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기자
이세영 기자

3월 1일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휴일이었지만 ‘3·1절 범국민 태극기집회’에는 광화문을 가득 메우는 인파가 모였다. 그러나 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고 바람 속에 흩어졌다.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을 진정성 있게 다룬 국내 언론이 거의 없을뿐더러, 오히려 참가자들은 언론을 통해 극성맞고 이상한 집회로 매도당할 뿐이었다. 태극기집회 시민들의 목소리는 국가의 환영을 받지 못한 채 ‘남의 잔치’로 여겨지는 듯했다.

태극기집회에 직접 참가하고 보도양상을 지켜본 이들은 한국 언론이 '현저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번 집회에 동참했던 시민들은 다소 잔인한 보도행태를 통감했을 것이다.

북한에 매몰된 채 한미 균열을 초래하는 정부 행보에 경각심을 느끼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현실과 정책의 괴리감을 느낀 이들이 모인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태극기집회에는 지난해보다 늘어난 청년층과 대다수 시민들의 목소리가 포함됐지만, 언론은 그저 보수단체의 극성맞은 집회로 격하시켰다.

과거 촛불집회는 일반 시민도 동참했지만 강성 좌파단체가 주도했다. 이런 집회를 당시 언론은 국민의 목소리라고 띄우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촛불의 가치’를 역설하며 ‘촛불만이 선(善)’이라는 정당성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태극기집회는 항상 ‘보수단체’ 심지어는 '친박단체'라는 표현으로 보도해 의미를 깎아내린다. 1일 태극기집회의 의미에 동감하고, 필요성을 느껴 동참한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양상이다. 반면, 같은 날 열린 좌파단체측에서 주도한 집회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소개하는 언론도 적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태극기집회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리기보다는, 태극기를 특정 집회에 활용하며 변질시키고 있다는 일부의 조롱과 일부 사건만 부각시킬 뿐이었다. 아마도 태극기집회를 관심있게 보지 않은 인원들은 여전히 태극기집회에 대해서 극단적인 사람들, 돈 받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 등이 참가한 친박집회 정도로 이해할 가능성마저 높다.

언론은 국민들이 미처 직접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발굴하고 공론화시키며 긍정적인 미래로 나아가도록 돕는 주요 메신저 역할을 한다. 그런데 3.1절 대회에 대한 보도양상을 지켜보면 국내 언론이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어보인다. 한 명의 목소리로도 문제제기를 하고 화두를 제시하며 사회 개선을 이끈다던 기존의 언론 역할에서는 한참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모습이 만연했다. 

한편, 매번 소통을 강조한 정부 또한 약자와 피해자의 편을 자처했지만, 정작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전념하던 자유민주주의 성향의 일반 시민들이 이토록 갈증을 느끼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언론은 촛불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경찰은 엄정 수사방침을 밝혔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촛불 조형물 파괴’에 대해서 엄중히 대처하겠다고 한다. 대단히 폭력적인 일이 벌어진 듯 비춰졌다. 언론 또한 이러한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촛불이 새로운 정부의 창출에 기여하고 사회 개선에 의미가 있는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촛불만으로는 어느 국민까지 포용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정부와 언론이 촛불만을 강조하는 것은 국민 편 가르기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마저 든다.

그동안 광화문 광장을 걸으면서 성역화되어가는 ‘촛불 조형물’을 보면서 빼앗긴 광장같이 느꼈던 이들의 울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다. 우리나라 국민들에 대한 이해심은 누군가 그토록 강조하던 ‘내재적인 관점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포용하자는 관점’보다 부족해 보인다. 극명히 다른 대응방식을 지켜보면, ‘시민’이란 단어의 정의(定義)마저 궁금해진다.

정부와 언론이 시민의 목소리라고 수용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지난 대응방식에 반추해 시민들이 스스로 찾아볼 수 밖에 없어보인다. '3.1절 범국민대회'를 왜곡,축소보도한 한국 언론은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가.

이세영 기자 lsy215@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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