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대학생 황선우, 이창현] 상처가 또 다른 씨앗이 되기까지: 천안함 생존자 전준영의 이야기
[기고/대학생 황선우, 이창현] 상처가 또 다른 씨앗이 되기까지: 천안함 생존자 전준영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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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전준영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 회장

인터뷰어·저자: 대학생 이창현, 황선우

▲전준영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 회장.

나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높은 애국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군대에 가서 뭔가 크게 이루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잘할 수 있고 편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해군에 ‘축구조교’라는 보직이 있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축구를 했다. 축구 선수로는 19살까지 활동했고, 그 이후 축구 심판을 준비했다. 나의 목표는 축구 지도자 겸 심판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해군 축구조교는 소위 ‘꿀보직’이었다. 나는 22살이 되던 2008년 4월 14일, 해군에 입대했다. 축구조교를 하리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축구조교를 바로 할 수는 없었다. 해군에 입대하면 일단은 배에 올라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축구부 합숙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나는 군대에서의 단체 생활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첫 해상생활을 마치고 육지로 복귀했다. 그러나 돌아와서도 축구조교는 할 수 없었다. 이런 꿀보직은 나만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배에서의 생활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나의 해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해군 병사가 배에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계 임무, 갑판 청소, 상황병 임무, 그리고 정박 시 배에 페인트 칠하기 등.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고 낯설어 힘들다고 느끼지만 차차 익숙해진다. 그리고 해군은 특이하게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일을 한다. 보통 이러면 엄청 싫어하는데 나는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군대 체질’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축구선수 시절 단체 생활을 했던 나름의 내공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후임들도 만났다. 업무에 있어서는 가끔 혼내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이래저래 친해질 수 있었다. 군대가 참 애증의 장소다. 몸과 마음도 지치고 스트레스도 받는 곳이지만 그만큼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스로 반성도 하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볼 수도 있어 삶이 많이 바뀌는 곳이다.

나는 전역하고 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군 생활 동안 나 스스로를 다져갔다. 그렇게 군 생활을 버텨내니 어느덧 말년 병장이라는, 병사 중의 최고 계급을 가지게 되었다. 곧 전역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마지막 휴가 3일 전,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의 당직 근무를 마치고 근무 취침을 하였다. 새벽 6시에 다시 일어나 닻을 내리는 임무를 수행하고 밥도 먹지 않고 계속 잤다. 군 생활 얼마 안 남은 말년병사가 누린 호사였다. 다시 저녁이 되었고 계속 침실에 누워 있었다. 평상시 그 시간이라면 다 같이 식당에 모여 TV를 봤다. 2010년 그 날은 마침 46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해서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잠시 몸이 붕 떴다가 떨어졌다.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배에서 ‘쾅’ 소리라니, 더군다나 군함에서라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침실에 있던 모두가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후임과 함께 급히 실내 객실로 갔다. 벌써 물이 차올라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넘어 정말 큰 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큰 일 났다! 물 들어온다!”

“정신 차리고 다들 빨리 나오십시오!”

아래 칸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진짜로 큰 일이 났구나!’

모두가 위험을 직감하며 갑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함장님이 문을 열고 올라가서 그 다음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 올려주고 있었다. 순간 걱정되었다.

‘만약 조류가 북쪽이면 어떡하지?’

북쪽 해역으로 가게 된다면 더 큰 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조류는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우리 해역 쪽에 등대가 보이자 안심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배가 침몰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전쟁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배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갑판에 올라왔을 때 겉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3월 말이긴 했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였다. 순간 이렇게 얼어 죽느니 총탄이나 폭탄에 즉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함선 위로 올라오고 나서 간부들이 휴대폰으로 백령도 쪽에 있는 부대에 구조 요청을 했다. 얼마 뒤 참수리호가 우리 배로 왔다. 한시라도 빨리 구조가 이뤄져야 했지만 참수리호가 붙자 파도가 세게 일었다. 자칫하면 참수리호까지도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둘 오지마! 하나 둘 오지마!”

