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 같지 않은 사회가 돼 버린 한국 사회’...더 자극적인 말, 상스러운 말, 거짓말 서슴지 않게 돼
프로 정신이 결여, 말하는 데에도 ‘준비’와 ‘생각’ 필요하다는 의식 부족 등이 이유
“말이 사회를 만들고 사회가 말을 만들어...말의 품위 떨어지면 사회의 품위도 떨어지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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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 사회는 말[言]이 말 같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렸다. 나는 지금 ‘말’의 한자어를 쓰기 위해 ‘말씀 언’이라는 글자를 자판에서 찾으며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말씀이라는 존칭어를 쓸 만한 말이 없어졌다.’

예전처럼 어른을 공경하는 분위기도 아니니 어른 말이라 해서 무조건 ‘말씀’으로 받들지도 않는다. 제대로 된 존댓말을 배우는 것은 물론 가르치는 것에도 뜻을 두지 않기에 이 말은 더욱 쓸모가 없어진 듯하다.

말은 사회 현상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말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반대말을 찾아보면 이 두 말이 분명히 다른 말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다르다’의 반대말은 ‘같다’이고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이다. 완전히 다른 말인데 많은 사람이 ‘다르다’를 써야 하는 경우에 ‘틀리다’라고 말한다. 오류를 지적해도 여간해서는 고치지 않는다. 또 이 두 낱말의 뜻이 같다고 생각한다면 ‘틀리다’를 써야 하는 경우 ‘다르다’라고 쓸 수도 있는데 그런 예는 본 적이 거의 없다.

요즘 한국 사회 분위기를 보면 ‘다르다’와 ‘틀리다’가 정말 ‘틀리다’라는 낱말 하나로 통일된 것 같다. 자기와 뜻이 ‘다르’면 ‘틀렸’다고 반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다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 사회의 언어는 어떻게 변화하고 이는 어떤 사회 상황과 관련 있는가? 내가 보기에 유난히 두드러지는, 사회 현상과 관련된 언어 변화를 짚어본다.

우선 말이 점점 자극적이고 독해지고 있다. 이른바 ‘달평 씨(氏) 신드롬’에 빠진 듯하다.

달평 씨는 전상국 작가의 단편 《달평 씨의 두 번째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보은식당’이라는, 상호부터 따뜻한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달평 씨, 평소 그의 선행 철학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의 미담이 신문에 실려 그는 한순간 ‘스타’가 되었다. 그의 미담은 라디오, TV에도 소개되었고 나라에서 주는 상까지 받았다. 겸손했던 달평 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들이 속속 나타났다. 식당은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달평 씨는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강연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달평 씨 신드롬’이 시작된다. 평범한 이야기로는 청중들을 감동시킬 수 없었다. “조실부모(早失父母·어려서 부모를 여읨)했지만 세상은 매정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훗날 결혼반지를 팔아 불쌍한 이에게 쌀을 사주었다”라는 등 아내도 자식들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잊었다. 생계에 위협이 닥칠 정도로 선행에 전념했지만 웬만한 정도로는 세간의 관심을 모을 수 없었다. 초조해진 그는 또 다른 폭탄을 터뜨렸다.

“나는 전과자다. 흉악무도한 죄인이었다.”

세상의 관심이 반짝했다. 그러다 다시 사그라들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칠 수 없었다. 그는, 아내는 거리의 여자였고, 자식들도 버려진 아이들이었는데, 자신이 다 거둔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그는 가족까지 잃고 파멸하고 말았다.

