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권 부정선거와 조국 일가족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많은 국민들이 586 운동권 정체 간파하기 시작
좌파 진영 내부에서 일찍이 있기 어려웠던 자체 비판과 성찰적 고백 같은 게 출현하기 시작
일부 비판적 좌파 지성의 커밍아웃이 반(反)전체주의적 좌파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길 소망

문재인 정권은 그 정체성이 뭔지 한 번도 스스로 정직하게 천명한 적이 없다. 586 운동권도 자신들이 누구인지, 뭘 하려는 자들인지를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정확하게 고백한 적이 없다. 그저 막연하게 (국회에 출석해서) “나는 젊었을 때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노라”라고만 했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란 두 글자를 뺀 채 그저 민주주의라고만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일종의 전체주의적 직접민주제 같은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그들 내부의 은밀한 담론과 의식(儀式)이 바깥 사회로 흘러나온 바는 있다.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 죽었을 때 빈소를 차려놓고 추모했다느니, 밤새 북한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듣고 그걸 노트에 받아 써 의식화 교육을 했다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만 더러 났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계열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그들은 외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민주화 세력, 반독재 세력, 자주파, 사회정의론자들”이라고만 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그래서 그들의 정체를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주변의 순진파들도 “요즘 세상에 공산주의가 어디 있느냐?”며 애써 현실을 호도하려고만 했지, 운동권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해 그것을 외부 세상에 알리는 걸 무슨 ‘부도덕’이나 되는 것처럼 금기(禁忌)시 했다.

그러나, 그런 운동권도 일단 정권을 잡고 세(勢)를 확립한 뒤부터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최단시일 안에 후닥닥 해치우려는 조급증 때문이었는지, 자신들의 정체를 부지부식 간에 조금씩 드러냈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 ”미국하고 멀어지면 중국하고 살면 되지“ ”한국 정부가 요구하면 미군 철수해야“ ”토지를 국가 소유로...“ ”부동산 거래는 정부 허가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종교패권-언론패권-경제패권 타파” “공수처를 만들어 검찰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운운.

이런 극좌 전체주의 속성 표출과 함께 운동권 실세들에 의한 관권 부정선거와 조국 일가족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많은 자유 우파 국민들은 비로소 문재인 정권 또는 586 운동권의 정체를 간파하기 시작했다. “아항, 알고 봤더니 저 친구들 이런 위인들이었구먼...” 이래서 광화문 광장에 수백만 군중의 성난 함성이 메아리쳤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건 만시지탄이다. 이 더디기 짝이 없는 인식 능력은 자부할 거리가 아니라, 자괴할 거리가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할 각성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따듯한 겨울날 같은 축복이었다.

이 정권의 도덕적 추락이 노출되면서 파생된 또 하나의 2차적인, 그러면서 자못 주목할 효과도 있다. 바로, 좌파 진영 내부의 노선분화와 비판의식 발아(發芽)였다. 좌파 진영 내부에서는 근래, 일찍이 있기 어려웠던 자체 비판과 성찰적 고백 같은 게 출현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사례를 상기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이 전례 없는 사태는 진보를 자임하는 좌파를 위해서도 유의미한 현상이라 할 만하다. 일부 소수 좌파 지식인들이 다수 타락한 좌파 권력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그러나, 서구 지성계에선 오랜 흐름의 하나였다. 전체주의 좌파에 대한 반(反)전체주의 좌파(Anti-totalitarian Left)의 반발이 그것이다.

반(反)전체주의 좌파의 대표적인 지식인은 소설 ’1984‘를 쓴 조지 오웰이다. 그는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끔찍한 전체주의 극좌파의 지옥 같은 세상을 신랄한 풍자로 묘사한 ’1984‘를 통해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해선 성찰적 좌파가 어떻게 타락한 좌파를 비판해야 할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건 “진정한 보수가 되기 위해선 성찰적 우파가 어떻게 타락한 우파(나치즘, 파시즘, 반(反)유태주의, 폭력적 민족 우월주의)에 맞서야 할 것인가?”와 똑같은 질문일 수 있다. 조지 오웰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광의의 진보에 속한다고 말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좌파이기 전에 반(反)전체주의자였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 좌파 진영에선 1980년대 중반에 전체 운동권이 NL 주사파에 의해 ’천하통일‘이 된 이래 그들의 전체주의와 무지몽매와 광신과 시대착오에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성찰적 좌파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운동권이 갈수록 3류와 저질들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좌파 지성‘이라 할 만한 자기교정 능력이 고갈되었던 탓이다. 고급 지식이나 지성보다는 이른바 ’단무지(단순하고 무지한)‘ 그러나 품성만은 수령이 하라는 대로 움직여주는 고지식한 인간형이 돼야 한다는 계명이 군림했던 그 시절이었다. 그 3류들의 대행진이 오늘의 무지막지한 유사 전체주의 ’삶은 소대가리‘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바라는 대로 될지는 의문이나, 요즘의 일부 비판적 좌파 지성의 커밍아웃이 2020년대 한국 판 조지 오웰적 사고, 즉 반(反)전체주의적 좌파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길 소망한다. 턱도 없는 소망일까? 대한민국 제헌정신인 자유체제, 의회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법치주의, 권력분산, 복수정당 제도, 시장경제가 리드하는 번영 속 복지의 길을 가려는 진정성 있는 ’민주적 좌파(Democratic Left)’가 갈라져 나올 수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 진일보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기대보다는 주시만 할 따름이다.

류근일(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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