함선 위로 대피한 대원들이 다 같이 참수리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뒤 ‘해경정(RIB)’이 도착했고 ‘어업지도선’도 뒤따랐다. 뒤늦게 도착한 어업지도선은 함수 쪽에 있던 부상자 8명을 구출하였다.

배가 공격을 받아 침몰할 경우를 대비해 주어졌던 나의 임무는 구명정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구명정을 터뜨리고 해경정에서 던져준 밧줄을 묶은 뒤 서너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며 구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저희 이러다 침몰하는 거 아닙니까?”

“함수 쪽은 그렇게 빨리 침몰하지 않는다. 걱정마라.”

내가 걱정하며 말하니 주변 간부들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겉옷이 없었던 나에게 자신의 옷도 입혀주었다. 너무나 추운 밤이었다. 단순히 몸만 추운 것이 아니었다. 공포감에 사로잡혀 더욱 추웠다.

“모두 인원 체크해봐!”

함장님이 인원 체크를 지시하였다.

“57!” “58 번호 끝!”

모두가 당황했다. 인원이 부족했다.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함미도 보이지 않았다.

“함장님, 함미가 없습니다!”

“함미가 왜 없어?”

함장님은 그 이후부터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자식처럼 지내왔던 부하 46명이 한 순간에 검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함장님은 천안함과 운명을 같이 하려고 했다. 그런 함장님을 우리가 억지로 끌고 나와 마지막으로 구출했다.

해경정에 구출되어 참수리호로 이동하는 중에도 여전히 무서웠다. 또 다른 피격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가 타고 있던 천안함과 그 구조가 완전히 똑같은 참수리호로 옮겨 타면서 안도감은커녕 공포가 밀려왔다. 더군다나 아무리 눈을 돌려 주변을 봐도 내 동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천안함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5명의 동기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나밖에 없었다. 더 무서워졌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막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계속 났다.

“준영아 애들 다 참고 있다. 너 이렇게 울면 애들 다 울어버릴 거다. 조금만 참자, 준영아.”

중사 한 분이 나에게 와서 격려해주었다. 잠시 뒤 손을 보니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추위 때문이었다. 미지근한 물에 손을 녹이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함미에 있던 사람들로 생각이 닿았다.

‘살아있을 거다.’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라며 그들도 반드시 구조되기를 기다렸다.

육지에 도착해서 배식으로 나온 라면을 먹고 참수리 생활관으로 갔다. 쉽사리 잠을 잘 수 없었다. 누우면 아직 구조되지 않은 동료 병사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우리는 다 같이 침대를 붙이고 손을 잡고 TV를 켠 채 잠이 들었다.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사의 길에 놓여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웠다.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했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에서 다시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더 무서워졌다.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은 당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생활관의 한 켠에서 공포감에 사로 잡힌 채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폭침으로 두 동강 난 천안함/ 해군2함대 안보공원(서해수호관).
▲폭침으로 두 동강 난 천안함/ 해군2함대 안보공원(서해수호관).
▲천안함(PCC-772)/ 해군2함대 안보공원(서해수호관).
▲천안함(PCC-772)/ 해군2함대 안보공원(서해수호관).

얼마 뒤 우리는 국군수도병원에 들어갔다. 기자들이 정말 많이 와 있었다. 합동조사 때 생존자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살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폭격의 죽음에서 겨우 벗어난 우리들이었지만 그날 이후부터는 매일이 죽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특히 인터뷰 때는 더욱 심했다. 한동안 카메라 셔터 소리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언론이 정말 무서웠다. 분명 우리가 인터뷰한 것이 방송에 나가긴 하는데 그 내용은 항상 달랐다. 중요한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편집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말들이 방송되었다. 우리는 절대 방송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뜻을 가지고 거부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병원 내에는 생존자들을 위해 흡연장을 만들어줬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게끔 한 것이다.

유가족들을 만날 시간이 왔다. 나만 살아남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다 같이 꺼억꺼억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많이 혼냈던 후임의 부모님들을 만났을 때는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죄송한 마음이 터져 나왔다.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보낼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안아주고 웃어줄 걸. 너무 보고 싶었다.

