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념 선전과 선동의 무기로 동원되는 세계 최고의 사례
이념적 공격성과 편향성 드러내는 영화 목록 수도 없이 이어져
예술은 고의적 왜곡이나 특정한 목적 가진 선동 담아서는 안돼
‘전함포템킨’(1925)도 소련 혁명 선동하는 프로파간다...뛰어난 영상 기법도 '독극물 칵테일'일 뿐
원전 폭발 사고 소재로 한 ‘판도라’는 어떤가?
‘기생충’, 기법의 능란함과 유연함으로 이념적 선동 뛰어나게 은폐...‘남산의 부장들’보다 더 위험

조희문 영화평론가(前 인하대 교수)

‘기생충’이 ‘남산의 부장들’을 쓸어버렸다. 지금 한국영화계에는 ‘봉준호’와 ‘기생충’만 보인다. 화제를 분출하는 화산이고,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다. ‘기생충’이 화제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와 계급적 적대를 시니컬하게 헤집는다. 영화적 풍자라고 넘기기에는 시선이 사납고, 묘사가 험악하다. 아카데미 수상 흥분이 가라앉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까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한국영화는 이념 선전과 선동의 무기로 동원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사례다. 민주화가 실현되고,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조류 인플루엔자, 사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합친 것보다 더 극성스럽게 한국사회를 횡행한다. 선동영화에 담긴 대한민국은 타락한 권력과 기회주의자들이 결탁해서 만든 뒤틀린 사회이자 분단을 조장하는 반역의 나라다.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어떻게든 지난 흔적을 지워버리고 궁극적으로는 좌파가 지배하는 왕조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과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1987’ ‘그때 그 사람들’ ‘효자동 이발사’ 등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한국영화 역사를 새로 썼다는 ‘기생충’, 일정 시대를 다룬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를 재현한 ‘봉오동’, 위안부 논란을 다룬 ‘김복동’ ‘눈길’ ‘소리굽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그리고 싶은 것’, ‘아이 캔 스피크’, 세월호 침몰을 다룬 ‘대통령의 7시간’ ‘그날 바다’ ‘생일’ ‘다이빙벨’ ‘ 4대강 정비 사업을 비난하는 ’삽질‘ ’모래가 흐르는 강‘, 광주사태를 담은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김군‘,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탈원전 정책의 계기를 삼았다던 ’판도라‘,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재현한 ’변호인‘이나 ’노무현입니다‘ ’두도시 이야기‘, 미군이나 미국을 적군처럼 묘사한 ’괴물‘ ’이태원살인사건‘’웰컴투 동막골‘ ’작은 연못‘, 북한을 공존의 대상으로 설정한 ’의형제‘ ’은밀하게 위대하게‘ ’공조‘ ’강철비‘ 6.25 전쟁을 배경으로 삼지만 북한군을 동지처럼 묘사한 ’서부전선‘ ’스윙키즈‘, ’오빠생각‘, 재판을 통해 예전의 불법과 왜곡을 바로 잡는다는 ’부러진 화살‘ ’재심‘ ’소수의견‘ 기업(기업가)을 부도덕한 범죄집단처럼 그린 ’또 하나의 약속‘ ’베테랑‘ 처럼 이념적 공격성이나 편향성을 드러내는 영화들의 목록은 수도 없이 이어진다. 대규모 자본으로 만드는 대형 상업영화에서부터 소규모 후원금으로 만드는 작은 영화들에 이르기까지 범위도 다양하다.

’기생충‘과 ’남산의 부장들‘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기생충’은 부자에게 온가족이 기생충처럼 들러붙다가 그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아예 떼죽음 판을 벌이는 이야기다. 배우들이야 감독이 주문하는 대로 연기를 했다고 치지만, 이야기를 구성하고 연출을 조직한 감독, 그런 영화에 투자한 영화사는 금수저 생활을 하고 있는 부자들이다. 학력을 헤아려도 지식인 수준들이다. 부자가 계급갈등을 선동하며 다른 부자를 공격하고 조롱하는 것이 정의로우며, 영화의 예술 수준을 높이는 것인가?

‘기생충’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최고상을 수상한데 이어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과 외국어 영화상 부문까지 휩쓸었다. 한국영화로서는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이지만,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부자에 대한 적개심, 부자에게 기생하려는 계급적 패배주의자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패대기질을 한다.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영화의 바탕을 바꿀 수는 없다.

대통령이 부하에게 피격당해 숨지는 사건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은 부자들의 자리에 권력자들을 대신 배치한다. 영화 속 대통령은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 해외 계좌로 돈을 빼돌리고, 부하들을 필요한 만큼 이용하다 용도폐기 해버리는 자기 중심적 치한으로 설정한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주변 인물들 또한 공적 책임이나 신념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는 맹목적 친위부대원들이다.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 중앙정보부장 만이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고, 지도자에게 올바른 충성을 하는 인물처럼 그린다. 대통령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 당연한, 당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란 이미지 조작이다.

