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패인을 유권자들에 돌리는 통합당의 주장은 위선이자 오만
4,50대 다수 좌익화돼 패배했다는 논리는 궤변...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따져봐야
“무엇이 더 옳은가” 주제로 선거 임했던 서구 자유우파 진영
반면 국내 우파는 좌파 따라가기 바빠...‘2등 좌파를 누가 선택하겠나?’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선거는 끝났다. 자유우파 진영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아니 득표율로 보면 자유우파가 진 것은 아니며 미래통합당이 진 것일 뿐 자유우파 국민이 진 것은 아니라고 위안할 수도 있다. 그러한 반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유우파 국민들이 진 것은 아니라는 그 점을 유권적으로 대변할 방법은 없다. 결국 진 것은 진 것이다.

각종 언론에서 단말마적 분석들이 나온다. 특히 통합당 쪽에서 나오는 패인을 접하고 나는 오히려 그 잘못된 분석을 보면서 ‘이러니 질 수밖에 없었다.’라는 생각을 했다. 말이 보수고 우익이지 통합당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면 정치는 하고 싶은데 민주당에 끼지 못해 통합당에 있는 것 같다. 이 나라 자유우파 국민들이 그토록 극우고 못났으면 민주당에 공천신청을 했으면 됐고, 민주당으로 통합을 하면 됐다. 자유시민이 볼모로 잡혀있는 소위 보수진영의 모순을 이용해 배지를 달아보려 했던 그 위선은 보수정당에 있어서 젊고 늙었냐가 따로 없다. 자유 시민을 대변하지도 못했으면서도 그 유권자에게 휘둘렸다고 유권자를 비난하는 그 오만은 반드시 기억해두자.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분노만 할 수는 없다. 냉정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그 원인분석에 따른 행동을 우리는 당장 오늘부터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줍잖은 정치 논평가들은 대한민국의 유권자 다수가 좌파진영으로 형성됐다고 분석한다. 예전 같으면 4,50대가 되면 자연스레 보수화가 되었는데 이번 선거는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왜 4,50대가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럼 4,50대가 그렇게 됐고 사회 주류가 그렇게 됐으니 뭐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원인분석 하에 보수가 무슨 합리적이고 개혁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은 무책임한 분석이다. 그러한 무책임한 원인분석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법은 그 상대다수가 선택한 결정에 저항을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런 분석을 내는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가 합리적이고 개혁적이어야 한다는 원인분석에 대해 가장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해법이다. 동의하는가?

포스트 586세대는 기존 보수진영에서 말하는 가치를 경험적으로 공유하지 못한다. 안보, 한미동맹, 경제성장...등등. 시장경제를 無에서 有로 달성한 세대라면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바로 공감이 되나 당장 나부터도 전쟁을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한미동맹의 바탕 하에 경제성장을 함으로써 어제보다 오늘이 확연히 다른 나라를 살아본 적도 없다. 북한과 비교해보면 조금은 훼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정도의 자유경제 속에서 살았다. 솔직히 60대 이상 정도만 국민 소득 1천 달러에서 3만 달러의 속도를 즐겨봤을 뿐이다. 이미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가난과 전쟁은 경험이 아닌 교과서의 텍스트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경험은 비경험자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여기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대중에게 어필했던 방식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확신의 확산이었다. 세대를 떠나 그 비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유권자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레이건은 논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작은 정부와 감세, 일자리의 확산이 더 나은 국민의 삶을 약속한다고 주장했고 정부에 기대어, 세금에 기대어 삶으로써 젊은이들 스스로 미래에 얻을 성공을 차단하지 말 것을 설파했다. 이러한 방식은 조지 w, 부시에게도 이어졌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은 나도 너무 어릴 때라 책으로 배웠지만 부시 대통령 선거 때는 기억한다. 당시 부시를 지지했던 미국의 30대 가장의 TV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민주당을 찍으면 당장 내 손에 연간 200불 정도를 더 얻을 수 있지만 저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었습니다.” 거칠지만 트럼프도 이를 이어 받아 선거에서 이겼다.

역시 대처 수상을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누가 영국의 주인인가’라는 논쟁을 통해 보수는 귀족이 아닌 중산층과 중산층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대변인이라는 것을 설명했고 자유주의적 정책이 왜 옳은가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매력적이면서도 강한 어투로 설득했다. 노조와 국가의 세금에 절어 있던 영국의 기득권 국민들이 ‘현실은 달라!’라고 고개를 저을 때 젊은이들은 그 현실보다는 옳은 선택에 표를 던졌다.

흥미로운 것은 서구의 우파들은 우리의 보수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말은 진보가 맞지만 현실은 달라”가 아닌 “말은 보수가 맞고 현실은 더 맞아”라고 한다는 것이다.

복귀해 보자. ‘타다 금지법’ 같은 논쟁에서 혁신의 새로운 시장을 가로막았던 것은 누구인가. 국회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법원에서 막았다. 그런데 기어이 한목소리로 뒤엎었다. ‘100만원 퍼주기’ 논쟁이 나오면 200만원 감세로 가는 것이 차라리 포퓰리즘 대결을 해도 우파가 취할 수 있는 방식임에도 눈치 보며 좌파의 정책을 따라갔다. 옳은 것이 좌파의 논리라면 2등은 필요 없음에도 선거를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무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일단은 이겨야 하지 않겠냐는 절박감 속에 유권자가 인질이 될 수밖에 없는 선거도 끝났다. 어쨌든 누군가는 빈 공간을 채울 것이고 어쨌든 그 채워진 공간이 또다시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원인분석과 대처도 각자 다를 것이다. 다만 포스트 586세대 우파로서 전쟁을 겪지도 가난을 겪지도 않은, 군사독재도 겪어보지 않은, 고도성장의 단물을 먹어본 적도 없는 내가 자유우파가 된 이유를 그 해법으로 제시해보고자 했다. 지더라도 제대로 말이라도 하고 지면 억울하지라도 않아서다.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