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6회. "정치는 정글이다! 모주석의 촉"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46回. “政治는 정글이다! 모주석의 觸”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08, Hua Guofeng)은 이 회의를 통해서 비판당한 후 최고 권력을 상실했다. 중공중앙은 이 회의를 통해서 "개혁개방"을 시대정신으로 채택했고, 그 결정은 같은 해 12월 18일에서 12월 22일에 걸쳐 북경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공표되었다. 12월 13일 공작회의 폐막식에서 부주석 엽검영(葉劍英, 1897-1986, Ye Jianying)은 중국공산당은 2년 7개월간에 걸쳐 조사한 문화혁명 피해 조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전국의 피해 인구 총수: 1억 명 (전체인구 9분의 1)
박해(迫害) 피해: 745만 명.
구속조사: 420만 명
자살: 172만8천 명. 지식인 자살 20만. 자살방법: 투신, 목매달기, 투하, 음독.
1970년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 당시 학살된 인구: 13만 5천여 명.
무장투쟁(武鬪) 사망자: 23만 7천 명,
무장투쟁 부상자: 703만 명.
파괴된 가정수: 71,200 호.
억울한 사망자(寃枉死亡者): 2,000만 명 초과
국민경제손실: 8,000억 인민폐
기타 가택압수·가택수색: 1,000만 호
강제압수 재산: 현금, 예금 및 공채 인민폐 428억 원. 황금 118.8 만여 량. 골동품 1천만 건.
국보급 유적지 파괴: 35곳.
훼멸/소각된 문헌자료, 고서전적: 집계 불가.
계급적인(階級敵人) 색출: 1만6천6백 여 명,
전국의 교회, 사찰, 도관, 고건축: 거의 대부분 훼손
반혁명분자 색출운동: 1,700여 종가(宗家) 파괴
도시에서 농촌으로 축출된 우귀사신(牛鬼蛇神, 우파의 범칭): 3,900만 명
<《文革史稿: 文革史料彙編》(1), 7>

  

1968년 4월 5일, 중국 흑룡강성 하얼비시. 문혁기간 자행된 학살
1968년 4월 5일, 중국 흑룡강성 하얼비시. 문혁기간 자행된 학살

 

이 통계는 그러나 "불완전한 통계"일 뿐이었다. 아직도 2년 전 사망한 모택동의 망령이 중국 전역을 배회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 통계는 문혁의 피해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임엔 틀림없다. 문혁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열기 위해 중공정부에서 작심하고 까발린 문혁의 어둠이기 때문이다.  

 

중앙위 공작회의에서 부주석이 직접 전국적인 문혁의 피해를 폭로한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모택동의 노선을 계승한 국가주석 화국봉의 실권에 쐐기를 박는 장면이었다. 더 이상 모택동의 망령에 지배받지 않겠다는 개혁파 집단지도체제의 결의였다. 그렇게 중공중앙은 문혁의 망령을 내몰고 개혁개방의 대로로 나아갔다. 이로써 등소평을 위시한 개혁파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독단적인 공산주의 이념의 족쇄에서 해방됐다.

 

등소평은 바로 다음 달 미국으로 날아가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ie Carter, 1924-  )와 직접 만나 회담을 한다. 그 순간 이후 중국의 전 인민은 문혁의 사슬을 벗고 "부귀영화"를 향한 질주를 개시했다. 내달리는 인민의 등을 떠밀면서 최고영도자 등소평은 외쳤다. "사회주의는 빈곤이 아니다. 치부광영(致富光榮)! 부자가 되는 건 영광스럽다!"

 

인간사회의 개개인은 모두 영리하고도 약삭빠르지만, 인간이 뭉쳐서 만들어내는 정치의 현실은 대부분 난장판이다. 한 금융전문가의 명언이 떠오른다. "오늘날 세계에서 시장은 법칙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돌아간다. 문제는 정치다. 정치가 정글이다."  1978년 중공정부 공식 발표 1억 명의 피해자를 낳은 문혁의 광기는 대체 왜 생겨났는가?  이제 다시 문혁의 정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 정글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노회한 늙은 혁명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정글의 정치

 

문화혁명을 연구해 온 중국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모택동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은밀하게 추진한 대반란이었음을 인정한다. 불시에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 화염이 아니라 의도된 수순을 따라 톱니처럼 맞물려 진행된 정치드라마라는 의미이다. 학계의 중론대로라면 모택동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머릿속으로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는 대반란의 시나리오를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모택동의 심복 강생(康生, 1898-1975, Kang Sheng)은 1965년 9월부터 1966년 5월까지 굵직한 사건을 깨알 같이 기록한 일지를 남겼다. 일명 대사기(大事記)라 불리는 강생의 일지에 따르면, 모택동은 1965년 늦여름부터 이미 오함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1965년 9월 강생은 모택동이 팽진에게 “오함이 비판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기록한다. 아무리 늦어도 1965년 늦여름 모택동은 이미 오함의 숙청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머릿속으로 향후 전개될 중국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상상하고 있었던 듯하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히 설명된다.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 6차 전체회의에서는 “건국 이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정문”을 채택하는데, 이 결정문에 따르면, 문화혁명은 모택동의 정치적 피해망상증에 기인했다. “모택동 동지는 부르주아와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이 당, 정부, 군대 및 문예계에 침투한 결과, 정부의 각 기관과 조직의 지도부가 그들에게 장악되었으며,” 그 결과 “당권을 장악한 주자파 인사들이 중공중앙 위원회에 부르주아 본부를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중공중앙 위원회를 장악한 유소기와 등소평을 축출하고 다시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택동은 문혁이라는 극단적 대중운동의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명분이야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늙은 혁명가의 시기, 공포, 노욕이 빚어낸 정치보복의 광기에 가까웠다.