영화는 사실이던 허구던 모두 소재로 삼을 수는 있다. 다만 어느 경우던 고의적 왜곡이나 특정한 목적을 가진 선동을 담아서는 안된다. 그 방향으로 발을 딛는 순간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의 대상의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죽이려는 흉기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층위의 선동영화들은 수준의 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진지한 성찰과 고뇌 대신 특정 대상을 겨냥한 적개심과 선동을 우선한다. 이념지향을 담은 영화들을 가리켜 대한민국을 죽이려는 독극물이라고 하는 이유다.

선동영화의 원조는 소련 공산당

영화를 선전 수단으로 징발한 것은 소련 공산당이 원조다. 레닌은 공산혁명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직후부터 영화를 공산당의 등장을 정당화하고, 공산혁명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무심한 다수 인민들을 격동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조직화와 실행을 서둘렀다. 제작과 상영, 배급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당이 요구하는 영화만 만들었다. 예술? 부르주아 반동들의 썩어빠진 생각이고 흥행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 또한 가난한 인민들의 돈을 갈취하려는 자본주의의 도구가 될 뿐이다.

공산혁명기의 소련 영화는 부자가 악마보다 더 나쁘다고 선동한다. 그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적게 가졌다고 무조건 옳고 착하다는 생각의 바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다. 가난하기 때문에 무한히 착하기 만한 한 노동자・농민이, 그들보다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자는 타도하고 처단해야 할 인민의 적이며 원수라고 단정할 뿐이다.

선동을 강조할수록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채워진 모순과 차별의 세상이다. 부자는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들이 부자가 된 것은 인민, 대중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임금을 적게 주고, 먹을 것을 빼앗으며,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뜯어 낸다. 가난한 노동자, 농민은 한없이 순박하고 착한 존재들이지만, 부자들의 착취와 공갈 협박에 시달린다. 부자만 없으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부자들의 돈과 집, 땅을 나누어주면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만족하리라.

부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반동이다. 무산자 대중의 적이며 원수다. 부자가 없어져야 비로소 세상은 공평해질 것이다. 부자를 처단해야 하는 것은 인민 대중들이 해야 할 최고, 최선의 과업이다.

다수의 대중을 선동하고 적개심에 불타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처럼 보이도록 조작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부자는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용서할 수 없는 대상으로 둔갑한다. 인민 대중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는 극악무도한 원수들을 처단하는데 무슨 이유와 절차가 필요한가?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만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그래야 모두가 차별 없이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일을 당과 혁명지도자들이 할 터이니 인민 대중은 무조건 따르라.

소련 혁명을 선동하는 ‘전함포템킨’(1925)은 예술영화의 걸작처럼 꼽는 경우가 많지만 바탕은 무고한 민중을 혁명에 끌어들이기 위한 선동, 조작의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몽타주 편집 기법을 개발한 선구적 작품이라는 평가도 공허하다. 선동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이미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개발한 ‘독극물 칵테일’ 기법인 탓이다.

정치 선전에 동원된 ‘판도라’

원전 폭발 사고를 소재로 한 ‘판도라’는 영화의 선동성과 정치적 목적이 결합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둔갑하는 지를 보여준 구체적 사례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 탓에 원자력 발전소의 시설이 폭발 사고를 일으킨다는 설정은 극단적 상황을 겨냥한 영화적 설정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방사능 유출과 인명피해. 발전소 인근 지역은 물론 한반도 전체가 불안과 공포에 갇힌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시절, 이 영화를 보았고 원전폭발 위험을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자료로 인용했다. 대통령이 된 후 탈원전 정책은 구체적으로 실행되었고, 영화는 원전의 위험을 입증하는 증거로 동원되었다.

하지만 영화든 정책이든 어느 부분에서도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다면’ ‘원자력 발전소가 통제력을 잃어버린다면’ ‘통제 불능상태에서 폭발한다면’ ‘방사능이 분출되어 하늘과 땅, 물이 오염된다면’ 등등 오로지 상상과 가정으로 꾸며진 허구의 상황일 뿐이다. 대통령이 경고한 원전의 위험성 역시 안전관리 시스템을 배제한 가정과 상상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언젠가 태양이 폭발하고, 지구가 사라진다면’이란 가설은 영화적 상상력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근거도 당위도 없는 망상이다.

‘기생충’이 ‘남산의 부장들’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것은 영화적 공격성이 겉으로 보이는 기법의 능란함과 유연함에 덮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굳이 영화의 내면이나 배경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경쾌하게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심하게 쓴 약을 캡슐로 포장해 삼키기 쉽도록 만든 것처럼. 더구나 세계 최고라는 상까지 머리에 얹었다. 왕관까지 쓴 것이니 그 위세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인용하기는 했으나 각 인물들에 대한 과장과 왜곡이 심하고 일관성도 들죽날쭉이어서 영화적 완성도가 불안하고 그만큼 몰입감도 떨어진다.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을 조롱하며 모욕하겠다는 의도만 드러날 뿐이다.

‘기생충’은 한국영화 역사에서나 이념영화의 목록에서나 중요한 흔적을 만들고 있다. 산업화로 성장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대중독재와 초법적 권력의 난동을 걱정해야 하는 것처럼 최고의 성장과 발전을 이룬 한국 영화의 이념적 선동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2020년 2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前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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