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칼럼] 홀로코스트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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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3.02 15:54:17
  • 최종수정 2020.03.0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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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 이후 유럽, '적극적 처벌과 성숙한 용서'의 기적...6·25 도발 사과·반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1월 27일 뉴욕의 유엔본부와 세계 각지의 유엔 시설에서 홀로코스트 추모행사가 열렸다. 2005년 유엔은 연합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었던 1945년 1월 27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하고, 매년 이 날이 되면 추모행사와 함께 인종학살을 가져온 종교적 편협성, 선동, 박해, 폭력 등을 규탄하는 각종 프로그램들을 개최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해방 75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거행되었다. 유대인 생존자 200여 명과 50개국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희생자들을 기렸다. 이에 앞서 1월 23일에는 이스라엘의 야드아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도 미국의 펜스 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다.

홀로코스트(Holocaust)란 '완전히 타버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톤 (holokauston)'에서 나온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물이란 의미이지만, 오늘날에는 나치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2차 대전 중 나치는 유럽 점령지 수십 곳에 수용소를 지었고 나중에 6개의 대형 수용수로 통합했는데,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등이 대표적 대형수용소들이었다. 이곳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굶겨 죽이기, 구타, 총살, 생체실험, 사격 연습용 표적 등의 방법으로 학살되었고, 가장 악명높은 학살 수단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다. 아우슈비츠에서만 유대인 110만 명이 학살되었다.

‘적극적인 처벌과 성숙한 용서’가 만들어낸 기적들

무엇이 히틀러(Adolf Hitler)로 하여금 유대인 절멸을 명령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유대인들의 배타성과 선민사상이 증오를 불러일으켰다는 설도 있고, 탁월한 민족성이 질시를 촉발했다는 설도 있으며, 히틀러 개인의 컴플렉스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유대인 학살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반인륜적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에 일어난 놀라운 일들도 인류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역사임에 틀림이 없다.

나치 이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된 독일인들은 ‘처절한’ 사과와 반성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다. 전문가들은 ‘적극적인 처벌과 성숙한 용서’라고 부른다. 독일은 나치 범죄 처벌에 시효를 두지 않는다. 2015년 7월 독일 법원은 아우슈비츠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했던 당시 94세인 오스카 그뢰닝에게 학살 방조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했고, 그해 9월 독일 검찰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처형을 도운 혐의로 90대 노인을 기소했다. 이렇듯 독일의 끝없는 사과와 반성 그리고 배상 활동이 나치의 최대 피해국인 이스라엘과 폴란드를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었다.

폴란드도 2차대전 중 600만 명 이상이 나치에 학살당한 피해국이지만 독일은 끝없는 반성으로 폴란드인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독일의 진실된 사과와 반성을 접한 폴란드 천주교회는 1965년 서독 교회에 보낸 서한을 보내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라고 했다. 나치의 만행을 용서할테니 폴란드가 2차대전 후 독일인을 강제 추방한 것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서한은 다시 한번 서독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에서 폴란드의 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이 2차 대전 발발 75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다. “두 나라의 화해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미래 세대와 유럽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 서독 의원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이스라엘 모사드(MOSAD)의 집념과 끈기

나치 전범들을 찾아서 처벌하는 독일과 이스라엘의 협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MOSAD)가 보여준 집념도 놀랄만하다. 2차대전 이후 모사드는 세계 각지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던 나치 전범들을 잡아 법정에 세웠는데, 아톨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는 가히 역사적이다. 아이히만은 나치 무장친위대 중령으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붙잡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이송 책임자로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였다. 아이히만은 미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했고 1950년 가짜 여권을 이용하여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여 무탈하게 살았다. 하지만, 1960년 이를 알아챈 모사드는 요원들을 보내 그를 납치하여 압송했다. 그리하여 아이히만을 단죄하는 역사적인 재판이 일년 동안 열렸고, 예루살렘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부인이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선처를 요청했지만, 그녀가 받은 것은 육필로 쓴 벤즈비 대통령이 사무엘상의 성경 구절이었다. “너의 칼이 뭇 여인들을 자식없게 만들었으니, 네 어미도 자식 없이 지내야 마땅하리라.” 1962년 5월 31일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해는 즉시 화장되어 해군 함정에 의해 지중해에 뿌려졌다. 나치 전범을 찾는 이스라엘과 독일의 협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과 성숙한 용서’는 없나?

1950년 한국전쟁도 무수한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한국판 홀로코스트였다. 1,129일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은 국군 전사자 와 부상자 62만 명, 민간인 사망자 24만 명,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13만 명, 부상 민간인 23만 명, 북한군에 의한 피랍자 8만 5천 명 등 10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피해도 컸다. 미군은 전사한 3만 7천 명과 부상 후 고국에서 사망한 숫자까지 합쳐 5만4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참전국 전체의 전상자는 50만 명에 달했다. 전쟁을 도발한 북한도 전사, 부상, 민간인 사상자 등을 합쳐 100만 명 이상의 피해를 보았고,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외치며 북한을 도와 참전했던 중국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이 전쟁으로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지만, 무심한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이산가족들은 휴전선 넘어 지척의 거리에 있는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저세상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6·25 도발을 사과하고 반성하는 행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세미나와 교육, 영화 상영 등으로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는 홀로코스트 추모식은 매년 거행되지만, 6·25 전쟁의 역사는 남과 북 모두에서 왜곡·변질되고 있을 뿐이다. 북에서 6·25는 남조선 해방을 위한 ‘성전’이며 전범들은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남쪽에서도 그렇다. 학생들의 역사 교과서에서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고,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유엔군들도 잊혀지거나 ‘양민을 학살한 군대’로 매도된다. ‘철저한 처벌’이나 ‘성숙한 사과’ 같은 표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부도 군대도 ‘평화‘만을 외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2의 한국판 홀로코스트를 우려하면서 유비무환을 강조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정부도 군대도 이 순간에도 가동되고 있는 북한의 핵무기·미사일 공장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도 않는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前 통일연구원장·前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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