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국 정복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 (下) [유태선 시민기자]
불교의 중국 정복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 (下) [유태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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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2.13 09:56:11
  • 최종수정 2020.03.0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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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발생하여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 전파된 불교는 중국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켰으며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화된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 한국, 일본이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한다.

하지만 불교의 전파 과정에 있어서 유교와 도교에 기반하여 한나라 시대에 이미 높은 수준의 문명을 달성했었던 중국인들의 외래 종교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따라 불교가 중국 대륙 전체에 확산되어 가던 남북조 시대에는 지배층이 통치이념으로 신봉하던 유교와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부상하던 불교 사이 그리고 피지배층이 심적으로 의지하던 도교와 새로운 신앙의 대상인 불교 사이에 이론적 논쟁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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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와 불교의 대립

종교적인 나라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현세적인 나라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불교 교단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인도에서는 불교 교단이 주로 브라만교 등 다른 종교 집단들과 대립했었지만 중국에서는 세속 권력 및 유교를 신봉하는 사족 집단과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1) 정치적, 경제적 측면

"승려는 세속의 권위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고 국가의 감독도 받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자율성이 강한 불교의 세력이 커져 가면서 "넓은 하늘 아래 왕의 것이 아닌 땅은 없으며 그 영역 안에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없다"라고 믿는 유교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고승 혜원은 "세속에 머무는 재가의 사람들은 유교경전에 따라 국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지만 가정을 떠난 출가의 사람들은 은거하면서 세속의 행동을 바꾸어 도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세속의 원칙과 같은 예를 행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쿠데타를 통하여 동진을 장악했던 장군 환현(桓玄: 서기 369년-서기 404년)은 승려들 중 상당수가 노역을 피하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하여 불교에 입문했을 뿐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1) 불교 경전에 깊은 지식이 있어서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

2)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항상 암자에서 생활하는 사람

3) 산에 살면서 뜻을 기르고 세속의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

불교 측은 환현의 주장에 대하여 "극소수 승려들의 잘못된 행동을 이유로 불교 전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유학자들이 있다는 이유로 유교 경전을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반발하였고 결국 승단의 세속 권력에 대한 자율성을 인정받았다.

(2) 실용적 측면

현세적인 중국인들이 보기에 돈을 거두어서 커다란 탑과 과도하게 장식된 사찰을 짓는 데 낭비하는 승려들은 쓸모 없고 증명될 수도 없는 아편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혜원은 부처의 가르침을 펼치고 모든 중생들을 포용하는 출가자들의 공덕은 황제나 국왕의 공덕과 같다고 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 국가의 건설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하면서 정신적 측면에서 불교의 효용을 강조하였다.

동진을 계승한 송(宋)나라의 상서령(尙書令) 하상지(何尙之: 서기 382년-서기 460년)는 궁중 토론회에서 백성 전체가 불교로 개종하면 악행이 사라져서 궁극적으로 태평한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북조 군주들의 예를 들면서 초기의 이민족 군주들은 양민을 학살하였으나 불교를 믿는 군주들인 흉노족의 석호와 티베트족의 부견은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3) 문화적 우월성 측면

불교의 도입기에는 유교에 기반한 중국인들 특유의 문화적 우월의식이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다.

그 후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을 읽어 본 많은 지식인들이 공자와 부처의 사상은 모두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며 공자는 타락한 사회를 구원하려고 노력하였고 부처는 근본 원리를 드러낸 것이므로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 중 일부는 중국이 아니라 인도가 세상의 중심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면 일반 민중들은 "불교는 공자 이전의 고대 중국에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불교를 중국 문명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위한 역사 인식의 왜곡을 통하여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4) 도덕적 측면

가정에서 벗어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생애 내내 독신생활을 지키고 머리를 밀고 육체적 고행을 수행하는 불교 공동체는 유교에 기반한 중국 전통 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유교의 경전 [효경]에 의하면 불효는 가장 큰 죄였고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재앙이며 부모로부터 받은 몸은 효행의 살아 있는 증거로써 고이 보존되어야 했다.