아픈, 새로운 시작

2010년 4월 29일, 천안함 전사자들의 영결식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5명 있던 동기들, 그 중 나 홀로 남아 영결식을 마쳤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혼자 전역했다. 마지막 승선을 할 때만 해도 너무나 기다렸던 전역 날, 나도 남들처럼 7시 땡 하면 나갈 줄 알았다.

나는 11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다. 나를 계속 기다린 듯한 기자들이 보였다. 내 이름 ‘전준영’ 앞에 어느 순간부터 ‘천안함 생존자’라는 호가 붙은 듯했다.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대전 현충원에 들른 후 마침내 집으로 향했다.

전역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다. 군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쁨도 있지만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도 적지 않다. 2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 역시 전역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아팠다.

군대에서는 사람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사람들과 군대 동기가 되어 정말 친해졌다. 군대 갔다 오신 분들이 사회에 나와서도 군대 동기들과 왜 허물 없이 지낼 수 있는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더 아팠다. 전역 이후에도 군 동기들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항상 눈꺼풀이 감길 즈음에 해 뜨는 걸 봤다.

동기들의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도 몇 분 만났다. 이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만나 이야기해보니 실제로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다시 집에 오면 괴로움이 마음을 짓눌렀다. 결국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항상 나의 편이었던 가족들에게 분풀이 하는 일이 많아졌다.

전역 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때는 악성 댓글에 많이 시달렸다. 그 때까지도 천안함 폭침에 대해 여전히 조사 중이었고 더군다나 당시 6월 지방선거가 있었던 터라 그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솟았다. 병원에 가보니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죽은 동기와 후임들이 갑자기 생각났다. 특히 가수 백지영의 노래를 들을 때면 너무 그립고 보고싶었다. 동기들과 함께 드라마 ’아이리스’를 봤던 게 생각나서 정말 서럽게 울었다. 이렇게 1년을 살았다.

나에게 세상을 보여준 가족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갓 전역한 24살 청년이었다. 대학에 복학했다. 평범한 대학생 전준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해서 일반적인 학교 생활을 많이 하지 못했다. 심지어 졸업 앨범도 없다. 그래서 대학생활을 누구보다 기다렸다. 하지만 복학해서 보니 나에게 ‘천안함’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결국 대학에서도 나는 외부인이 별로 다니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SNS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연락을 했다. 그 중 내 또래의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에게서 오랫동안 응원을 받고 서로 이야기 나누다 어느덧 연애 감정까지 싹텄다. 어디를 가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대학에서마저 혼자였던 나에게 그녀는 너무나 큰 선물이 되었다. 나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했다. 그 때가 24살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일 수 없었던 나는 결혼과 함께 학교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은 못다한 대학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모두 날리고도 남았다. 결혼은 내가 군대에서 받았던 상처를 긍지로 변하게 해줬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준 사람, 나의 그녀를 만나 세상에 한 걸음 나갈 수 있었다.

군대에서 생긴 트라우마는 결혼 초기에만 해도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가장의 책임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 힘이 나를 많이 일으켜 세웠다. 가족에 집중하고 그들과의 공동체 안에서 안정을 찾아가자 나의 마음도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내가 힘들면 가족들이 더 힘들겠구나’ 생각하니 나 자신을 힘껏 다잡을 수 있었다. 또 우리 가족은 내가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결혼한 지 5년이 되던 201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천안함 유가족들도 많이들 와서 축하해 주었다. 약속대로 주례를 맡아주신 함장님께서 천안함 전사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른 후 “하늘나라에서도 신랑, 신부 축하해줘라”고 말씀하시자 결혼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의 또 다른 동기가 되어준 가족들은 나에게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세상에 한 걸음 더 나온 계기

지금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빠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배경과 많은 이들의 응원으로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가고 있다. ‘천안함 생존자’라는 꼬리표가 이제는 나의 사명이 되었다. 마침내 천안함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고 군 지식도 공부해 나가면서 점차 활동을 넓혀가고 있다.