 

동기야 어찌됐건 모택동은 정치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짰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의 글이 상해의 《문회보》에 게재된 직후, 모택동은 양상곤(楊尙昆, 1907-1998, Yang Shangkun)을 전격적으로 해임한다. 1940년대부터 중공중앙과 중앙군사위에서 활약했던 양상곤은 1956년 이후엔 중앙서기처의 후보서기로 발탁되었고, 1965년 당시에는 중공중앙의 판공청(辦公廳) 주임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양상곤의 전격적 해임은 실제로는 유소기와 등소평을 겨냥한 최초의 일격이었지만, 모택동은 큰 무리없이 조용히 그 일을 처리한다. 양상곤은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1988-1993년 기간동안 등소평의 후원을 받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에 올랐던 이른바 팔로(八老, 여덟 원로) 중 한 명이었다. 이후 그렇게 승승장구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문혁기간 내내 감금상태로 지내야만 했다.

 

1965년 11월 비슷한 시기엔 발생한 양상곤의 파면과 오함에 대한 요문원의 공격이 치밀하게 연동된 모택동의 작전임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양상곤이 제거된 후, 모택동은 국방장관 임표(林彪)를 통해서 군부의 수정주의자들을 색출하게 한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직언하는 국방장관 팽덕회와 그의 직속부하들을 암 도려내듯 싹 파면한 모택동은 건강문제로 시름하던 임표를 불러내 군부를 장악하도록 전격 지원한다.

 

본격적으로 문혁이 전개되기도 전 이미 임표는 "정치우선"의 원칙에 따라 인민해방군을 모택동사상으로 무장시켰다.
본격적으로 문혁이 전개되기도 전 이미 임표는 "정치우선"의 원칙에 따라 인민해방군을 모택동사상으로 무장시켰다. 군인들의 손에는 임표가 편집했다는 작은 붉은 책 《모택동어록》이 들려 있다. 

 

3. 군부를 장악하라.

 

1966년 5월 16일 공식적으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개시되기 2-3년 전부터 이미 임표는 인민해방군에서 모택동 인격숭배를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가 편찬했다는 <<모택동어록>>은 인민해방군의 필독서가 되었다. 인민해방군의 모든 병사들은 그 작은 붉은 책, “소홍서(小紅書)”를 손에 쥐고 날마다 모택동의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다. 임표는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선 군사훈련이나 무기보강보다 이념교육이 우선돼야 한다는 정치우선의 원칙을 부르짖고 있었다. 군을 책임진 임표가 충실하게 보위하는 한, 모택동은 스스로의 정치적 파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모택동은 임표와의 내밀한 소통을 통해 군대를 장악하는 계략을 짜고,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 모든 계획은 요문원이 오함의 《해서파관》을 독초라 선언한 후 전국에서 야단스럽게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군부 내에서 임표가 집요하게 조준한 인물은 바로 인민해방군 대장(大將) 라서경(羅瑞卿, 1906-1978)이었다. 라서경을 잡기 위해서 임표는 모택동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했다. 직접 라서경을 공격하는 대신 라서경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중앙군사위 부(副)비서장 초향영(肖向榮, 1910-1976, Xiao Xiangrong)이라는 인물이었다.

 

모택동은 일단 팽진을 숙청하기 위해서 요문원이라는 “충견”을 풀어서 오함을 물어뜯게 했다. 요문원으로 하여금 잔인하게 오함을 물어뜯게 함으로써 일단 팽진을 격분시킨다. 요문원에 격분한 팽진이 오함을 옹호해야만,  오함의 배후에 팽진이 있다고 천하에 공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임표는 라서경을 숙청하기 위해 인민해방군 대령 계급이었던 자신의 부인 엽군(葉群, 1917-1971, Ye Qun)을 시켜서 표독스럽게 초향영의 인격에 생채기를 내게 했다. 임표의 작전대로 라서경은 초향영을 변호하게 되고, 그 결과 임표의 덫에 걸려 파면되고 만다. 

 

1930년대 연안시절 군대에서 만나 결혼한 임표와 엽군은 둘 다 심적으로 조급하고 불안정해 주변의 구설수에 휘말렸지만 둘만은 서로 끔찍이 아끼고 위했다고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1971년 9월 13일 함께 몽고로 탈주하던 중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온도르칸 황야에서 한 날 한 시에 목숨을 잃는다. <계속>   

 

"모주석의 마음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다!" 임표는 문혁 초기 권력의 실제로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라 믿고 있었다.
"모주석의 마음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연결된다!" 임표는 문혁 초기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라 믿고 있었다.

 

송재윤 객원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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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G. Mazur, Wu Han, Historian: Son of China's Times (Lanham, MD: Lexington Books,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徐志高 主编, 《文革史稿:文革史料彙編(1): 第一冊: 社會主義文化革命》 世界华语出版社,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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