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다운 공약이 보이지 않는다..."선출될 후보가, 지역민의 대표로서, 나라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길거리 유세용 차량에 도우미들을 데려다 노래를 시키는 것, 앞뒤로 광고판을 몸에 걸고서 손을 흔드는 선거 운동...'후진적'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크고 작은 선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구태의연한 선거 행태를 과감히 먼저 벗어던지는 것은 누구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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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텔레비전 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노출되는 수많은 약 광고에서는 약의 효능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약효보다는 약 이름 알리는 데 주력하는 광고가 많다. 약 광고에는 특히 여러 가지 규제가 있어 그렇다고도 한다. 그런데 소비자에게 복잡한 성분이나 효능까지 알릴 필요는 없고 그저 약 이름을 외워 약국에 가서 “○○○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게만 하면 된다는 전략도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듣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약 이름이 머릿속에 각인되도록 반복적으로 약 이름을 강조하는 광고도 있다.

사실 소비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 소비자도 약의 자세한 효능이나 성분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약국에 가서 “저는 지금 머리가 아픈데 두통을 멎게 하는 적당한 약을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직접 “000 약 주세요”라고 귀와 입에 익은 약 이름을 대며 원하는 약을 요구한다. 비전문가인 소비자는 전문가인 약사가 약을 추천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간혹 약사가 “그 약과 효능이 같은, 아니 더 좋은 다른 상표의 약을 드려도 될까요?”라고 묻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런 제의를 받으면 약간 기분이 나빠지기까지 한다. 약사가 마진이 더 큰 약을 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꽤 긴 날짜 동안 수많은 논란과 갈등을 거쳐왔다. 어쨌든 며칠 후면 샴페인을 터뜨리든 파국에 이르든 결판이 날 것이다. 그런데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는데 선거판은 아직도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국민이 첫 선거를 치를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아니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무엇보다 공약다운 공약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결국 공약(空約)이 되든 진정한 공약(公約)이 되든 ‘공약’은 선거의 꽃이다. 물론 후보 개인의 품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후보가 지역민의 대표로서 나라 발전을 위해, 지역을 위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구만 하더라도 어떤 후보에게서도 국회의원으로서의 공약 선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선거 홍보용 팸플릿에는 자신이 당선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써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안전한’ ‘깨끗한’ ‘활기찬’ ‘편안한’ 지역을 만들겠다는 등의 막연한 표현들 일색이다. 온갖 달콤한 얘기를 다 동원해 ‘무엇을’까지는 간신히 써놓았어도 그 ‘무엇을’을 ‘어떻게’ 달성하겠다는 얘기는 없다.

아니, ‘어떻게’가 나와 있기도 하다. 그 ‘어떻게’의 내용은 이행 가능성이 없는 허황한 것이거나 버스를 증차하겠다든가 육교를 만들고 CCTV를 설치하겠다는 등 지방의원들이 내세울 법한 것이 대부분이다.

유권자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뜬구름 잡는 사람에게 표를 주거나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이 할 일과 지방의원이 할 일을 구별도 못 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TV 토론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상대 후보의 약점을 폭로하고 망신주기에 할애한다. 애당초 공약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는지, 어쩌다 자신이 내세운 공약에 대한 이해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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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정당이 보내온 선거 홍보물.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바른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는다 해도 그는 어차피 소속 정당의 의견에 따라가는 ‘거수기’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유권자들은 개개 후보의 공약이나 됨됨이가 아닌 소속 정당을 보고 찍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행태를 되풀이할 것인가? 국회의원한테 ‘거수기’ 역할만 한다고 비난은 하면서 그들이 ‘거수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지역민의 대표로 제대로 일하도록 이끌어가는 데는 왜 관심을 두지 않는가? 국민에게는 그런 힘이 전혀 없는 걸까?

선거 운동의 외형적인 부분도 별 발전이 없어 보인다. 예전에는 학교 운동장 등 넓은 공간에서 선거 유세라는 걸 했다. 그 선거 유세에 모인 사람들이 공약을 제대로 듣고 후보를 평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후보가 공약을 발표할 장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온라인이나 텔레비전 등 유선상으로 선거 유세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당 지역구 유권자만을 위한 방송은 아니다.