어쩌면 전역하고 나서부터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잠시 숨어 있었던 것뿐. 이 일은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정말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안함 폭침으로 전사한 46명의 용사들, 그리고 전우들을 구조하다 전사한 고 한준호 준위의 명예를 살리는 것,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믿는다. 잊혀지고 있고 왜곡되고 있는 천안함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나의 사명이라 믿는다.

2018년 한 공영방송에서 ‘천안함 폭침은 조작’,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어뢰 공격이 아닌 좌초로 일어난 일’이라는 엉터리 의혹을 취재하여 방송한 것을 봤다. 너무 화가 났다. 당시 상황은 물론이고 폭침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은 외면한 채, 일방적인 한 쪽의 주장만을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 내보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방송에서 주장한 대로 천안함 사건이 단순한 좌초였으면 전우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검은 바닷속으로 사라져간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그 오랜 시간 동안 미안함과 죄책감에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었다. 군함의 선체가 두 동강 날만큼 강력한 폭침이었기에, 잘려진 선미가 순식간에 바다로 침몰한 것이다. 방송을 본 함장님을 비롯해 나와 다른 대원들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SNS에 나의 심정을 올리고, 그 방송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했다.

한 언론매체에서 연락이 왔다. 방송에 출연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방송에 나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알 것이라며 거듭 요청하자 허락했다. 천안함 폭침 직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짜깁기된 기사와 방송을 경험하면서 언론에 대한 반감이 컸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나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방송사 차장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고 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나의 심정, 그리고 내가 군대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마지막에는 천안함 전사자들을 이야기하다 눈물이 터졌다. 나에게 전화를 했던 방송사 차장이 카메라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까지 눈물이 크게 터진 것이었다.

SNS 글과 방송 출연으로 나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좋게 바뀌었다. 천안함을 기억해주고 또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명감은 더욱 굳건해졌다. 세상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더 힘든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천안함의 진실이 이념으로 옮겨져서 정치화되고 있는 현실, 그 속에서 나는 생존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한다. 천안함의 진실을 가감 없이 알리는 것,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 내가 정말 사랑했고 또 너무 보고싶은 해군 친구들의 명예를 되찾아 주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남은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길을 계속 걸어보고 싶다.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 회장

지금 나는 자동차 영업을 하면서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내는 초반에 나의 회장직에 대해 많이 걱정했었다. 이런 활동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뭇 사람들의 비방과 비난에 상처받지나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염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주시는 격려와 응원을 지켜보면서 날려버리고 있다. 지금은 아내도 이 활동이 대한민국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며 용기를 주고 있다.

내가 맡고 있는 회장 자리는 ‘욕받이’이자 ‘사랑침대’ 같다. 활동을 넓혀갈수록 각종 음해에 시달리고 그만큼 응원도 많이 받는 게 참 신기하다. 이제는 내가 천안함과 관련해서 공인 아닌 공인이 되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 SNS가 나의 개인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공적인 공간이 되었고, 나는 여기서 위로를 많이 받는다.

또한 SNS를 통해서 천안함 뱃지, 천안함 티셔츠, 천안함 모자 등을 홍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천안함 안보 견학도 주기적으로 이끌고 있다. 부족하지만 안보 교육도 2019년 4월에 처음으로 해봤다. 이 활동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것도 있고 소소하게 모여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2020년(천안함 폭침 10주기) 첫 번째 천안함 안보견학.
▲2020년(천안함 폭침 10주기) 첫 번째 천안함 안보견학.

우리 생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로 아파하고 있다. 또한, 국가의 보호 없이 사비로 치료를 받고 있다. 바로잡혀야 할 문제들이 정말 많다. 천안함에서 전사한 용사들과 천안함 생존자들에 대한 보상과 예우를 넘어,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전반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차분히 하나씩 해보려 한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내가 해 온 활동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진실이 굳건한 씨앗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인터뷰어·저자 황선우: facebook.com/sunu8177
- 인터뷰이 전준영: instagram.com/cheonanham772

▲황선우(인터뷰어•저자), 이창현(인터뷰어•저자), 전준영(인터뷰이).
▲황선우(인터뷰어•저자), 이창현(인터뷰어•저자), 전준영(인터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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