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후 칼럼] 중국의 명운, 후베이(湖北)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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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4.01 10:50:17
  • 최종수정 2020.04.0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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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폐렴 발원지’ 中 후베이성 사람들은 ‘잠재적 보균자’ 취급 받고 있어...중앙 정부에 대한 후베이人 반감, 갈수록 고조
‘천상구두조 지상호북로’(天上九頭鳥地上湖北佬)...후베이인들, 예로부터 고분고분 말 따르는 법 없어 중앙이 두려워해
후베이(湖北)·우한(武漢), 역사의 전환점 마다 항상 등장...우한폐렴 글로벌 펜대믹 사태 속, 앞으로의 중국 역사는 후베이인들에게 달려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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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중국공산당 바이러스’(CCP Virus)로도 불리는 역병의 진앙지, 우한(武漢)이 있는 중국 후베이성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받는,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중국 당국은 녹색·황색·적색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 ‘건강QR카드제(制)’를 실시하면서 녹색 코드를 인증 받은 후베이인들은 자유롭게 전국통행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베이징은 후베이인(人)들의 입경을 봉쇄하고 있으며 다른 성(省)에서도 후베이인들은 녹색 코드를 제시해도 강제로 격리되거나 쫓겨나기 일쑤다. ‘후베이인이’라는 신분자체가 독일 나치 치하에서 ‘다윗의 별’ 표시를 달았던 유태인과 비슷한 처지가 된 것이다. 신화통신이나 인민일보 같은 중국 관영 매체들은 후베이인들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말라는 기사를 게재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여서 베이징 중앙 정부에 대한 후베이인들의 반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시진핑은 우한에서 승리하면 후베이에서 승리하고 후베이의 승리는 전 중국의 승리라면서 우한과 후베이의 신규확진자 수를 ‘제로’(0)가 되도록 조절하고 있다. 그만큼 후베이가 중국을 뒤흔들 수 있다는 뇌관임을 스스로 고백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후베이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차별 받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베이징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 후베이의 별칭(別稱)은 ‘형초’(荊楚)또는 ‘초’(楚)다. ‘고초’(苦楚)라는 단어에도 ‘초’라는 글자가 들어갈 정도로 후베이 역사의 이면에는 중앙에 대한 반항에 따른 고초가 녹아 있다.

지금의 후베이에 해당하는 초나라는 화하문명(華夏文明)의 변두리로 예로부터 오랑캐로 간주돼 왔다. 후베이의 방언 가운데 불복주(不服周)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중원의 제후들이 주나라를 섬길 때 유독 초나라만 주(周)나라와 마찰을 빚어왔다는 의미다. 춘추전국시대를 연 것도 초나라였다. 초나라가 중앙의 권위를 무시하고 사사건건 대들자 주나라의 소왕(昭王)은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한수(漢水)에서 패해 살해당했다. 주나라는 이로써 제후국들을 통제할 무력을 상실했고, 이에 중원의 각 제후들이 군웅할거 체제에 돌입해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도 형식적이긴 하지만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했다. 제나라 환공이 패자를 칭하면서 초나라를 견제하고 북적(北狄)과 서융(西戎)을 구축해 주나라를 유지하자는 존왕양이의 구호로 내세웠다. 이때 제 환공은 스스로를 공(公)이라 불렀지만 초나라 장왕은 왕(王)을 칭할 정도로 초나라, 지금의 후베이는 중원의 권위따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초장왕은 주왕실의 관원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구정(九鼎)의 무게는 얼마나 되느냐면서 조롱할 정도였다.

오자서의 고사에서도 후베이가 언급된다. 당시 도망다니던 오자서는 안후이 접경의 초나라 소관(昭關)의 경계가 너무 삼엄해 이를 통과할 계책을 짜느라 고민해 하룻밤에 머리가 백발이 됐다는 고사가 있다. 오자서는 자신을 괴롭힌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나중에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그의 시신에 3백번 채찍질을 가했다.