길거리 유세용 차량에 도우미들을 데려다 노래를 부르게 시키는 것도 구태의연하다. 2년 전 지방선거 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야당 후보 지원 공연을 한 청년이 후보 홍보용 카드 뉴스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내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초상권 침해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공연은 했으되 “야당 후보 진영에 와서 공연한 것이 널리 알려지면 밥줄 끊어진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해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아니다. 후보 지지에 대한 신념도, 영혼도 없는 공연으로 거리를 소음으로 물들이면 유권자들은 귀 아프게 듣고 억지로 머릿속에 그 이름을 새겨야 한다. 길 한복판에서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뻘쭘한 몸짓으로 흔들고 있는 사람이나 애써 외면하며 그 앞을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나 서로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유권자가 그 길거리 공연을 보고 그 후보에게 표를 줄까?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여전히 그런 데다 돈을 쓰는 걸까?

샌드위치 맨처럼 판넬을 걸고 길거리에 서서 손을 흔드는 선거 운동도 낡은 행태로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짧게는 한 달 전부터, 길게는 1년 전부터 더우나 추우나 아직 동도 안 터 컴컴한 신새벽부터 길거리에 나와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한다. 박사학위 소지 후보나 현역 국회의원이나 거의 모두 이런 방식의 선거 운동을 펼친다. 김장철이면 김장을 돕는다며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에 고춧가루를 잔뜩 묻히고 사진 속에 등장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도시에서는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연탄 배달 수레를 끄느라 온몸이 숯검둥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재래시장을 누비고 다니며 상인들과 악수하느라 손이 다 아플 지경이다.

후보가 매연 가득한 거리로, 시장통으로, 골목길로 나서는 것은 정책이 아닌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구태의연한 선거 운동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런 행동들이 과연 그 후보가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가? 차라리 그 에너지와 비용을 아껴 사람들이 모인 곳에 찾아가 자신의 소신과 정책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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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유권자들도 후보들의 구태의연한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그런 방식의 선거 운동이 계속되는 것이리라. 그건 또 왜일까? 선거철만이라도 대접받고자 하는 유권자들의 심리가 후보들의 그런 행태를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당선된 후에는 저 높은 곳에 있어 얼굴도 볼 수 없을 예비 ‘의원 나리’에게서 90도로 절을 받을 수 있어서? 하지만 후보에게 큰 절을 받는다 해서 유권자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후보를 평가하는 잣대도 하나가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가 비리를 저지르면 “그렇게 실수할 수 있으니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난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지 도덕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라고 옹호한다. 하지만 상대 정당 후보의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발견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용서할 수 없다, 당 대표도 사퇴해야 한다”라며 침소봉대하고 폄훼한다. 비례대표 선정은 물론 지역구 의원 공천까지 국민을 위해, 정당을 위해 싸우고 일할 사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포상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 기준으로 보니 해당 후보에게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는 싸울 결의가 있는가 없는가보다는 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로 설왕설래된다.

후보가 공약을 만들고 발표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공약에 유권자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권자가 후보의 공약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 후보가 당선된 후 공약을 잘 지켰는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재선 이상 후보의 경우 공약 이행률도 눈여겨봐야 한다. 공약 이행률이 현저히 낮다면 그는 지난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허풍을 떨었거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평가가 다음 선거에 반영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런 데 관심 갖는 유권자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비문해자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자유당 시절, 후보 이름조차 읽을 수 없었던 할머니를 선거 운동하는 장정이 업고 “할머니, 작대기 하나요, 작대기 하나!”라고 연신 소리치며 투표장으로 뛰어갔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도 그때처럼 ‘무조건 이름 외워 찍기’ ‘무조건 정당 보고 찍기’ ‘무조건 번호 보고 찍기’를 유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전하고 유권자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단지 고무신이나 봉투를 주고받던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을 뿐 그 옛날과 달라진 점은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크고 작은 선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구태의연한 후진적 선거를 계속 치를 것인가? 약의 효능과 성분에 소비자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약 이름 외우기를 강요하는 광고는 계속될 것이다. 후보의 공약에 유권자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후보 이름 외우기를 강요하는 선거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구태의연한 행태를 과감히 먼저 벗어던지는 것은 유권자의 몫일까, 후보의 몫일까?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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