식민지 시절, 우리 글과 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식민지 시절, 우리 글과 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점점 사회 질서가 흐트러지니 요즘엔 웬만한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언론과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려면 “더 자극적으로, 더 거세게”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을 유발하는 계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신중한 말이 오고 가야 할 교육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교수나 강사, 교사들은 사실 확인도 안 되고 자신이 책임질 수도 없는 폭탄 발언을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던진다. 수업 시간에 전직 대통령을 설명하면서 “X새끼”라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에 주목하고 ‘재미있게’ 수업을 들으며 자신의 인기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 다음에는 더 크게 부풀리고, 더 상스럽게 말하며 거짓말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귀족노조의 간부들이 점점 강성이 되는 상황도 비슷하다. “올해는 회사가 어려우니 우리도 고통 분담 차원에서 회사에 협조합시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가는 자리를 차지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 이전보다, 전임자보다 더 거세게, 더 사납게 회사를 몰아부쳐야 막강한 권력과 자금 운용권을 손에 쥐는 간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자제하기에는 때가 늦은 듯, 호랑이 등을 탄 형국이 되어 내릴 수도 계속 타고 있을 수도 없는 지경에 처한 사람도 많다. 문제는, 풍선에 바람을 계속 불어넣으면 터져버리듯, 이런 말들이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더 나아가 파국을 낳는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상스러운 말을 배우며 왜곡된 정보를 사실인 양 받아들여 그릇된 가치관을 갖게 된다. 회사는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사회 자체가 피폐해지고 천박해질 수도 있다. 결국 ‘달평 씨’처럼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그 피해는 당사자 혼자가 아닌, 사회 전체에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은 말을 점점 더 아마추어처럼 생각이나 준비 없이 한다는 것이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은 명언을 남기지 실언을 일삼지 않는다. 명언인지, 실언 혹은 망언인지는 유려한 미사여구인지 아닌지로 판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상황에 맞는 말을 했는가 아닌가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요즘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장에 나와서 평소보다 말을 많이 쏟아내니 실언 내지는 망언도 많을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자이거나 정치인처럼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정말 말조심을 해야 한다. 말은 자신의 정신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면 정치인이나 고귀 공직자가 평범한 사람들도 하지 않는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격언집에 실릴 명언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실언이나 망언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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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도 여러 번 반복하면 사실이 된다고 말한 레닌의 동상(러시아·하바로프스크).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 일과 지위에 대한 프로 정신이 결여된 데다, 말하는 것에도 준비와 생각이 필요하다는 의식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프로라면 어느 모임이나 장소에 가기 전에 그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말을 준비할 것이다. 고위 공직자나 정치가들의 경우 대부분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막강 비서진, 보좌진을 거느리고 다닌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어딘가로 나설 때 “거기서는 어떤 분위기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라는 식으로 의견을 물을 수도 있다. 비서관이나 보좌관이 하는 일이 의견이나 도움을 주는 것이니까.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도우려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시간과 장소, 듣는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식 이하의 발언들을 하는 것이다. 프로는 조력자를 잘 활용한다. 보좌진도 프로라면 자기 앞에 서는 사람의 세심한 언행까지 실수 없이 잘 챙길 것이다. 그런데 앞에 선 사람이나 뒤에서 도와야 하는 사람이나 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그런 아마추어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현상은 말의 무게와 책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따위의 말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놀랍게도 말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진실을 추구하고 보도해야 할 언론이 앞다투어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아님 말고’를 외친다. 누군가 내뱉은 말이 잘못되었다고 근거를 들이대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기도 한다.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부끄러워하거나 수정하기는커녕 수긍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가볍게 끝내버리기도 한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니 말이 아닌 말이 난무한다.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비판도 예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 거짓말이나 막말, 경우에 안 맞는 말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사회도 여간해서는 그 잘못된 말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가르침은 정말 고리타분한 유물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런 지경에서는, 거짓말도 여러 번 반복하면 사실이 된다는 레닌의 말이 더욱 두렵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말의 내면적 가치가 떨어졌는데 외형적인 품위가 안 떨어질 리 없다. 우리 모국어의 가장 올바른 말하기와 글쓰기 방법을 규정하는 국어 문법과 어법은 시험 볼 때만 필요한 것이 된 지 오래다. 아무렇게나 말해도 뜻만 통하면 그냥 넘어간다. 식민지 시절에도 우리 글과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애썼는데 나라를 되찾은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말과 글을 망가뜨리고 있다.

말이 사회를 만들고 사회가 말을 만든다. 그래서 말의 품위가 떨어지면 사회의 품위도 떨어진다. 언어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을 사회가 방치하면 인성도 집단적으로 망가진다. 이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 두 가지는 경쟁적으로 계속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저속한 말을 쓰면서 비루하게 사는 미래로 우리를 몰고 갈 것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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