불교 반대파들의 강력한 비판에 대하여 동진의 대문장가 손작(孫綽: 서기 300년-서기 380년)이 자신의 저서 [유도론]에서 불교의 해탈이 효의 가장 완전한 실천이라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면서 유교와 불교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1) 부모와 자녀들은 하나의 전체이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최상의 경지인 부처에 이르는 것은 최상의 효행이 된다.

2) 유교에서도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충은 (가족을 위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효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회적 덕행 간의 모순이 있는데 불교 공동체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3) 젊은 시절 가출했던 부처도 자신의 아버지를 불교에 입문시키는 최상의 효행의 모범을 보인 바 있으므로 승려들이 반드시 불효자인 것은 아니다.

2. 도교와 불교의 대립

중국 고유의 사상인 도교는 철학적 측면과 대중적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현학(玄學)은 도교 경전인 [노자]와 [장자]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도교의 철학적 측면이고 천상의 몸을 얻어 영원히 사는 신선(神仙)이 되기 위한 수련방법인 도술(道術), 황로지술(黃老之術) 등은 도교의 대중적 측면이다.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 사이의 번역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교의 개념을 유추하여 불교 교리를 설명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유행하자 중국인들은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와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는데 이는 양자의 이론적 긴장관계로 이어졌다.

세속적인 사람들의 나라 중국에서 도교 교단은 일종의 종교집단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보다 정교한 이론적 체계를 갖춘 불교 교단의 확대는 도교의 입지를 흔들어 버릴 위험을 내재하고 있었다.

(1) 도교의 불교에 대한 공격

후한 말기인 2세기 후반 노자가 서역으로 가서 이민족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설법한 것이 곧 불교라는 화호설(化胡說)이 도교 신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이들은 "외국의 가르침인 불교는 야만인들의 요구에 맞추거나 야만인들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도교를 변형한 것에 불과하므로 중국에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교의 고위 성직자 왕부(王符)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저술하면서 체계화된 화호설은 [사기] 노자전의 아래 대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 왕실의 덕이 타락하는 것을 것을 보고 노자는 세속을 벗어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서역으로 가는 길에 관문을 지키던 윤희(尹喜)를 만났고 그의 요구에 따라 후대에 [도덕경]이라고 불리게 되는 글을 써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길을 떠났고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기 300년 이후 이민족들에 의하여 중국 북부를 잃어 버린 사족들의 배외적 감정이 고유 종교인 도교 신자들의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2) 불교의 도교에 대한 반격

노자의 환생이 부처라고 주장하거나 윤희가 노자에 의하여 부처로 선발되었다는 도교 신자들의 화호설은 불교 신자들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화호설을 학술적 근거에 입각하여 부정하는 것은 6세기 이전의 기록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도들은 [노자화호경]에 입각하여 "노자가 불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 그는 부처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파견한 제자이다"라고 서술한 다수의 위조 문서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반격하면서 도교 신자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대표적인 위서(僞書) 중 하나인 [청정법행경]은 부처의 제자 유동보살(儒童菩薩)이 공자로 광정보살(光淨菩薩)이 공자의 제자 안회로 부처의 제자 가섭(迦葉)이 노자로 환생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불교의 유교 및 도교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다.

혜원은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부처 자신이 중국의 위대한 국왕, 재상, 스승으로 환생하여 도덕의 발전을 인도하거나 보살로서 반복적으로 환생하여 자비로운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설법한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서기 504년 남조의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은 칙령을 발표하면서 이제 불교는 유교와 도교에 대하여 확실한 우위에 서게 된다.

"노자와 주공, 공자가 비록 부처의 제자들이지만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좋은 것을 홍보하는 것에 그쳤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에는 적지 않은 잘못된 것들이 있다."

마침내 외래종교인 불교는 중국 문화의 기반 자체가 먼 과거의 불교 성인들의 교화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중국 대륙 전체를 부처님의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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