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칼럼]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이영훈 칼럼]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방소식에 탄식했던 김구, 귀국후 "해방은 우리가 이룬것"이라고 태도 바꿔
文 3.1절 기념사 "1937년 한해에만 3600건의 무장독립투쟁"은 역사날조
역사를 상습날조하는 북한 닮아가는 건 김구가 뿌린 씨앗
역사의 무대에서 자연히 소거될 존재였던 김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령으로 부활
“김구 선생이 꿈꾼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 文기념사는 '좀비들의 구호'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한 유령이 이 나라의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때가 되면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를 부르는 초혼굿을 벌린다. 다시 살아난 그의 말과 행동은 이 나라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영력의 주술이다. 그의 손짓에 따라 끝도 없이 긴 행렬이 죽음의 동굴로 향하고 있다. 민주당의 간부가 효창공원에 놓인 김구의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김구 선생이 꿈꾼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으로 나아가자”고 역설하였다. 넋이 빠진 채 사지를 비틀며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좀비들의 구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김구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그가 남긴 글을 세밀하게 읽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그 몰(沒)역사와 반(反)근대의 저(低)지성에 충격을 받았다. 김구는 1945년 해방의 소식을 듣고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했던 그가 귀국 후 조금씩 달라져 결국 “해방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선구적 거짓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적 진실로 둔갑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1937년 한 해 동안에만 국내에서 무려 3,600건의 크고 작은 무장독립투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뻔뻔스런 역사의 날조이다. 이 나라는 점점 역사를 상습 날조하는 북한을 닮아가고 있다. 김구가 뿌린 씨앗이다.

김구의 거짓말은 그의 반미(反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구의 서운한 감정은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반미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미군의 남한 점령은 부당하며, 하루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은 일본이나 독일처럼 세계평화를 해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는 미국의 신탁통치는 한국을 식민지로 병합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나는 그가 반공주의자로서 찬탁에 깃든 공산화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반탁운동을 벌인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구는 동시대 자국의 현실과 세계의 동향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동굴의 투사였다. 더없는 몰역사였다.

김구는 일제 하 국내에서 민족의 갱생을 위해 교육, 실업, 언론에 헌신한 선각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였다. 사업을 일구기 위해서 어느 정도 총독부의 시정에 협력할 필요는 있었다. 그 고초와 번민은 중국 내륙에서 국민당정부의 보호와 지원 하에 있었던 임시정부의 요인들보다 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솔직히 말해 국민당정부의 충실한 식객이었다. 김구 스스로 “나 자신의 중경(重慶)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다”고 토로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한민당의 인사들을 ‘민족의 박테리아’라고 비난하였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미군정에 협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김구는 근대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결여하였다. 대책 없는 반근대였다.

김구는 민족을 두고 ‘영원한 혈통의 바다’라고 하였다.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도 이 ‘혈통의 바다’에서 이는 일시적 파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 화려한 수사는 물론 그의 것이 아니다. 당대의 문필 이광수의 대필이다. 어쨌든 김구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단언컨대 ‘혈통’, 곧 피의 순수 계통만큼 허구적인 것은 없다. 이념이 다르면 부모형제도 흩어지고 심지어 원수까지 된다. 이념이 같으면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누구와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그것이 선진사회에서 눈으로 보는 진실이다.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마음의 38선’을 없애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면 위대한 소비에트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감동을 받아 물러날 것이라 하였다. 결국 김구는 순수 혈통의 부족정치를 지향하였다. 절망의 저지성이었다.

1947년 9월 반탁운동이 종결되었다. 미국이 신탁통치 방침을 철회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한 것이다. 반탁운동의 구심으로 역할을 해 온 김구는 이후 방향감각을 상실하였다. 원래 그 역사의식과 지성수준에서 건국의 대업을 감당할 위인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외친 부족정치의 호소력은 대단하였다. 그는 “통일이 없으면 독립이 없다”고 외쳤다. 사람들이 물었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해 있고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사실상의 정부를 세웠는데, 실현성이 없는 주장이 아닙니까. 김구는 대답하였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아니라 옳은가 그른가가 문제이다.” 가없이 순진한 도덕정치였다.

김구는 5·10선거의 적법성을 부정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치러진 억압 선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포하는 날 그는 ‘비분과 실망’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을 허물고 남북한의 총선거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양성한 한독당의 당원은 저간에 벌어진 갖가지 테러의 주역이었다. 북한 공산체제로부터 추방당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울며 소리쳤다. “우리 선생님이 왜 저러시나.” 결국 김구는 그의 당원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그 젊은이의 극단적 선택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테러는 영구평화의 적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1948년 평양에 올라간 김구는 김일성에게 자신의 노후를 부탁하였다. 1967년 김일성이 어느 일본인과의 인터뷰에서 토로한 이 사실을 나는 믿지 않았다. 워낙 거짓말에 능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쉬띄코프일기』를 공간하였다. 거기에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렇게 교차 확인되는 사실을 믿지 않을 도리는 없다. 평양에 머문 김구는 머잖아 늠름한 군세의 인민군이 남한을 휩쓸어 버릴 것으로 예측하였다. 비록 그 전에 사망했지만, 김구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일성이 김구의 노후를 살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자연히 소거될 존재였다. 그 인물이 어느 젊은이의 철없는 혈기로 영원히 죽지 않은 사령으로 승화하고 말았다.

그 혼백이 연례의 초혼굿으로 소생하여 이 나라의 국민을 순수 혈통의 부족으로 훈육하고 있다. 부족 수준의 지성일진대 연간 3,600회 무장독립투쟁의 날조쯤이야.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소리친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근대문명의 철인들로부터 세계 평화는 자유민주와 자유통상과 자유국제연합의 조건으로 보장된다고 배웠다. 우리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몰역사와 반근대의 저지성이 판을 치고 있다. 부족정치의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그 선구를 달린 김구는 결국 성공한 것일까.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