결국 초나라는 진나라에 멸망당한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비록 초나라에 세 가구만 남더라도 반드시 진을 멸하고 초를 다시 세우겠다고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을 무너뜨린 진승과 오광이 초나라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항우역시 초패왕이라 했으니 초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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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 아홉 달린 새, ‘구두조’의 모습.(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후베이인의 성격은 여러 면이 있어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난해하다. 후베이인의 특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은 ‘천상구두조 지상호북로’(天上九頭鳥地上湖北佬)다. ‘하늘에 아홉 마리 머리의 신화 속 새가 있다면 땅에는 후베이인이 있다’는 의미다. 초나라를 상징하는 아홉머리의 새는 구봉신조(九鳳神鳥)에서 유래한다. 출전은 산해경의 대황북경(大荒北經)이다. 이에 따르면 머리가 아홉인 봉황은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초나라가 주나라에 반항하자 이를 요물로 격하한다. 주나라는 남방(초나라)에 아홉개의 머리가 달린 요물이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선전을 개시했다. 주나라의 선전은 지금시각에서 봐도 그 상징성이 흥미롭다. 대역무도하게 주나라에 대드는 초나라를 벌하기 위해 천제(天帝)가 하늘의 개(天狗)를 보내 구두조(九頭鳥)를 물어뜯게 해 퇴치했다. 머리 하나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구두조는 인간세계에 내려와 숨어지내는데, 칩거한 구두조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해는 대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구두조는 민가에 날아가 어린이를 포식하기 위해 정탐을 하는데 우선 깎아서 버린 사람의 손톱이 있는지를 본다고 한다. 밤에 손톱을 깎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습속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할 때 가장 저항이 격렬해 진나라 군사의 인명피해가 많은 곳도 초나라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런마당에 초나라의 봉황숭배도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봉황을 새로 격하시켰다. 구두봉이 구두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봉황이든 새든 아홉머리의 신화속 동물은 후베이인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게 된다.

명나라 신종연간의 재상 장거정(張居正)은 지방의 부패를 다스리기 위해 9명의 흠차대신(欽差大臣)을 각지에 파견해 탐관오리를 척결했다. 백성들은 통쾌하며 후베이 출신의 장거정을 칭송했다. 그리고 흠차대신 9명을 보냈다고 해서 ‘천상구두조 지상호북로’(天上九頭鳥地上湖北佬)란 찬사를 연발했다.

일찍이 임어당은 그의 저서 《오국여오민》(吾國與吾民)에서 후베이인을 평가하기를 “정명강한(精明强悍)하며 후추의 매운 맛이 있다. 굉장히 사나우면서 원만하게 융화되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후베이인들은 용맹해 물러서는 법이 없으며 심지가 아주 굳다. 타협할 줄 모른다는 단점이 있지만 직선적이고 용감하다. 근현대사에도 후베이의 역할을 도드라진다. 신해혁명의 발단이 된 것도 우창기의였고 이후 국공내전에서도 후베이인의 표독함은 대단하다. 공산혁명가 샤밍한(夏明翰)은 국민당군에 체포되 처형되기 직전 내 생각이 틀리지만 않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砍頭不要緊只要主義眞]“고 외칠 정도였다.

모택동도 후베이인의 용맹함을 칭송한 적이 있다. 1946년 10월 섬북(陝北)에서 승리를 거둔 모택동은 네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에 살아남은 후베이출신 3개 방면군에 대해 “하늘에 구두조가 있다면 땅에는 후베이인이 있다[天上九頭鳥地上湖北佬]. 적들이 네차례의 포위공격으로 구두조(九頭鳥)의 머리 네 개를 베었지만 남은 5개머리로 승리했다. 구두조(九頭鳥)는 빈말이 아니다. 후베이인은 대단하다. 천하를 뒤집을 역량이 있다”는 찬사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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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7월20일, 조반파 홍위병과 싸우고 있던 우한의 보수파 홍위병 조직 ‘백만웅사’가 중앙에서 내려온 왕리와 셰푸즈를 억류한 사건을 말한다. ‘우한사건’(武漢事件), 또는 ‘7.20 사건’(七二〇事件)이라고 한다.(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하지만 후베이인들은 훗날 모택동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도 남겼다. 문혁시절인 1967년 7월 모택동이 중앙문혁소조를 이끌고 우한을 지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후베이성 군구의 장성들과 군중들이 백만웅사(百万雄師)라는 결사체를 조직해 모택동에 반기를 들고 7월 20일 그가 묵고 있었던 숙소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모택동은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군용기로 탈출해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것이 중국에서 유명한 ‘우한 7.20 사건’이다.

모택동의 승계자를 자처하는 시진핑 역시 우한과 후베이를 극도로 경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한폐렴이 발발했을 때 리커챵 총리를 대신 내려보내고 자신은 몇 달이 지난 최근에 대규모 공안병력의 호위하에 미리 사전에 조율된 시찰극을 벌인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다. 후베이와 우한은 이처럼 중국 고대사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전환점에 항상 등장했다. 우한폐렴이 글로벌 차원의 팬더믹이 된 현 상황과 별개로 중국의 정치변동을 예측하기 위해 주의 깊게 봐야 할 포인트가 바로 후베이와 우한인 이유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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