명 없다. 그건 과거의 기록이니까.

하지만, 패배주의에 빠진 여러분들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

전세계가 공산주의 광풍에 휩싸일 때 자유국가를 건설하고, 625를 통해 서울수복을 하며 자유를 지켜낸 승리의 dna가 여러분들이 세포 하나 하나에 심어져 있다.

글을 쓰거나 인터넷 방송을 하면 꼭 그럼 앞으로 뭘 해야 하느냐?’라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때 필자의 답은 그건 개개인 스스로 알아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시면 된다고 말한다.

감히 필자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보수우파의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하시라고 말하고 싶다.

제발, 제발 여러분의 핏속에 들어있는 승리의 DNA’를 끄집어 내셔라!

그리고, DNA를 세상에 퍼뜨리시라. 후손들에게, 지인들에게, 적에게 마저

그걸 끄집어 내신다면 지금 당장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것이다.

승리의 DNA!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무기다.

필자가 지난 십 수년간 저들과 싸우면서 매번 패배하면서도 계속 이 길을 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백 번을 져도 단 한 번의 승리로 너희들을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무기를 매섭게 꺼내어 사용하시길 부탁드린다.

필자 역시 마지막 전투를 위해 다시 전투의 현장으로 나가겠다.

윈스턴 처칠이 승리를 위해 나가는 우리를 향해 말한다.

If you going through, keep going!”

만약 당신이 지옥길을 걷고 있다면, 계속해서 전진하라!”

최공재 객원 칼럼니스트(영화감독 / (주)작당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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